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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홀연했던 사나이>: ‘영화라는 매체로의 꿈꾸기’
    REVIEW/Theater 2013. 5. 28. 03:55

    과거와 현재의 혼종적 경계


    ▲ 연극 <홀연했던 사나이>(오세혁 작, 이윤주 연출) [사진 제공=연희단거리패]


    은하수다방, ‘너구리’ cf 선전이 흐르는 어느 한낮의 하릴없이 게으른 풍경, 이것은 의고적 스타일로 그 시대를 알리는 시대-정보로서 흘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곧 ‘한지붕 세가족’의 화면이 나오고 여기에 대사들을 지우고 그를 대신하는 화면과의 동기화를 이룬다. 이 동시성의 알레고리는 패러디의 기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엄밀히 순돌이가 아닌 승돌이라는 점에서 패러디적 차용인 셈이고 일종의 ‘중첩된 기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장기하의 ‘싸구려커피’가 첫 무대 장면을 가리키고 지배하는 음악이자 타이틀이 되는데 이 복고 스타일의 곡은 과거의 (현재에 기입된) 흔적과 현재와 분리된 또 다른 현재로서 과거 그 자체가 재생되고 있음 사이에서 기억의 개입이 ‘주관적인 시선’에서 이 친숙한 거리를 형성하는 일종의 재료로 차용되고 재현됨을 의미한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관점 투영과 기시감 어린 재료들의 현재적 발화는 이 존재들이 우리와 멀지 않은 한순간의 삶의 불가능성의 평면을, 결코 되돌아올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불가능하지 않은 만남으로 과거‧현재의 평행우주의 세계를 관객으로부터 체현시킨다. 우리는 과거‧현재의 혼종된 시대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에 대한 재현도 현시도 아닌 과거를 낭만으로 끌어 올리는 관점이 녹아 있다.


     이 ‘기시감’ 어린 ‘친숙한’ 존재들은 과거를 그 자체로 매개한다. 이들의 삶이 제4의 벽에 의한 환영이 아닌 ‘현재로부터 촉발된 과거로의 꿈꾸기’에서부터 온 ‘환영적 실재’로서 친숙함을 주고 있다면, 이러한 재생(play)의 환등기는 연극이 아닌 영화를 구성하는 가운데 현재적 지침에 따르는 연기로써 장면들을 만들며 형식적으로는 연극에 대한 메타적 시선을 상정하는 한편 내용적으로는 시네필의 낭만에 부합하게 된다.


    시나리오 구성 과정에서의 배우-되기


    ▲ 연극 <홀연했던 사나이>(오세혁 작, 이윤주 연출) 포스터 [사진 제공=연희단거리패]


     승돌이의 아버지-부재는 지난한 삶의 조건을 상정하고, 밝혀지지 않는 이야기의 원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홀연한 사나이’의 등장 이후 영화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데 일부로 작용한다. 


    승돌이는 이 홀리게 하고(매혹의 기표) 연기 같은(환영을 창출하는 장치로서) 사나이가 시나리오를 쓰는 인물로 현실에 ‘프레임’의 잣대를 씌우면서 이들의 삶을 역할-되기라는 배우의 수행적 과정으로 치환케 하는 것에 맞춰 배우로 거듭나는 한편, 아버지의 부재의 자리를 재확인한다.


     그리고 이는 곧 또 시나리오를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연기의 습득과 배우-되기 그 자체의 과정을 노정하고, 연기라는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에 시차를 줄여가는 과정으로서 ‘연기’를 정의하며 연기가 ‘연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역할의 완성에 대한 도전’ 자체에 방점을 찍어 연기를 삶과 결부되지 않는 잉여의 차원으로 정의되고 있다.


     시나리오라는 환영의 환등기 전의 대본-완성을 리딩의 가상적 구현과 살-붙여나가기의 이야기 창출의 과정에서 동시에 이 메타 차원의 연기에 대한 지점과 연기를 가능케 하는 삶의 정동이라는 내용적 진실을 결합시켜 이 연기가 배우 이전의 삶의 한 존재자로서 온전한 표현임을 이야기한다. 


    곧 삶의 이야기이자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부여함의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연기의 완성’을 보여준다.


     자율적으로 연기가 구성되고, 삶이 그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삶과 연극의 같음을 상정하는 것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낭만이 내는 가상적 효과에 의한 것이며 이는 연극과 괴리된 영화 자체에 대한 낭만이라기보다 ‘연극과 또 다른 꿈의 무대’ 자체를 이 ‘영화’라는 것으로 상정하며 이 유폐된 꿈의 일부를 꾸고, 또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단계를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밟아 나가는 효과를 창출하는 데 단지 ‘영화’라는 가상의 지지체가 놓여 있을 뿐인 것이다.


     역할-되기는 곧 삶의 완전히 다른 평면에 대한 것이 아닌 존재를 역할로 구획 짓고 전유하는 형식에 의거하는데 이는 영화라는 프레임이 삶에 의미를 새삼 부여하고 그 삶을 의미의 지평으로 재정초하며 삶은 단순히 살아지는 것이 아닌 ‘연기’로써 재접근되는 그런 지평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낭만적 꿈꾸기’


    ▲ 연극 <홀연했던 사나이>(오세혁 작, 이윤주 연출) 출연진 컷 [사진 제공=연희단거리패]


     동시에 승돌이의 아빠 찾기가 영화라는 대중매체에 의해 시대상의 일부로 재조정되며 아버지-찾기의 꿈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기’라는 시대상의 반영과 ‘위로 올라가기’라는 꿈꾸기 자체의 변용된 여러 삶의 형태 속 근본적인 지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아가며 당시 영화라는 것이 갖는 꿈, 끊임없이 다시 재생되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투영하고 현실을 탈각한 꿈을 재현해 낸다.


     이 매체의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운명적 꿈꾸기, 시대적인 꿈, 인간의 본원적인 꿈의 세 가지 차원이 ‘연기’라는 그리고 ‘환영’이라는 초현실을 리얼에서 또 다른 리얼로 나아가게 한다.


     실제 이들의 연기는 프레임화되고, 영화의 장면들이 되어 ‘연기’(연기)되고 있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실제 현실이 된 것 대신 꿈(어둠) 속에서 돌아가는 환영으로 제시되며 연극을 지우고 영화 그 자체로 남게 된다.


     이 현실의 잉여로 드러나는 반면 현실을 새롭게 환기하고 가능케 하는 또 다른 매체 자체의 힘은 이 연극의 리얼을 지지(支持)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된다.


    p.s. ‘홀연한 사나이’란 중첩된 기호


     음악의 셋 리스트에서 영화의 신들로 넘어가 연극에 대한 ‘구성적 시선’을 보여주며 작동하던 연극은 이유 없이 홀연했던 자취, 곧 환영 그 자체인 사나이, 동시에 아버지의 부재 그 자체이자 그것을 대리하며 보충하던 아버지, 또한 꿈 그 자체이기도 한 가상의 수행적 효과 자체이고 우리 행동의 예술적 원동력이자 ‘가상-편집자’로서 기능하는 존재로서 이 극을 현란하고 생동감 있게 구성하는 지지체가 되는 ‘홀연했던 사나이’를 도입하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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