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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혜진론: 톱밥과 금속조각[200316]
    카테고리 없음 2020. 9. 7. 15:50

    *편집자 주: 다음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게재된 원고가 아니며, 이양헌 평론가가 류한길 작가의 원고를 도용한 원고임을 명시합니다.

    방혜진론

    이양헌

    1.

    이 글은 비밀 종파의 수호 신부가 사망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수 세기에 걸쳐 신비의 봉인물을 지켜온 다른 신부는 물리학 교수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데리고 LA 중심가에 위치한 오래된 교회로 향합니다. 성당 지하에 묻혀 있는 녹색의 실린더는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곳에 봉인된 악마가 현세로 넘어오려는 시도를 막아내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B급 호러물이자 평단으로부터 혹평 받은 실패작입니다. 영화의 역사와 시네필리아-서클에 기입될 수 없는 80년대식 헐리우드 공포영화입니다. 우리는 왜 이 영화로부터 시작하게 됩니까?

     

    2.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해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가해지는 '실패'라는 주문 때문입니다. 무엇이 한번 실패라고 거론이 되면, 특히 어떤 권위가 실패라고 선언하면 그것은 명백한 실패가 됩니다. 이 권위는 집단 심리를 추동하고 집단 심리가 실패라고 인지하면 그것은 시장에서, 어떤 계 안에서 영원한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됩니다.

    유튜브의 많은 영화 리뷰 채널들에서 망작이라는 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망작이라고 선언하는 근거에는 유사한 판단 가치의 패턴이 보입니다.

    그 판단 가치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짜임새 있는 구성, 긴박한 속도감, 탁월한 심리 묘사, 절묘한 반전 등은 모두 보편 언어의 이해들 속에서만 소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패라는 인식은 바로 이 보편 언어라는 제한점 아래에서만 소비 가능한 탁월함을 기준으로 해서 반사적으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탁월함이 이해가 안됩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이해가 되어서 압축과 제한으로 평평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수많은 SF나 호러 장르물들 또한 대부분 이 영역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탈주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몇몇 작품들은 당대의 시장과 비평 모두로부터 외면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SF와 같은 장르적 보편 언어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과 기획, 아트 디렉션이 작품 자체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이후로, 해석에 권위를 주입하면서 창출된 것은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절대성의 인정이었고 그로 인해 산출되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것들은 모조리 유령들이었습니다. 다시 특정 계의 보편 언어의 파워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이제 작품 생산자들 스스로 과거의 유령들을 소비하고 그 안에서만 깊이를 논의합니다. 뼈와 살이 없는 유령으로부터 아이디어를 확보하여 다시 유령들의 권위로 포장하는 것이 보편 언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인식의 공간에서 소비되는 '탁월함'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언어와 그것을 안전하게 소비하게 해주는 인식 필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탁월함이란 것이 시체 부활의 과정에도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네거티브(-1)를 창출해야만 반사적 포지티브(+1)를 획득하여 자본화 할 수 있습니다. 포지티브 창출을 통한 포지티브는 존재하지 않거나 모두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안전함 즉 필터라는 통제성으로 드러납니다. 저는 자본 그 자체를 딱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비대칭적이라는 점이 의심스럽고 이 보편성에 반기를 드는 것이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실패라는 저주의 주문을 푸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실패와 성공 사이의 긴장을 유효하게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픽션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는 그런 점에서 훌륭한 사유의 길을 제공해 줍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실패라는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윌리엄 바이락 박사의 강의가 떠오릅니다. 그는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인지되지 않는 존재들을 나열하며 그는 고전적인 사실주의와 결별하라고 말합니다. 물질적 토대와 유물론적 지층으로부터 쌓아올린 우리의 믿음을 부정하고 그것이 유령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하게 들립니다. 그것은 충분율이 근거율을 대체하는 일종의 문법의 환상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은 일전에 러브크래프트(H.P. Lovecraft)가 만들어 낸 크툴루에 대해 말한 적이 있죠. 그것은 우주의 범위에서 증명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들이고, ‘서술할 수 없는 무엇의 절대적 메타포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무심하고 자기 의지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닮아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언어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호의 외화면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식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4.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고 동시에 그 존재가 외부로부터 다가오거나 내부에 숨어있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번 우리는 그것을 지칭할 언어도 맥락도 구성하지 못하며 추상 능력도 매우 부실하다는 사실만 깨닫게 됩니다. '소리'라는 명사가 모든 다른 소리들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크틀루와 같은 코스믹 호러의 특징은 인간의 인식 범주 밖의 무엇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과 마주쳤을 때, 인간의 의식은 한낮 먼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염세주의적 시선입니다. 한 천문학자는 외계인의 존재를 확률적으로 따졌을 때, 외계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그렇다면 왜 외계인이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에게 인간은 그저 개미나 지렁이 정도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개미나 지렁이 앞에서 굳이 '내 모습을 드러내겠다'라는 인식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차원의 개념 안에서도 3차원으로 필터링 된 세계에 사는 우리가 4차원적 존재를 온전히 생각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개미나 지렁이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 앞에 인간이란 어떻게 인식 될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즉 이 우주적 염세주의는 인간 중심적 가치 판단의 시선이 얼마나 세계에 대해, 이 지구에 대해 오만하고 차별적이며 무지한 시선인지를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기능적입니다.

    서구인이 제3세계인들에게 가졌던 시선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작동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러한 시선에서 얼마나 진일보한지 아니면 똑같은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의 발견이 가져오는 새로운 증거들 또한 우리의 무지를 알려줍니다. 문어들이 바다 깊숙한 곳에서 자기들만의 중앙 분산형 다세대 정착지를 구성하고 살아왔다는 것, 바닷가재가 감정이 있다는 것, 지하 수천킬로미터 밑의 완전한 고열의 암흑 속에서도 미생물들의 활동이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도 800년 가까이 단 1mm의 이동조차 하지 않는 생물이, 마치 광물과 같은 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자연 자원을 통해 사용하고 소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상함을 느끼는 것을 음향학적으로 바라보면 정보와 같은 외부 신호의 새로운 유입(새로운 주파수 대역)에 우리 인식의 내부 신호(기존의 주파수 대역)간에 간섭이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기존의 주파수 대역에 새로운 주파수 대역의 간섭이 일어나면 공진이 발생하고 두 신호 간의 작용에 따라 특정 에너지가 급증하게 됩니다. 특정 에너지, 즉 인지하거나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상함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 중심적 가치 판단을 덜어내고 그 이상한 것을 경험한다면 이제껏 생각 못했던 요소들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상한 것을 이상한 것 그 자체로 경험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인간 문명이 비대칭적 누적에 의해 발달해왔고 여전히 포괄적 의미로서의 자연이라는 대칭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재고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나아가서 '행위자 이론'과 같이 대칭의 세계 사이에서 그것을 비대칭적으로 인식의 질량 기울기를 조절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무턱대고 자연주의를 추종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본이 억압적 기재인 것처럼 자연 또한 인간에게는 억압 기재입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인지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인간 중심주의라는 압축 필터를 걷어낼 필요가 있고 필터를 걷어냈을 때 또는 필터를 거쳐 미세하게 분절되어 세어나오는 것들 모두에 정확한 이름과 고유한 위치를 인정하는 언어의 창출이 필요합니다.

     

    5.

    새로운 언어를 창안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상관주의에 따른다면 우리에게 인식의 선험적 형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언어라는 정치적 필드(Field, )는 너무 오염되어 버렸으므로, 그 출구는 요원해보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주의에 기반한 청교도 전통이 어떻게 근대적 자본주의로 발전했는지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때 유라시아 일부 지역에서 발흥한 특수한 이념적 체계였지만, 이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바야흐로 두 번째 자연이 되었습니다. 주체와 객체는 긴밀하게 매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의 아바타들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이제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 또 다른 기관입니다. 그토록 해체하고자 했던 근대로부터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경제적 판단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믿음의 필터와 사고를 제한하는 장치, 안전 표지판으로 둘러싸인 영역에서 우리가 제한되고 압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소성의 원리에 따른다면 압축이 풀린 이후에도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압축되지 않은 형상으로 우리가 존재했던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자본주의의 합리성 너머에서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수용체가 이미 퇴화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영국의 탐험가 퍼시 포셋의 예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존 밀림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도시를 찾아 떠났다가 실종된 그는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당시 지도 상의 빈 곳으로 남아있던 아마존 일대의 측량을 성공시키면서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문명의 잔해들을 발견하고 어떤 서구인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자적 문명이 아마존 정글 깊숙한 곳에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됩니다. 그는 증거들인 토기 그릇들을 모아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왕립 지리 학회에서 발표를 하게 되는데, 당시의 석학들이 모여있던 왕립 지리 학회의 학자들의 태도들은 터무니 없는 소리”, “야만인들이 문명을 세웠을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석학들의 인식이자 보편적 서구 합리주의라는 것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퍼시 포셋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사실임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대인은 어떻습니까? 저는 범주가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왕립 지리 학회의 석학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낍니다. 여기까지가 아마 가소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단계라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해지는 힘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가해지는 힘이 바뀌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선택적으로 그 힘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압축이 풀린다면 이 세계 내부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힘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그 힘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힘의 위치 또는 궤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힘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사실 우리가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정치 문제들과 선거가 다가왔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힘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노력 중 하나 입니다. 한번 고정된 힘은 그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것을 활용합니다. 이런 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대등한 질량의 에너지를 가진 힘의 유입이 필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좌와 우의 대립에서 지구급 외부 행성의 충돌과 같은 것 말입니다. 탄핵 당시에 드러난 집단 심리의 폭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탄핵이 성공한 이후에 현재까지 벌어지는 다른 분열의 양상은 집단 심리가 결코 개인의 심리를 다 포함해주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즉 집단 심리 자체가 더 복잡한 다양성의 양태를 담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사고들의 연합을 위해 더 많은 다양성의 사고 체계들이 발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확산을 위해 일종의 사고 실험들이 요구되고 그 사고 실험에 필요한 시뮬레이션으로서 문화적 방법이 필요해집니다. 괴이한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압축과 제한으로 인해 평평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상상이나 추상 능력이 작동해야 할 자리가 점점 비워지고 있고 약화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힘이 없어지면 과거의 누적된 문화를 재활용하게 됩니다. 레트로 문화의 부활이 바로 이런 상황의 신호탄입니다.

    가소성에서 신경가소성의 문제로 넘어가면 이 주제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여 새로운 사고를 하면, 뇌가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적응하여 변화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의 인간임을 증명하는 신체 형태가 미래에도 변치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는 이유는, 비유를 하자면, 컴퓨터 하드웨어 자체는 스스로 내가 컴퓨터라고 인식하지 못하지만 운영체제가 설치되면 비로소 컴퓨터로서 작동을 하게 것과 유사합니다. 만약 인간이라는 의식이 설치되지 않은 인간 신체라면 우리가 그것을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인간 형태인 휴머노이드 하드웨어 안에 인간이라는 운영체제를 설치한 것은 누굽니까? 또한 인간 의식이 다른 곳에 설치될 수 있다는 SF적 상상은 이미 흔한 것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인간 의식이 설치된 전쟁용 탱크라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결국 인간 형상의 휴머노이드 하드웨어 자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백낙진 교수의 발견된 문건들 속에는 수메르 신화를 기초로 최초의 인간 원형 '아다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아마도 그 '아다무'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공 하나 없이 밋밋하게 매스킹 처리된 미형의 휴머노이드와는 매우 다르게 생겼을 것이고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어떤 미개한 원주민 정도의 인상이 먼저 작동할 겁니다. 그리고 꺼림칙해 할 것이고 더러워 할 것이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면서 결국 차별과 증오로 어떻게든 사회적 안전장치를 가동 시켜 자신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을 것입니다.

     

    6.

    영화에 등장하는 녹색의 실린더에서 사람들은 불안한 기운을 느낍니다. 그들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불길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악의 존재로 규정해버립니다. 우리는 역사적 계기들을 통해 그러한 오만과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을 수없이 목격해 왔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원래부터 그런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이것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일종의 생존법칙, 경제적 접근이며 믿음이 신앙이나 신화로 작동하면서 진리나 불변의 법칙이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1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의 말처럼 인지 가능한 패턴의 연산 반복일 뿐입니까? 패턴의 연산 반복이라는 말은 저에게 환원주의를 필요 이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추상적인 대상을 분류와 체계를 통해 단순화하고 경험명제로 조정하는 실증적인 방법론입니다. 그것은 배제와 누락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여전히 가장 생산적인 방식입니다. 흔히 환원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전체론적 방법론조차 개별 스팟(spot)을 체계적으로 종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환원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별 인과요소를 분석하고 종국에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지배적 법칙을 추구해 온 존재론적 환원주의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끝에는 궁극의 방정식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가능한 모든 경우의 값들을 입력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결정되어 나온다는 라플라스식 모델 말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세계관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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