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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무르쿠스 & 쿨르드 바젤 - 카사비 시어터 Khashabi Theatre, 〈뮤지엄 THE MUSEUM〉: 테러의 재기입REVIEW/Theater 2026. 5. 9. 13:45
〈뮤지엄〉은 테러를 저지르고 7년이 지난 후, 사형을 앞둔 사형수와 형사의 만남과 밀실에서의 하루를 구현하며, 두 남자의 언어가 복합적으로 착종되고 얽히며 상호 반영되고 굴절되는 심리의 일환을 치밀하게 바라보게끔 만든다. 형사의 은근한 주도 아래, 두 남자는 후반으로 갈수록 무대 안쪽에 놓인 카메라를 직접 향하며, 제삼자의 시점에 은밀한 둘의 시간을 맞세운다. 관찰되고 있음의 환상을 경유하며 연극 하기는 과잉으로 현상된다. 여기에 1막까지는 크게 의미가 없었던, 아니 이미지를 열화시키거나 중화시키는 감산적인 장치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던, 그 둘 앞에 쓰인 거대한 샤막은 은밀한 관찰자의 심리와 결부되는 제4의 벽을 실제적으로 연장한다. 우리는 그 점들로, 점들의 틈으로 그 둘을 흐릿하게 바라본다.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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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잉거, 〈워킹 매드 & 블리스〉: 고전/과거에서 현대/현재로…REVIEW/Dance 2026. 5. 9. 13:39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일정한 서사의 전개 양상 아래 움직임을 예속시키는데, 이는 〈워킹 매드〉에서 강화되며, 〈블리스〉에서 해체된 양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는 음악적 차이에 상응한다. 우선, 하나의 음악을 사용하는, 곧 일종의 재즈 즉흥 피아노 연주인 후자의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를 사용하는 후자에서는 개별 동작들의 수행성과 자율성, 일의적 차원의 특성이 강조되는 한편, 등장과 퇴장의 가변적 특질 아래 개입과 분산이 자유롭게 일어난다. 반면, 두 개의 음악을 사용하는 전자는 곧 (너무나도 익숙한)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 1875~1937)의 〈볼레로〉와 이후 등장하는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의 피아노 독창곡 〈알리나를 위하여〉, 두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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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연출 류사라, 〈신의 바늘〉: 체험주의적 당사자성의 체현, 그리고 계몽의 다른 판본REVIEW/Theater 2026. 5. 9. 13:20
〈신의 바늘〉은 두 명의 등장인물이 그 둘만의 공간에서 마약을 하는 체험을 강도 높은 것으로 현상하는데, 이는 마약에서 깨어났을 때의 불쾌함 등을 동반한 잔여 감각까지 전달하며, 자기 파멸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하는 가운데, 이 둘의 자아의 확장과 극단적인 변용의 순간은 시간이 축적됨에 따라, 탈구된 사회와 비대해진 자아의 해소할 수 없는 간격으로 인한 위기감으로 연장된다. 리얼리티로 측정되는 건 두 사람만의 내재적이고 은밀한 세계의 발현이며, 곧 관찰하는 이들에게 열린 닫힌 세계의 틈이며, 예외적이고도 고유한 체험을 하는 이의 당사자성은 〈신의 바늘〉의 표현 양식의 토대이자 주제의 중심 의미를 이룬다. 따라서 그 주제를 선택한 윤리적 고려의 차원은 다분히 재귀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서사는 그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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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극장 쿼드X즉각반응, 〈엔드 월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문학의 견지에서 타자성을 구성하기REVIEW/Theater 2026. 5. 8. 13:10
〈엔드 월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이하 〈엔드 월〉)는 한쪽 끝 벽에 깔려 죽은 주인공 아성이, 질문을 통해 이전의 시간으로 반복해서 돌아가며 죽음의 원인이 아닌, 그 상황 속에 자신의 행위에 개입된 자신의 의식을 탐문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죽음 직전의 상황과 친구들과의 추억이 계속해서 소환된다. 자신을 성찰하는, 자신을 화두로 삼는 이 과정은 문장의 빈 공간을 찾고 거기에 들어갈 적합한 말을 찾는 글쓰기에 비유되는데, 곧 아성이 본인의 죽음과 관련한 자신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작가로서 사건과 한 인물에 대한 접근이 이뤄짐은, 한편으로는 애도의 차원 바깥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 한 인물에 대한 서술의 차원이 문학적으로 승화됨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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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키리에〉(장영 작/전인철 연출): 죽음을 경유한 사랑으로의 도약REVIEW/Theater 2026. 5. 8. 12:53
〈키리에〉는 자신이 건축한 집이 된 영혼(최희진)을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존재들이 그와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어떤 비지각적이고도 무매개적인 접촉 아래, 일종의 고해성사적 독백을 통해 삶을 다시 추스르고 도약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일종의 영혼의 싸개로서 집은 영혼의 물리적 연장이자 또 다른 신체를 수용하며 그것을 지각하는 신체의 전면화된 재분절로서, 정신이 신체로 이완―탈영토화―되면서 정신-신체라는 반죽의 동일한 밀도를 띠는―재영토화되는―, 그리하여 거대한 하나의 기관, 혹은 기관 없는 신체가 된 집이 된다. 그때 들어오는 영혼들은 역설적으로 비워진 정신의 영역 아래, 정신을 그 확장된 신체에 이완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 〈키리에〉는 이처럼 죽음 ‘이후’와 죽음 ‘직전’을 맞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