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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원화론
    Column 2020. 9. 7. 11:02

    *편집자 주: 다음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된 원고가 아님을 명시합니다.


    윤원화론

     

    이양헌

     

    윤원화의 첫 번째의 저서, <1002번째 밤 :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2016)을 보면 그가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단순히 신생공간 세대의 젊은 작가들이나 오늘날의 소란스러운 현장에 관한 탐구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더 큰 대상을, 더 넓은 세계를 서술하고자 하는 의지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그의 글을 통해 이야기를 해보자.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서문에서 그는 하나의 오래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일종의 이야기 중독자인 왕에게 세헤라자데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다음 날에도 왕을 찾아가 그의 잠을 깨우는가. 그녀 역시 한 명의 이야기 중독자로서, 영원히 이어지는 이 서사는 2010년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특별한 장면들을 불러들인다.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2010년의 미술은 무엇이었나?

     

    그가 특정한 시대를 보는 하나의 관점은 젊음이다. 신생공간의 부흥과 함께 젊음은 어떤 활력제이자 상찬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새로움과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 혹은 제도의 역학 속에서 젊은 미술가들은 각자의 집을 짓고 자신의 터전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이후 서울의 미술은 무엇을 남겼나. 이것이 그가 고민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이 책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윤원화의 첫 번째 저서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는 아마도 시간. 그는 시간에 왜 천착하는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고, 그 시간들은 다시 서로 다른 시간의 기류에 속한다. 언제부터인가 이 시간은 더 이상 '동시대'라는 하나의 우산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제는 동시대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오히려 20세기 후반의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성립할 수 있었던 독특한 허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의 질서란 언제나 조작적 허구이니, 그것은 우리가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의 궤적을 이해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우리 스스로 그려야 하는 일종의 지도다.”

     

    미래를 향한 질문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시간이라는 기이한 대상을 탐문하는 이유일 수 있다. ‘매혹하는 폐허라는 제목으로 현재로서의 폐허에 관해 다루는 1장과 '가장 희미한 해'라는 제목으로 과거로 수렴하는 시간의 다루는 2장은 시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루어낸다. 안에서 미래로 향하지 못하는 정체된 현재를 폐허에 비유하면서 도시 미관에 복무하는 예술에 관해 묻는 동시에 기억과 망각, 문서의 관계를 사유하는 2장은 거대한 시간을 감각하는 그의 비평을 가늠하게 한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글은 부연: 관광객의 시점인데 이방인의 시점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서울의 역사와 위상, 그것은 왜 다른 도시와는 다른 특별한 장소가 되는지 등 하나의 무대로서 서울에 관한 시간들의 다발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의 두 번째 저서, <그림 창문 거울>에서 윤원화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인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은 정말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인가. 더 이상 사진을 프린트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터넷과 같은 다양한 매개의 과정 안에서 순환한다고 그는 생각하는 듯하다. 그보다는 작지만 전시장 역시 일종의 사진을 위한 교역소일 수 있으며, 예술사진을 넘어 다종의 역사적인 이미지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는 광의의 의미에서 사진이란 그러므로, 이제 창문이나 거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창문은 밖을 투과하는 것, 거울은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창문이거나 거울이기만 사진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짚는다. 사진이 변하는가. 아니면 시대가 변하는가. 사실은 우리가 변한 것은 아닌가라고 그는 묻는 듯하다.

     

    사진은 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것은 이미지의 기존 기능을 잠식하면서 새로운 기능들을 추가했는데, 오늘날 그 영토는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디지털로 전환되어 여전히 확장되고 있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사진이 상실한 것은 거의 없다. 사진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지난 시간 사진이 불러일으켰던 경이로움과 감상성, 우리가 사진 속으로 투영했던 꿈과 환상, 그로 인해 사진이 획득했던 가치와 의미다.”

     

    어쩌면 윤원화는 하나의 장르로서의 사진에 관해 다루기보다는 사진으로 그림을 만드는 것, 이미지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독특한 대상으로서 사진에 관해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오늘날 무엇이 되는가. 다시 외부를 인식하는 다양한 경험 중 사진적 경험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는 독립적인 의미를 보존하는 하나의 사진의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작은 주체가 마주하게 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라는 점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전시장은 분명 세계의 축소판이고, 미술적인 것과 그와는 조금은 다른 사진적인 것이 서로 배치된, 혹은 건축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를테면, 김희천과 최윤의 작품은 잔여로서의 이미지 그 자체는 아닌가 하는.

     

    윤원화를 읽는 첫 번째 키워드와 연결되는 도큐멘트로서의 사진 혹은 역사를 호출하는 사진은 사진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이나 증거, 보존의 이름이 아니었다. 차라리 스스로가 어떻게 표상되고 그 이름을 얻는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구성되는지를 알려주는 그 절차를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사진에 가깝다. 3역사의 이미지들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저서와 두 번째 저서를 통해 윤원화의 비평은 언제나 아주 작은 개인이 시대를 인식하는 감각과 그것을 매개해주는 다양한 미술들(혹은 미술이 아닌 것)로서의 이미지를 다루는 일에 가까워보인다. 모든 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는 조건 아래 그럼에도 명징하게

    드러나는 어떤 공통감각들을 그는 찾고자 한 것은 아닌가.

     

    윤원화의 또 다른 글인 <공유지에서>는 이런 관점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론이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왜 이론은 그토록 미움받는가에 대한 나의 첫번째 이론이다. 앞선 두 문장에서 나는 이론이라는 단어를 세 번밖에 안 썼지만, 이 단어들 이 모두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쳐 써보자. 모든 사람은 각자의 견해가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왜 이론은 그토록 미움받는가에 대한 나의 첫번째 가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쓰다 보면, 맨 처음의 문장은 애초에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도 있었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모든 사람은 각자 이론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말하자면 그것이, 왜 이론은 그토록 미움 받는가에 대한 나의 첫번째 이론이다.”

     

    이론을 다루는 이 글에서 그는 이론의 형상을 추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지평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꿈에서 본 장면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구체적인 세부는 모두 잊었지만, 큰 그림은 아직도 떠올릴 수 있다. 한밤중에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투명한 천구로 에워싸인 것처럼, 검정색 하늘에 하얀색 선으로 좌표계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으로, 물리학에 빠져 있었다. 일종의 방과 후 활동처럼 수업이 끝나 고 남는 시간을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방정식들을 복기하면서 보냈다.”

     

    동세에 물리학이야말로 이론의 왕으로 세계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준엄한 임무를 수행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건설하고 구축해내는 세계는 결국 책의 일부로서 작은 한 권의 문서이자 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론의 왕국은 얼마나 초라한가. 동시에 이론의 명확한 한계 안에서 운동하는 존재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이야말로 당대의 다원주의 아래서 아무 말 잔치나 다름없는 혹은 소음공해거나 똥 던지기 같은 것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론의 가능성을 또한 믿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배우 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아주 오래된 철학자의 말을 기억한다. 나에게 처음 그 말을 알려준 사람은 방랑하는 외국인이었다. 나는 외국어를 읽는 것처럼 한국말을 낯설게 말하던 선생들을 기억한다. 아직 불충분한 말들이 바다처럼 펼쳐지던 것을. 나에게 이론의 영토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의 바다였다. 신성한 지도를 고쳐 그리며 렌즈를 깎아 수평선 너머를 염탐하는 해적들의 세계. 말의 탑들이 터무니없이 쌓여 올라가고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흘러내리는 말들이 강줄기를 이루고 다시 바다로 흘러든다. 나는 이 영토가 망각되거나 폐쇄되지 않기를, 오래전 누군가 내게 그 입구를 알려주었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그 반쯤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권의 저서와 함께 <공유지에서>를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것이 윤원화의 비평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윤리가 여기에는 작동한다. 동시에 어떤 신학이 그 이면으로서 또한 함께 작용한다. 그것은 필멸자로서 혹은 우리가 모두 결국 동물 중 하나임을, 누구도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위치에서는 서 있을 수 없는 진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아주 특별한 삶의 순간에 우리는 가끔은 그 언저리를 잠깐이나마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

     

    그의 비평 안에서 미래를 중요한 키워드이다. <함영준의 폐허: 생존 경쟁을 넘어서><기금을 다시 생각하기>에서도 단지 현실의 폐허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비판과 분석은 결국 미래를 향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예비하는 시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운동장을 요구하면서 시작에 대해 말하고, 기금에 관여된 모두에게 이런 육성의 방식이 미래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윤원화의 비평이 문학적이거나 예술의 자율성 안에서만 복무한다는 견해는 미래라는 말 앞에서 철회되어 할 어떤 것이 된다. 한 명의 미래주의자로서(여기서의 미래주의가 역사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다. 서로 각각의 세계가 존중되는,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몇 개의 약속들이 존재하는, 혹은 어떤 작은 온실과 그 속에서 마음대로 자라난 식물들.

     

    가장 정치적인 성격이 그의 비평을 특징짓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유려한 문장이나 대상 안에 국한될 수는 없다. 가장 치열하게 미학적인 대상을 탐문하는 태도 안에서 비평이야말로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 그의 비평이 미래를 수호하는 첨병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그의 수많은 텍스트를 딛고 조금은 높은 곳에서 조금 먼 곳을 조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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