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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혜진론
    Column 2020. 9. 7. 04:38

    *편집자 주: 다음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된 원고가 아님을 명시합니다.


    방혜진론

     

    이양헌


    영상과 퍼포먼스(혹은 공연)를 지속적으로 천착해 온 방혜진에게 비평은 어떤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에게 비평은 단순히 하나의 대상을 위해 수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정한 분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에서 점에서 그렇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비평의 어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가.

     

    그의 초기 비평은 영화와 관련된 글이 많다. 2003년에 쓴 <선악의 피안: 드레이어 영화의 이단자들>에서 이중의 범주를 포함하는 마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집안의 주인>이나 <잔다르크의 열절>에서 비난받는 자로서의 여성은 사회 안에 잠재된 어떤 힘을 표면화한다. 여성과 남성, 혹은 선과 악, 빛과 어둠 그 긴장 속에서 그는 어떤 진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흥미롭다. 이는 이후 그의 글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분할된 구조 혹은 대칭, 이중성의 방법론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그가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젊은 비평가상에서 수상한 <프레임을 통한 통합과 분리의 세 가지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만, 모스크바, 사이코, 리체르카레의 작품은 분석하며 그가 제시하는 키워드는 프레임의 안과 밖, 공연과 영상 그리고 무대와 스크린의 관계다. 구체적으로 노만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공연 예술과 스크린의 결합을 보여주는 호기는 노만이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지향하는 영화 개념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다. 해당 작품이 보여주는 현재와 과거는, 2차원과 3차원이라는 경계의 붕괴를 그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인 모스크바, 사이코에서는 어떤 분열의 서사가, 무대의 분열이라는 개념으로 이중성의 고찰이 잘 드러난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의 소재를 중심으로 두 개의 방은 그 자체로 서로 다른 프레임의 교차적인 진동을 드러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체르카레의 반복과 병렬을 통해 가장 작은 무대가 이중의 운동 속에서 얼마나 광활해질 수 있는지 증명해낸다.

     

    그의 비평에 대한 하나의 고찰로서, 이중성에 대한 사유는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이원성에 기반을 두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영원히 종합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변증적인 차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찰츠브르크의 페스티벌에 관한 다른 글에서 전통과 혁신에 대해 말하는 그의 발언 역시 흥미롭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 정명훈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로부터 그는 찰츠브르크의 방대한 스펙트럼에 바로크와 모더니티가 놓여있다고 말한다. 대립적가치는 그러나, 시대의 흐름 안에서 차라리 시대착오이기까지 하며, 그러는 동시에 회고적 찬양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중에 속한 가능성들의 어떤 장면일 것이다.

     

    방혜진의 비평을 설명하는 또 다른 접근은 무용을 정의하는 방식에 있다. 정연두의 작품을 논하는 <() 무용을 향한 어떤 시도>에서 무용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춤의 가능성 혹은 조건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논하며 영화와 대비되는 무용의 속성을 정의하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용은 어떨까. 통합적 서사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며 지속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있는 무용은 현현과 동시에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고마는 불꽃놀이의 섬광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무용과 영화, 반무용과 반영화를 논하는 방식 안에서 부정을 통해 스스로의 자리를 가늠하는 무용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무용에게 영화적인 것을 적용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용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방혜진이 시도하는 이런 방식은 단순히 새로운 술어로의 정의가 아니라 위상학적인 자리에 선 대상을 상상한다는 점에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가진다.

     

    또 다른 무용을 다루는 글인 <봄의 제전(2013): 괄호치기 전략, 혹은 반복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은 그가 언어적인 유희를 통해 비평의 방법론을 지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가령, 제목에 담긴 연도에 쳐진 괄호가 우리의 통념에 대한 괄호라는 흥미로운 포착. 이로부터 이민경과 조아오도스 산토스 마틴스의 <봄의 제전(2013)> 이 유비 안에서 동시대적인 도전을 성취하는 각각의 춤으로 나아간다. 먼저, 100주년을 맞은 <봄의 제전>을 일종의 아카이브로 삼아 다양한 괄호치기를 수행하는 이 작품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다고 그는 말한다. 근대 이후의 춤이 글쓰기의 어떤 동어반복이라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 또 다른 괄호는 끝없이 반복되는 N번째로서의 괄호. 또 다른 괄호는 일반적인 공연에서 생략되는 지점을 다시 끌어오는 것으로서의 괄호.

     

    위상학적 방식과 일종의 기호의 전유를 통해 무용을 정의하는 이러한 시도는 일종의 무대와 같이 하나의 장소이거나 가장 작은 곳에서 더 광활한 곳을 지시해내는 그의 방법론과 상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용에 대한 서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특정한 순간 혹은 장면에 의해 포착되고 다시 해체되고 있다는 것. 마치 공연예술이 그렇듯 그의 비평도 끝없는 운동과 진동 안에서 정의와 해체를 반복하는 듯하다.

     

    방혜진의 비평이 단순히 영화나 공연예술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넓은 의미의 오디오 비주얼 혹은 확장된 영상을 다루는 그의 시도는 두 개의 글을 통해 잘 드러난다. 김운용의 개인전 서문인 <자동재생: 소프트 카피 드라마>에서 그는 이미지가 아니라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자의 웃음소리 같은 것. 이 광기를 불러들이는 소리로부터 그는 사운드와 이미지, 목소리와 신체를 함께 하려는 시도가 바로 영화의 역사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리고 들뢰즈가 말했다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시각과 청각의 분리가 김운용의 작품에 새롭게 갱신되었다고 끝을 맺는다.

    이는 여전히 영화적인 레퍼런스를 통해 영상을 분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김운용이 이미 미술과 영화 사이에서 자리 잡고 있는 창작자임을 의식한 것일까. 또 다른 텍스트인 <전소정 <감각운동 형상화>: 신체기관 행동도감, 혹은 기관의 영혼학>을 보자.

     

    여기서 <감각운동 형상화>는 부재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전소정의 다양한 작업들을 참조하며, 구체적으로는 <열두개의 방>(2014)<불의 시>(2015), <마지막 기쁨>(2012)과 같은 삶의 장인들을 예술에 관한 작품으로부터 그는 신체의 형상을 포착하는 작품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영상 안에서 신체의 어떤 것을 운동하게 하면서 영상으로부터만 가능한 연극성과 서사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 영상 내 신체기관들의 형태와 감각과 운동에 대한 조명을 통해, 영상 작품 감상에 있어 관객의 인식과 지각과 운동의 관계를 성찰하려는 것. 가령, 단속적으로 명멸하는 영상들, 전진하다 뒤엉키고 집요하게 반복되다가 미련없이 사라져 버리는 이 움직임들은, 전시장 내 영상에 합당한, 혹은 그 합당함을 뒤흔들, 운동-감각을 조율해나갈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 영상에서 방혜진은 영상이 가질 수 있는 수행적인 실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동시에 영상으로만 가능한 어떤 것으로부터.

     

    다시, 그는 미술 내부에서 이 영상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 그는 다원예술이라는 넓은 지평 아래 단순히 미술사나 조형적 요소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차라리 어떤 다른 방식을 통해. 이를테면 인접 장르로서의 영화와 공연예술을 통해 중첩된 장 안에서 이를 어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이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특수하지만 작은 영역, 그러나 더 큰 의미로 나아가는 역설적 공간의 비평.

     

    이제 방혜진의 비평을 설명하는 마지막 개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비평의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는 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유령의 목소리, 목소리의 유령>에서 두 단으로 구성된 텍스트는 무엇이 되는가. 게다가 오른편의 글은 유령이라는 호명에 걸맞게 조금은 흐리게 보인다. 무엇부터 읽어야 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없다. 유령의 목소리 파트에서 아마도 목소리를 차라리 유물론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유령과 목소리의 관계를 사유하는 이 글에서 그는 영화의 역사 안에서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3),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영화사()> 등에 등장하는 목소리의 위상과 기능에 관해 말한다. 녹음기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초월적인 자, 케시 셀던의 더빙 목소리, 다양한 층위의 목소리들영화는 어떤 목소리를 담고 어떤 목소리를 담을 수 없는가.

     

    목소리의 유령성 파트에서 발원지 없는 목소리는 그 자체로 유령적일 것이다. 그는 비존재로 존재하는 유령의 모순이 영화의 역설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영원히 귀신들려있다는 것. 목소리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다시 목소리는 시체와 신체와 기관 어딘가에서 붙어있는 것이지만 복화술은 그 결합이 허구임을 드러내기도 하고 복수의 대사에서 형태로 드러난다. 이제 문제는 이런 다종의 형태로 발화되는 목소리를 듣는 예민한 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흥미로운 방식의 형식실험은 또 다른 글인 <말할 수 없는 예언가, 노래할 수 없는 성악가, 무대화할 수 없는 극장 <무세와 아론> 쇤베르크 스트라우브>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일종의 연극의 한 장면처럼 혹은 한 편의 희곡처럼 각 막을 구성하는 장면으로서의 텍스트는 비평이기보다 한 편의 공연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다루지 않은 그의 또 다른 비평적 지평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유비들/개념들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오페라와 같은 또 다른 공연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두 글에서 방혜진의 비평의 다양한 장면들이 모두 호출되고 있다. 먼저, 대칭성 혹은 이중성. 유령과 목소리는 그 자체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그것은 대립이자 양립이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흥미로운 비평의 질문들이 속출한다. 그리고 영화와 퍼포먼스라는 양 대 축은 여기서 이러한 기이한 대상들, 유령과 목소리들을 분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어준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넓은 비평의 스펙트럼 안에서 가장 견고하게 지지되는 두 개의 기둥.

     

    마지막으로 그 탁월한 형식적 실험들. 이것은 문학적이라기보다 영화적인 수사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긴 이야기를 엮어 풀어내는 일. 혹은 연극적일 수도 있는 어떤 것. 하나의 무대를 상정하고 그곳에서 상연을 시작하려는 어떤 시도이자 혁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방혜진의 비평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들은 미술작품 분석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미술은 무엇으로 보일까. 말 없는 오브제 혹은 영원히 멈춰 있는 화면으로서의 회화, 영화사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다종다양한 영상들. 그에게 이들은 아마도 가장 까다로운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또 다른 이중성의 사이 공간 어딘가.

     

    다루지 않은 몇 개의 글에서 그는 회화나 전시론을 다루고 있는데 그곳에서 일련의 경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도 미래에 생산될 글에서 미술에 대한 더 특정적인 방법론이 도출되지는 않을까 혹은 세 번째 기둥이 혹은 네 번째 기둥이 혹은 모든 게 무너진 더 넓은 어딘가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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