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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원화론: 공유지와 천일야화
    Column 2019. 12. 31. 22:49

    (*편집 이후 새로 글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윤원화론


    이양헌


    1.


    이제 반물질 실린더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각 영역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조사팀이 구성됩니다. 이들은 모두 해당 분야의 아카데미즘이 인증한 전문가들입니다. 당신은 전문가주의가 경제적 효율에 기반하고 차별은 생산하는, 그 자체로 이윤 추구를 위한 윤활유라고 말합니다. 고대 외계인 연구자들은 악마가 신으로부터 문명의 씨앗을 빼앗아 인간에게 전해준 혁명적 존재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지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폐쇄회로로부터 복수화를 꿈꾸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1971년 칠레에서 실제로 가동되었던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 말입니다. 그들은 각 공장과 산업단위에서 민주적이고 분권화된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사회주의 인터넷을 구축해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2년 뒤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테타에 의해 이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영원히 파괴됩니다. 원천 기술, 물리적 인프라, 과학적 지식과 같은 유효 자원들이 시장과 국가의 통치성 안으로 모두 예속되어 있습니다. 하이데거와 같은 전통적인 기술철학자들은 발전하는 첨단 기술에 깊은 우려를 나타냅니다. 반면, 가속주의를 재선언하면서 기술 안에 내재된 해방적 가능성을 다시 주창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악마와 같은 혁명가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할까요? 이런 식의 허구적 네러티브야말로 차리리 지배체계와 공모하는 가장 부정적인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2.


    환원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대부분의 생각들은 오히려 과학에서의 환원주의적 접근으로부터 힌트를 얻고 있습니다.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개별적 분해 과정을 통해 분해된 것들을 재조합하고 구성하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그 분해된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환원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환원주의적 태도는 어느 면에서 강력한 방해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 음향 합성에서는 웨이브 폼이라는 아주 작은 단위의 파형 형태를 만들어서 그것을 빠르게 반복 시킴으로서 하나의 주파수로 우리 귀에 들리게 만듭니다. 결국 그 소리는 에너지의 흐름 이전에 패턴화 되어 초고속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하나의 사인파 주파수가 변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사인파 형태의 패턴이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고 그것을 속도 변화에 따라 반복 배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결국 웨이브 폼의 형태를 사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실험 과학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라고 결정 내려 버리는 것이 앞서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또한 과학에서는 이처럼 분해된 것들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다만, 과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을 시에는 그것은 그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나 이미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 압축과 필터링으로 정리된 상태만 받아들여 바로 활용 가능한 것으로만 파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고려해 볼 때, 다시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환원주의적 사고만이 절대적이라고 할때, 이 과정의 역학적이고 구조적인 중추는 일종의 군산 복합체로서의 인간 문명이고 자본적 인간 사회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의 과정보다 결과를 맹신하게 된 시점은 비대칭적 인식론과 과학이 자본과 밀월 관계에 빠지면서 시작됩니다. 즉 과학의 발전이 윤택한 삶, 건강하고 편한 삶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인식이 너무나 강하게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보면 유토피아적 상이라는 것이 레트로 문화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고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상이 더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징후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굳건하게 믿었던 것들 그리고 유지되게 만드는 가해지는 힘의 한계가 드러나는 징후 말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질문할 수 있게 되면, 말씀하신 유효한 믿음이 실제로는 더 질문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게 될 겁니다.




    3.


    연구를 위해 오래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전문가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꿈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미래에서 과거로 신호를 보낸다고 말하며 무언가를 경고하는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무엇보다 이들이 미래로부터 신호를 보낸다는 말 자체가 저는 매우 의아하게 들립니다. 시간을 비가역적으로 거스르거나 방향 전체를 부정하는 비선형적인 시간-모델을 상정하면서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논자들이 전통적인 시간관에 대해 마치 외상을 겪은 히스테리를 환자처럼 굴더군요. 홍차에 적힌 마들렌을 베어물면 기억의 그물이 저 깊은 무의식의 바다로부터 길어 올려져 우리를 과거의 순간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우리의 각지, 재인, 재생이 아니라 물질 자체에 기입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주관적인 순간이야말로 인과성이 무화된 카이로스의 시간일 것입니다. 아이온의 시간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들뢰즈가 연대기적 시간개념에 대항하기 위해 영원한 시간을 지칭하면서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이 공시적인 시간 개념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현재가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시간의 얽힘이자 유동하는 다중-시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오직 크로노스의 시간을 전제함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베르그송에 대해 한번 해보겠습니다. 들뢰즈가 20대 중반까지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는 『물질과 기억』의 저자 말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집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산책을 하던 중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며 우리가 오랫동안 시간의 본성을 망각하고 그것을 공간으로 환원해 왔음을 깨닫습니다. 시간은 가분할 수 없는 ‘지속’이자 ‘운동’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제논은 시간을 끝없이 분할하려다 패러독스에 빠졌다고 호기롭게 지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사실 제논의 역설은 시간의 분할가능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운동의 각 지점들을 세는 단위, 그러니까 기수와 서수를 혼동함으로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시간을 아무리 벡터로 사유하여도 제논의 역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벤야민은 바울의 ‘지금시간(jeztzeit)’을 빌려와 도래하는 ‘메시아의 시간’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선형적인 진보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혁명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고밀도로 수축되는 특별한 순간으로 우리에게 경험된다고 합니다. 고밀도로 수축된 시간이라니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단위 노동시간 당 사용가치의 총량을 증대시켜 온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인터스텔라나 컨텍트 같은 영화를 말하더군요. 뉴턴의 세계관은 이미 오래 전에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양자역학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끈 이론이나 다중우주에 관해 저에게 설명하려고 하더군요. 저는 최근에 테그마크(Max Tegmark)라는 수리물리학자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물질,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에너지이자 인포메이션(information)이 되어버린 바로 그 실체, 근세철학적 의미로 Substance는 사실 무한 수의 세계를 가정하는 다중 우주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 무한히 존재하는 유니버셜을 포괄하는 지배적인 수학적 원리, 전체를 관장하는 결정론적 인과율만이 실재한다고 하더군요. 어떻습니까? 다시 법칙 지배적 세계관과 라플라스식 모델을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4.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조금 언급해 보고 싶습니다. 사이버신과 같은 당시의 제 3세계 들의 자생적 발전 아이디어와 시도들의 대부분은 서구 열강들의 농간에 의해 무화 되어버린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경제 음모론 중에는 경제 암살자(economic hitman)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정부에 봉사하며 제 3세계 국가들의 자력 발전이 진행될 때, 그 국가의 수장에게 접근해 경제적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제3세계에 대한 미화된 착취라는 불공정 거래이고 제 3세계 국가의 현명한 지도자가 그것을 알아채고 거부를 하게 되면 경제 암살자가 철수함과 동시에 소위 쟈칼이라고 불리우는 암살 그룹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활동이란 바로 내부 쿠데타 또는 뜻밖의 사고로 위장됩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상실한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성향의 정치가를 지도자로 세우게 됩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경제 암살자 출신이고 쟈칼의 운용을 잘 알고 있던터라 최초로 쟈칼의 작전이 실패한 경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이후에 대량 살상 무기 루머가 퍼지고 서구열강이 전쟁을 시작하죠. 이렇게 한세대 정도만 집단 심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할 수 있으면 그 이후는 최소 3세대까지 걸쳐서 우리 심리의 말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영국와 독일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 집단 심리 조작을 위한 심리전의 방법으로 오컬트 마법까지 연구하고 동원한 역사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일본 식민지 시절과 한국전쟁 직후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이상한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뚜렷한 예로 박정희의 정치 신화가 현재의 태극기 부대로 연결되는 집단 심리을 생각해 봅시다. 이제 이전의 집단 심리 또는 정치 신화의 약화를 체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전체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이때야말로 집단 심리의 궤도 변화를 추구하는 일들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악마와 같은 활동가의 등장을 기다리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모든 믿음에 의구심을 품고 반전된 가능성을 생각하는 악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누군가 괴력 난신같은 존재가 등장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리더쉽에 대한 기대를 마치 DNA에 입력이라도 되어 있다는 듯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악마라는 네거티브의 상이 비대칭인 서구적 합리주의가 과학 및 자본과 함께 공진하면서 제거해야 했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즉 본질이 악한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가해지는 힘의 변화를 추동하고 동시에 스스로 균형을 잡는 어떤 다른 힘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인간 운영 시스템 회로 내부에 마치 저것은 악이고 나쁜 것이다라는 식의 전반적인 부정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문제 자체에 대해서 폭넓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5.


    영화에 등장하는 반물질은 인간 여성의 몸에 들어가 외부와 내부가 뒤틀린 반전된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의식의 통제권이 반물질에게 완전히 넘어가자 그녀는 거울을 찾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반전된 상을 보여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가 현세로 넘어 오려는 순간, 여주인공은 자신을 희생해 합성된 존재를 끌어안고 거울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신부가 도끼를 던져 거울을 깨버립니다. 여성의 신체는 겨울을 통과할 수 있지만 도끼는 통과시키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6. 


    차라리 시간에 대한 인식과 작용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편이 좋겠습니다.


    어떤 광물이 있는데 그 광물이 미량의 유독성 가스를 내뿜는다고 합시다. 인간종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당시의 인간은 그 광물의 유독성을 몰랐습니다.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종교 중심적 중세 사회로 접어든 어떤 시점에서 그 광물을 발견한 한 농부가 그것을 신기하게 여겨 집안에 가져다 두었고 가족 구성원들이 유독성 가스에 노출됩니다.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특정 시간이 흐르자 체내에 누적된 효과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가족 구성원들 모두 흉칙하게 사망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조사가 시작되고 그 농부가 처음 보는 신기한 광물을 발견해 집에 가져다 놓았다고 말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전해집니다. 결국 어떤 원인과 이유도 정확히 밝히지 못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변수로 존재하게 되는 광물을 의심하게 되고 당시와 같은 종교 사회에서는 알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은 모두 악마의 계략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따라서 그 광물은 당시에 가능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봉인되어 깊은 땅속에 묻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봉인은 가스의 유출을 막지 못하고 깊은 땅 속에서 계속 유독성 가스를 내뿜게 됩니다. 그것은 땅 속에서 다른 자연적 요인들과 화학 작용을 하게 되고 우리가 현재로 인식하는 시점은 그 유독성 성분이 자연계 내부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 이후입니다. 현재의 인간은 그것을 당연한 자연의 일부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효과가 특이점에 도달하는 가까운 미래에 인간의 신체에는 원인을 찾기가 힘든 새로운 형태의 암세포가 갑자기 급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깊은 땅 속에서 끌어올려 자원으로 사용한 모든 것들 사이에 이 유독성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으니까요. 결국 미래에 전 인류는 멸종의 길을 걷게 되고 인류세는 다시 수 만년의 다가오는 시간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 인류 이후의 지성체가 발현하게 되고 문명을 일구게 되며 또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땅을 일구던 미래의 지성적 존재가 광물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 안의 현재 시간의 관점에서는 갑작스러운 전지구적 암세포의 급증이라는 징후가 미래로부터 현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먼 과거에서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인과율이 작동하고 이 유해한 흐름의 가장 재수 없는 순간이 바로 현재인 것입니다. 이 시간의 순환 사이에 인간의 현재란 말 그대로 인간 중심의 상대적인 개념이 되고 광물, 유독 가스와 그로 인한 다른 자연계의 변화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모두 독립적 객체라면 그것들의 감각은 인간의 시간 감각과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감각으로 그들에게 인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율 또한 분명치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백낙진 교수가 1980년대 이후, 정신적인 분열을 드러내던 시점의 문건들을 살펴보면, 이 인과율의 범위는 인간이 지구인으로서 사고 가능한 영역 바깥의 우주적 주기 속에서는 지구 내부의 인과율적 작동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지만 우주를 떠도는 성분들을 조합하고필터링 과정을 거쳐 지구 내부는 안정화 시킨 것을 생각하면 상황이 달라짐을 이야기합니다. 즉 지구 생명은 지구 시스템이 추진하는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 인과율을 벗어나는 순간 그 존재는 더 이상 지구적 존재가 아닙니다.


    지구가 없으면 우리가 지구인이라고 인식할 수 없고 또한 우주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질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에겐 알 수 없는 우연적 사건의 총체인 카오스입니다. 


    우주 시간의 아주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한 지구 시간 그 자체는 이 우주의 카오스 속에서 필터링 과정을 거쳐 발생한 일시적으로 안정화된 하나의 구조적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우주라는 카오스의 세계를 지구 자체가 필터링하여 정리해버린 시스템의 세계이고, 인과율은 거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따라서 지구 위의 모든 것은 지구적 인과율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 지구 인과율의 작동 영역은 우리들에겐 DNA와 세포 분열의 단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질문 자체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만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식되지 않으면 어떤 판단이 불가능하니까요. 우리는 “그게 말이 되냐?” 라고 질문할 수 있을 때 조차도 우주와 인간, 지구와 인간, 세계와 인간, 사회와 인간 사이에서는 말이 안되는 여러 상황을 경험합니다. 인간 인식 앞에 선명한 확률로 나타나는 것은 정보 엔트로피에 따르면 정보량이 적은 것입니다. 하지만 열역학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의 확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인간은 생물학적 능력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과학기술이라는 방법으로 인간 외부적 힘을 끌어옵니다. 우리에게 진보적 문명의 세계상은 이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앞서 얘기한 이야기는 이젠 사실 별로 허구적이지도 않습니다. 충분히 저러한 허구적 가설이 현실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현재의 우리가 문명의 토대를 이룬 자연 자원을 땅 속 깊은 곳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았다면, 어쩌면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다른 방향과 속도로 전개된 문명 속에 있다면 앞서 말한 이야기는 정말로 더 허구적인 강렬도를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 이야기가 지금과는 다르게 발달한 문명 세계에서 갑자기 등장한다면 그 세계의 누군가가 흥미를 느끼고 땅을 파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유독성 물질을 건드리고 그 세계조차도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허구적 이야기는 그 다른 문명 세계에서도 현실의 문제로 변환되게 됩니다.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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