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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운성론: 유령과 파수꾼
    Column 2019. 12. 31. 22:48

    (*편집 이후 새로 글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유운성론: 유령과 파수꾼

    이양헌

    1.

    저는 이 인상적인 장면으로부터 다른 것을 떠올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좌파 이론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갱신된 유물론적 시도들 말입니다. 그것은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객체 지향적 존재론 등으로 불리며 유구한 대륙철학의 성과를 부정하고, 언어나 담론, 지식과 같은 주체성의 권역에 머물렸던 대상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물 그 자체, 사물의 자율성과 그것의 능동적 역능을 강조함으로써 주객체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무화시키고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수평적인 행위자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국에 ‘객체들의 민주주의(democracy of objects)'를 ‘사물자들의 동맹(assembly)’을 구현하려는, 더 확장된 인류학을 위한 급진적인 프로젝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오랫동안 공들여 왔던 주체의 가능성과 주체성의 정치는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주체 없는 주체성을 생산하면서 종국에 주체로부터만 산출될 수 있었던 비판의 시학을 퇴색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영화에서 유기물인 여성의 신체는 거울을 통과하지만 무기물인 도끼는 거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주체와 객체가 그 자체로 동일항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 둘이 어떤 접면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지, 그 구체적인 매개의 방식을 제시할 수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허구적인 것이 됩니다. 저는 허구의 생산과 증폭이 혹여 우리가 사유해야할 마지막 토대를, 그 절대적 지평까지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위대한 공화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가장 탁월한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의심하는 일은 정당합니까? 그것은 자유주의와 음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류가 구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소여의 체계입니다. 의심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원칙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편적 윤리를 의심하는 순간, 타 공동체에 그것을 적용할 수 없다는 간악한 상대주의로 손 쉬게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목욕물에 아이까지 쓸려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방법론으로서의 허구(fiction as method)가 새로운 모순을 드러내고 상상력을 창안하면서 미시정치를 위한 새로운 전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차도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기구와 같이 합의된 공론의 체제를 통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2. 

    수비학의 방법을 차용해 보면 남성은 1, 여성은 0으로 표현됩니다. 사이버 패미니스트인새디 플랜트의 “zeros and ones”에서도 같은 구분을 활용하면서 디지틀 세계 내부의 젠더 이슈에 파고듭니다.

    디지털 시그널의 영역에서도 1은 신호의 통과 0은 신호의 차단으로 표시되는데 논리 회로는 여기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전기에서는 엄밀하게 완전한 차단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단계에서는 언제나 전기적 누수가 발생합니다. 인간이 평균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양이라는 이유로 이 누수의 문제는 없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또한 0은 전기적으로는 그라운드 또는 접지라고 표현되며 +1에서 0을 통해 -1로 흐르는 순환, 즉 지구로 되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전기 신호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지구, 지면, 0이 없으면 전기의 작용인 1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머니 지구와 아버지 태양 또는 하늘이라는 상징성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관념이 왜 우리에게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고 우리의 생활 속의 거의 모든 것들에 이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걸까요?

    도식화 해보면 반물질 -1은 여성 0과 합성하여 다시 -1의 상태가 됩니다. 음향적으로는 가산 합성입니다. 그리고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거울상은 반전이 일어나 +1이 되면서 거울의 표면 자체는 0이 됩니다. 여성 또는 반물질이 거울 표면 0을 통과한다는 것은 여성 0 또는 여성과 반물질이 가산 합성된 -1 만 통과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신부가 던지는 도끼는 거울을 통과하지 못하고 깨뜨리게 됩니다. 이런 식의 수치적 사유 방식이 가지는 사변적 이점은 이렇게 함으로써 다가오는 아버지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인 반물질 합성체가 0인 거울 표면을 통과해 1인 아버지와 손을 맞잡음으로서 그것은 다시 0의 상태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미래에서 오는 아버지는 애초에 -1의 성질 또는 0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미래에서 오는 아버지란 존재는 분명 여성성 또는 반물질적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아버지 신부 1이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떻게 보면 0과 -1의 감각을 가진 아버지를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는 실제로 젠더 가속주의에 의해 트랜스를 지향하는 가속주의자들도 있고 그들 대부분이 남성 휴머노이드 상태에서 여성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3.

    이제 아버지라고 호명했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반물질을 통해 현재의 시간으로 끝없이 넘어오려고 했던 이 이계의 존재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이름부터 관습적인 상징체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은 신비와 무질서, 비이성, 알 수 없는 것을 부르는 어머니의 이름이 아닙니까? 어째서 대타자의 이름이며, 규율과 금기를 생산하는 입법자로서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인간적인 기준에 의해 잔인하게 필터링 된 잔여이며, 인식되지 않지만 실재하므로 결국 귀환하게 될 무언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과거인 동시에 미래이기도 한 이 존재는 현재로 진입함으로서 더 확장된 합리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합리성이라니, 이기한 일입니다. 왜 그것은 그 존재와 어울리는 더 음험하고 이질적인 이름을 가지지 않습니까?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저는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더군요. 바로 도끼를 던져 거울을 깨버린 신부입니다. 사실 그는 이 영화적 사건이 발생할 하게 만든 최초의 동자이며 이 거대한 서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과율과 서사의 구조를 보존하는 합리성이야 말로 허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까? 그 자체로 독립변수인 합리성과는 다르게 허구는 언제나 대상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예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 불온하고 사변적인 경향이 사실은 모더니즘에 기생해 왔음을 깨달은 것처럼 말입니다. 의태하고 전유할 실재가 없는 허구를 상상해 봅니다. 그것은 공회전하는 지루한 이야기의 서막을 엽니다.


    4.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대답을 하기 보단 다시 질문을 제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뭘 두려워 하는 겁니까?” 라고 말이죠. 우리에겐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모든 약장수들의 귀감이자 전설인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동시에 파란약을 내밀었던 것처럼 여전히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습니다. 좌와 우, 물질과 반물질, +1 과 -1 등과 같은 대립쌍 사이의 긴장과 투쟁은 지구 인과율이 유지되는 핵심 사안일지도 모릅니다. 이 양자 간의 긴장과 투쟁이 없으면 인간 사회는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제가 비대칭적 합리성에 반발하고 대칭적 합리성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계속 질문하는 것은 이 선택지 자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볼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5.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서사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전해집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이야기 중독자인 왕에게 들려주는 천 일 동안의 에피소드입니다. 천일야화는 오랫동안 공동체가 축적해 온 원형적인 적측서사의 구조를 가자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사의 본질적인 의미와 기능을 함축합니다. 서사는 사건과 행위,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구성체로서, 유동하는 허구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종심급이 될 수도 있습니다.


    16번 째 밤이 되었을 때, 세헤라자데(Scheherazade)가 들려주었던, 현자 두반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한센병을 앓고 있는 왕을 치료해 준 두반은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되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죽기 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는 책을 왕에게 선물합니다. 두반의 목이 잘리자, 왕은 그 책을 탐독하려고 허겁지겁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페이지들이 있을 뿐입니다. 왕은 돌연 쓰려져 죽음을 맞이합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어느 수도원의 이야기입니다. 특정한 책을 읽은 젊은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그의 두 번째 시학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 헤맸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적혀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존재했으나 아무도 본 적 없는 책 말입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페이지와 존재하지 않는 책을 읽으려는 자들은 어쩌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까?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둘은 일종의 상동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사가, 사실은 존재 그 자체이며, 이야기 없이는 존재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서사는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주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필연적인 소여의 체계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그것은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산출됩니다. 집단적 차원에서 서사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인류가 쌓아올린 문해적 모델이 됩니다. 그것은 역사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라는 거대한 대지 위에 빛나는 강줄기가, 허구의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대지에 깊은 침식의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모든 서사는 그 내부로부터 전복의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으므로, 동시에 그 빛나는 강줄기는 대지를 비옥하게 할 것입니다. 서사를 진동하게 하지만 또한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도록, 대지가 폐쇄되지 않고 여전히 열린계로 남도록 작동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전히 합리성을 말하는 당신의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구는 서사를 불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보존하기도 합니다. 서사 없이는 존재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

    이 다가오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앞서 설명한 유추를 통해 비대칭적 세계 즉 과거에 일신교가 몰아낸 다신교적 세계, 작게 분산된 토착민들과 함께 하던 토속적 세계일 것입니다.

    많은 민속학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서구적 침탈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곳들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대칭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문화를 추동하는데 그것은 결코 서구식 발전 모델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재의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그들의 제조 레시피를 알아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고도로 복잡한 약물을 제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들은 그 고도로 복잡한 제조법을, 마찬가지로 그들의 제조한 일종의 환각 약품을 통해 자연이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가지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녀 사냥이 극심하게 진행되던 서구 중세 종교 사회에서도 이 환각 약품과 유사한 것이 존재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연고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피부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바르면 엄청난 쾌락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종교 사회에서 마녀들이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연고를 사용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한가지 가능한 추정은 연고를 사용하던 성 비율이 여성 쪽이 높지 않았나 하는 것이고 그 만큼 당시의 여성들도 엄청난 압박성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 아닐가 싶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비대칭 세계가 지워버린 반전된 세계를 본다는 것은 그들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안되었을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저러한 상황에서 그 체제 유지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점입니다. 비대칭적 체제는 끊임없이 대칭적 요소들을 억압해야 합니다.

    지금의 마약 단속과 이 마녀사냥의 법적 절차는 매우 유사합니다. 한 명의 마녀가 잡혀오면 고문을 통해 두 명의 마녀 이름을 말하게 합니다. 그 두 명이 또 총 네 명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계속 2배수의 증가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광기에 가까운 마녀 사냥이 멈추게 되는 시점은 우습게도 잡혀온 마녀들이 남성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하고 결국 귀족과 성직자의 이름까지 말하기 시작하자 멈추게 됩니다.

    중세 종교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는 것, 이단적인 것이 다른 원주민 사회에서는 자연이 지식을 전파해주는 물질로 이해합니다. 여기에 지금 우리의 윤리적 가치 판단을 지워버리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그들 대칭적 원주민의 삶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거나 미개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 만큼 우리는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비대칭적 세계인 중세 사회를 살펴볼 때, 행복에 대한 부정성이 더 명백하게 예상되지는 않나요?

    과거에 몰아낸 소위 이단적인 지식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 사회 모델이 한계에 접어든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재조명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아버지는 아마도 대칭적 합리성을 추동하는 무엇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칭적 합리성의 세계로 지금 이 세계가 변화 되었을 때, 허구가 공회전하는 지루함이 될지 아니면 또다른 허구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또 다른 허구의 가능성에 조금 더 기대를 품는 이유는 이미 그러한 징후를 바라보고 허구를 뛰어넘는 허구를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비관적이던 낙관적이든 선택을 할 기회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넘어 검은약과 하얀약으로 선택지를 넓히면서 말이죠.


    7.

    이제 마지막으로 픽션에 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심연에 잠긴 그 불가해한 대상에 대해 말입니다. 거대한 천칭을 한번 상상해보시죠. 천칭의 한 편은 통일된 이름이 지워진 자리입니다. 그곳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수가 웅얼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질료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우화와 포개지기도 하고,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사이에서, 그리고 네러티브와 다큐멘터리의 접면 어딘가에서 진동하며 모순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상상력을 위한 특정적인 미디엄임으로, 신화와 결합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편에는 계약과 질서를 지킨 자들을 위한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은 이성적 토대 위에서 공정함을 위한 율법을 세우고, 가장 첨예한 문제인 영광을 재분배하는 자리입니다. 이곳의 질서는 매우 엄격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스크린이 되어 그 반대편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무엇이 픽션입니까? 천칭의 양 편에서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러나 픽션은 차라리 대립적 극단을 가능하게 하는 천칭을 부르는 전체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나와 당신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전도된 형이상학이자 세속화된 신학으로서, 픽션은 허구와 실재를 지탱하는 주권적 신념 말입니다. 픽션은 양 극단을 조율하는 거대한 천칭의 이름입니다.


    8.

    거칠게 정리를 하자면 결국 지금의 우리의 현실을 아우르는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은 의문을 품지 않게 만듭니다.

    나선 운동은 자연계에 실재하고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에너지 운동입니다. 기술 발전의 모체는 모조리 이 운동의 흐름을 부분적으로 취합하고 그 힘을 필요한 만큼 증폭하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매커니즘과 동일합니다. 동시에 기술매체의 발전과 복잡성이 가져오는 효과는 이 본질적인 힘에 대한 망각입니다. 그 힘은 내 눈앞의 현실을 가능케 해주면서 동시에 그 현실을 지탱해주는 힘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고 있는지를 생각치 못하게 합니다. 0과 1로 직조된 거대한 매트릭스 사이에 어떤 힘이 누수를 일으키고 벡터들을 변화 시키고 있는지를 일상적으로 알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오로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지탱하는 영역이고 그것이 안전한 것이라 말합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왕과 귀족 그리고 종교가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일종의 의식 전환 전술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의식 전환 전술이 다른 형태로 부활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트럼프 대선 당시 극우 트럼프 지지자들이 개구리 페페를 디지털 밈으로 활용한 것은 그들이 집중하는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 발생했던 수치들의 기현상이 이집트의 개구리 신 Kek을 지칭하는 수와 동일했다는 점에서 시작됩니다. 이상하고 어떤 작용을 할 것이라 믿기 힘든 이런 기현상은 당연히 트럼프가 당선될 일이 없다고 전반적으로 파악되는 추세를 뒤집어 버릴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 힘이 개구리 신 Kek과 디지털 밈의 오컬트적 작용에서 왔다고 믿거나 안믿거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희망을 담지하는 대상물이 작동 하면서 집단적 심리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반전된 믿음이 발생하고 그것이 집단 심리 활동을 증가시키면, 마치 마법처럼 그것이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돌출되게 됩니다.

    신부가 막아서는 그것은 바로 그들이 몰아내어 1과 0로 정립 시킨 매트릭스이고 그 매트릭스 내부의 누수 작용이 누적되어 어떤 반전된 효과로 발산됩니다. 신부의 믿음을 지탱하는 힘이 약화되자 빠르게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것은 차단되거나 압축되거나 또는 필터링된 것들의 복귀일 것입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모든 믿음에 대한 전방위적인 질문들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그 질문들은 합리성이라는 믿음에 의해 제거되고 있습니다. 제가 허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현실이 아닌 허구 자체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무엇에 대해 추상과 상상 능력을 동원하기를 요구하는 어떤 장치 같습니다.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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