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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나데르 & 마리아 캄포스. <시간이 걸리는 시간>: ‘투명한 안무’REVIEW/Dance 2017. 10. 31. 01:10
기 나데르 | 마리아 캄포스(Guy Nader | Maria Campos) <시간이 걸리는 시간(TIME TAKES THE TIME TIME TAKES[TTTTTT])>
▲ 기 나데르|마리아 캄포스, <시간이 걸리는 시간>ⓒAlfred Mauve[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이하 상동) [무용단이 제공한 사진은 실제 작업에 대한 메커니즘을 사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넷으로 짜이는 움직임은, 하나에서 둘로 다시 셋으로 그리고 넷으로 확장된다. 이는 하나의 움직임에 다른 움직임이 영향을 끼치거나 받는 식으로 하나씩 하나에 둘에 셋에 덧붙는 식으로 짜인다. 이를 유기적인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련의 규칙적인 프로세스를 보여준다고 보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이 프로세스는 시작과 동시에 반복의 구문을 형성하고, 무용수들은 자동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지속한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듯한 사운드가 중간에 나오기도 하는데,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개별 무용수들의 움직임에서 그러한 규칙적 움직임의 수행을 연상할 수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사실 사물의 움직임에 착안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보도자료를 참조하면, “되풀이도 순환도 아닌 끊임없이 자발적인 구조의 시계추 운동(진자 운동)을 모티브로, 생명과 우주에 편재하는 리듬의 약동을 보여”준다고 되어 있다]. 팔을 땅과 수평으로 들어 뒤로 뻗는 손을 시선이 따라가는 첫 번째 동작이 반복되면서 거기에 한 명씩 움직임을 더하며 시작되는 이 공연에서, 무용수들의 입은 완전히 닫혀 있고, 온전한 침묵을 수행하는 듯 보인다, 여러 짜임을 시공간에 다시 배치하는 가운데 완벽하게 그 짜인 프로그래밍을 수행하면서.
▲ 기 나데르|마리아 캄포스, <시간이 걸리는 시간>ⓒAlfred Mauve
무용수는 반복할 뿐인데, 곧 시작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는 순간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지나간 순간을 기억해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기억이 다른 변용을 가능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그 자체로 변용되어서는 안 되며, 같은 동작이 늘 새롭게 다시 수행되어야 하는 가운데 정확한 (하나의) 기억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반복되며 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일종의 강박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의 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종합해 총체적인 움직임의 단위(들)로 지정 가능할 것이다. 처음과 끝은 분명하게 지정되어 있다. 그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단절된다. 단지 또 다른 움직임의 단위가 시작될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 공연은 (총체적인 단위의) 전환의 순간만이 새로울 수 있다(물론 뒤에 보겠지만 시공간의 배치와 다른 음악의 적용이 하나의 단위를 다르게 감각하게 한다). 총체적인 움직임의 단위에는 개별 무용수들의 작은 단위의 반복되는 움직임이 있다. 이것은 곧 분절된 토막들의 합산이다. 곧 움직임은 끝없는 생성의 무한을 향하거나 숨의 상승과 하강의 높낮이와 그에 따라 소진되는 몸에 의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은폐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분절되고 반복되는 단위들의 적용은 시공간을 바꾸며 발생하는데, 같은 동작이 끊임없이 기계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오로지 순전한 움직임은 음악뿐이다. 기본적으로 깔리는 배경음악에 드럼이 침투한다, 음악보다는 움직임에. 그것은 유일한 라이브 사운드이므로 물리적 지표의 성질을 띤다. 또한 유일하게 강하고 유연한 지배력을 갖는데, 미리 깔리는 음악이 어느 정도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작은 실험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같은 움직임 단위의 반복을 새롭게 규정하고 또 과정에서 끼어드는 게 가능하다.
▲ 기 나데르|마리아 캄포스, <시간이 걸리는 시간>ⓒRuben Vazquez
결과적으로 음악만이 바뀌며, 같은 그러나 달라진 공간에의 배치에서의 움직임과 달리 달라진다. 한편 또 하나의 변수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무대 왼쪽에 쳐 있는 거대한 하얀 커튼인데, 반대편에 위치한 하얀 조명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거꾸로 보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변용한다. 가령 두 명의 무용수가 붙어서 나란히 섰을 때 그림자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두 배쯤 되는 크기로 비춘다(하지만 이러한 효과는 그다지 기대할 만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구조적으로 공간을 막고 안정된 효과를 주는 부분이 있는 정도다).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 움직임은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지속되는 서사를 구축하는 대신, 일정한 범위 아래 구조화되는 움직임의 개별 단위들이라는 메커니즘을 지시하는 데 그친다. 분절된 동작들은 그 자체로 심미적인 것으로 사유될 수 없다. 그것의 짜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감각되면 이들의 움직임은 단지 반복을 위한 반복임이 명확해진다. 또는 그 반복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차원에 그친다.
움직임은 어떤 정서를 반영하지도 개별 무용수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하나의 짜임을 완성하는 장면이 그것을 성사시키는 것 자체에 목적과 결과가 있다면, 이는 서커스의 동작들과 어떤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이 공연은 개별 움직임 단위들의 조합으로 여러 짜임을 만들고 이를 반복하는 것으로써 투명한 움직임, 그리고 투명한 안무 메커니즘을 고안한 반면, 재단되고 제한된 움직임이 갖는 답답함이라는 한계까지 함께 가져가게 되었다.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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