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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운성론
    Column 2020. 9. 5. 23:26

    *편집자 주: 다음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된 원고가 아님을 명시합니다.


    유운성론

    이양헌


    그는 비평의 장소를 계속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시네필이나 영화평론가와는 다른 점은 그가 단순히 영화의 시퀀스나 도상, 이미지를 분석하는 차원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라리 그는 이론의 의미와 가능성을 탐문하는 비평가에 가깝다. 다시 묻자. 그는 다른 영화평론가와 어떻게 다른가.


    그의 글 중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는 역시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다. 2017년「문학과사회」에 실린 이 글은 그가 이론의 위상과 영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커모드의 이론 안에서 픽션은 매우 흥미로운 위상을 가진다. 이는 현실과 관계 맺는 형식 없는 형식이자 가상적 구조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실제는 어떻게 포착되는가. 특히, 영화 속 등장인물은 그 자체로 픽션이지만 그가 현실세계에서의 자신의 맺는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홍상수나 페드로 코스타, 아피찻뽕 위라세타쿤만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형상적 픽션으로 분하고 있다. 이는 리얼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자 그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열대병」에서 그가 묘사하는 형상적 픽션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하나의 형상–픽션임을 막 드러내려 하는 제니이라의 미미한 몸짓의 강렬한 힘은 그런 확인 작업을 통해서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제니이라의 얼 굴이 잠깐 동안 묘한 당혹감에 휩싸이는 것을 본다. 그녀가 몸을 떨었는가? 아마 그랬을지도. 그렇다면 몸을 떤 그녀는 누구였던가? 아니, 누구‘로서’ 몸을 떨었던가?”


    그것은 반쯤만 열려 있는 형식으로, 그러므로 허구인 동시에 실제이기도 한 어떤 것이다.


    이 글로 유운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글이 그의 비평적 방법론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다양한 글에서 픽션은 매우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픽션에 대한 물음들>, <천일야화, 혹은 픽션 없는 세계에 저항하기>와 같은 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그에게 영화와 픽션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마도 영화의 존재론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과 닮은 것이지만 현실은 아닌 것, 스크린에 세계이지만 분명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 그것은 영화를 규정하는 그의 가장 중요한 기반일 것이다.


    또 다른 유명한 글 중 하나인 <영화비평의 ‘장소’에 관하여>를 보자. 여기서 그는 비평의 문제를 언급하며 “비평을 위한 고착된 장소란 (과거에는 존재했을지라도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아가 비평을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비평은 무엇이다 혹은 어디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해 끝없는 교통의 장소에 가깝다. 비평의 관한 그의 입장은 아마도 2000년대 아직은 시네필이라는 강력한 지지자들이 존재했던 영화계의 어느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가 <밀수꾼의 노래 - 「영화 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이후,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를 작성했을 때, 그것은 10년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비평의 장소를 탐색하고 있다. 당대의 흐름 안에서 비평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영화의 정의와 가능성을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픽션이라는 첫 번째 화두와 함께 제시하고 있는 두 번째 개념이다.


    그는 비평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특히, 단순히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평의 자율성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부재의 구조화와 분리의 전략: 〈두 개의 문〉은 그가 정치적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데, 〈두 개의 문〉에서 단순히 용산참사를 다루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영상이라는 특정한 형식 안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점, 나아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다시금 픽션으로 환유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두 개의 문〉이 어떤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을 다루는 특정한 형식을 발명해냈기 때문에 가깝다. 이는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관찰자 영화나 ‘본 것을 보여준다’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당대를 포착하고 있는 가장 동시대적인 다큐멘터리를 그는 선언해낸다.


    또 다른 그의 비평적 특징은 영화사를 하나의 전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바쟁이나 고다르,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들에 대해 쓴 글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외에도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들을 다루는 그의 비평은 일편 서구적인 시선으로 생각될 위험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영화의 역사가 지역적인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 다시 말해 서구의 역사와 등치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가 단순히 인종이나 성별과 같은 구체적인 정체성보다는 영화를 추상적인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가 영화사를 탐구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는 그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만든 여러 스크리닝들, 예를 들어 마그렙 특별전, 소마이 신지 특별전, 마르틴 레트만 특별전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든 작품들을 소개해 온 전력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보편사로서의 영화의 역사를 세우고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단순히 국적이나 지역에 속박되지 않는다고 보는 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역사와 운동의 역사 사이에서>라는 책 리뷰에서 그는 『영화운동의 역사』를 읽으며 에이젠슈타인에서 지가 베르토프, 푸도프킨 같은 영화적 실천이 여기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영화사 다시 쓰기’는 미학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아야 함을, 그래서 이 책의 의미가 거기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시네마라는 긴 시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며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판본들의 순차적으로 쌓여있는 지층을 그는 영화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가 2002년 <거짓 기억, 그리고 망각에 대항하기-영화의 역사 혹은 영화와 역사에 관한 다섯권의 책>이라는 5권의 책에 관한 글에서도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그를 설명하는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결국 유령일 것이다. 이는 매우 다층의 의미를 함축하는 철학적, 비평적 용어로 영화비평에서 그가 선진적으로 썼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감각할 수는 없는 것, 특정한 힘으로서 언제나 기능하지만 볼 수 없는 어떤 것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유명한 한 구절인 “시간은 그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유령의 시간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의 텍스트 <떠도는 영화, 혹은 이름 없는 것의 이름 부르기>, <유령과 파수꾼들>에 잘 드러나 있다. 


    <떠도는 영화, 혹은 이름 없는 것의 이름 부르기>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비선형적 시간의 중심판본으로 이후 글의 방향을 짐작케 한다. <떠돌이 개>의 세 명의 배우로부터 일종의 형상적 픽션을 발견한 그는 ‘속성 없는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역설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듯하다. 장소나 이름이 없는 것들이 영화 안에 잠재되어 있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순간적이고 특정한 몸짓에서 잠시나마 드러나는 형상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이것은 영화 안에서, 영화라는 특정성으로부터만 산출되는 잠재성인가. 다시, 그것은 시간 기반 예술(Time-based Media)이라면, 인물과 서사가 공존하는 장소라면 의례 만들어지는 유령적 가능성은 아닌가. 그러나 유운성은 영화가 현실과 맺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카메라 앞과 뒤에서 구현되는 어떤 믿음으로부터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비평의 장소를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동일하게 영화의 특정성을 사유하는 것과 동일하게 포개진다.


    이제 짚어야 하는 마지막 이야기는 그가 포스트 시네마 혹은 광의의 의미에서 적용하는 오디오-비주얼 일반에 대해서다. 아르코미디어 비평총서의 일환으로 쓰인 <파편들 사이에서 말하기>은 그가 의미를 포섭할 수 없는 이미지와 그에 호응하지 않은 나레이션(혹은 텍스트)으로 구성된 영상에 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호하게 이러한 영상들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야 하는지 난감하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가장 특권적인 영상의 한 갈래인 영화의 편에서 그것을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미술계나 여타 장르에서 생산되는 작품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모호성의 가지는 특유의 비정치성을, 나아가 분산적인 의미생산의 방식들이 유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러한 견해를 확증해주는 것은 그가 2018년 창동레시던시에 열렸던 <비평전야>의 패널로 참석해 주장한 바와 상통한다. 아마도 김희천이라는 가장 당대적이고도 문제적인 작가의 작품은 패널 사이에서 그 의견이 상이하게 주장되었다. 여기서 유운성은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김희천의 작품을 분석하며 그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한 적이 있다. 이런 관점 안에서 무빙-이미지로 통칭되는 다종의 이미지들은 그에게 의미의 과잉 혹은 결여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러한 영상의 중요한 경향을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것. 다시 말해, 이러한 일련의 창작 경향에 어떤 원인을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표면으로만 드러나는 징후이자 증상으로, 그 이면의 역학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젊은 영상생산자들은 특정한 경향 안에서 파편적인 작품들을 생산해내는가? 아르코미술관의《미디어펑크: 믿음 소망 사랑》(2019) 일환으로 출판된 그의 글은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흥미로운 유비를 통해 영화적인 것과 미술적인 것의 차이를 대비해낸다. 예를 들어, 전시 참여작이기도 한 파트타임스위트의 작품은 얼마나 파편적인가. 그런데 베아트리스 깁슨과 존 토레스의 작품들은 왜 단순히 파편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 규정하기 힘든 사태 속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형상,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방향을 우리는 가끔 찾아내기도 하지 않는가.


    유운성의 글에 대한 인상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가 사용하는 ‘형상적 픽션’이나 ‘영화의 역사’, ‘유령’ 같은 개념을 매우 높은 추상도 안에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영화는 오래전에 죽지 않았던가? 다시, 그것은 20세기의 유산으로 어떤 고고학적 유물은 아닌가. 위대한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이미 영화가 아닌 것이 영화로 호명되거나 위대하지 않은 것이 그 수식을 가져갈 수도 있으므로.


    다시, 그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극영화 아닌 다큐멘터리에서도 형상 픽션의 가능성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상–픽션의 영화는 극영화적 체계를 배양액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세계의 바깥에서 본다 해도 어떤 태도도 연기라는 공통의 속성으로 수렴되지 않고 이중화된다. 또한 그 태도가 연기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불확정성의 상태에 있는 한 특이점이 붕괴될 뿐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건으로서의 형상–픽션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은 현실에서만 가능한 어떤 픽션일 것이고 우리가 이제부터 포착해야 하는 실재의 다른 원리다. 그의 비평적 실천들이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진동하며 어떤 유령들을 다시 감각하게 하는지 더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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