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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옥, <모험의 편집공학> : 경계를 맞춤 인식하는 편집의 방식들
    REVIEW/Visual arts 2014. 12. 19. 16:41

    유령의 흔적에서 유령의 기원으로


    ▲ 이세옥, <모험의 편집공학> 전시 전경 [사진 제공=시청각](이하 상동)


    하나의 개인의 방에 들어온 것 ‘같다.’ 이 ‘같다’의 느낌은 그 표현에 있어 정확치 않다(고로 어떤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을 일단 하나의 영화이고 ‘영화적 체험’이라 명명해 보자. 두 개의 스크린과 2개의 오디오로부터의 교차 편집된 (목)소리, 그리고 일종의 리듬을 부여하는 ‘배경’ 오디오-사운드. 하나의 스크린이 헤드폰을 장착하며 듣고 본다면-그럼에도 하나의 공간으로 열린 채 듣기·보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외의 나머지는 하나로 맞물려 기능한다. 일상에서 채집한 사운드들-빗소리들을 비롯한 여러 소리들-은 나를 위해 허락된 곳일까. 곧 이 ‘나’를 상정함은 이곳을 누군가의 사적 공간으로 두고 있음을 전제하며 거기에 침범해도 되는지, 그 내밀함을 보느냐 마느냐로 선택의 입장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소외의 경험은 하나의 검은 카펫이 방 전체에 깔려 있고, 보거나 듣거나 하는 모든 것이 어떤 전체의 시간 순에서,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방을 가진 ‘어떤 주체’에 의해 기능하고 있고 또 주어짐을 의미하는 가운데, 그 어떤 화자의 자리를 전유해도 될지 말지 내가 ‘그’가 되어 보는 게 가능한지의 어떤 의문이다. 이는 유령으로만 존재하는 그 인물, 가상의 허구적 주체를 대면할 수 없는 대신, 그가 돼 유령의 흔적을 쫓는 수밖에 없음을, 나아가 그 유령의 흔적으로 이곳을 떠나게 됨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너른 시간을 두고 보면 전체의 전체가 아닌 전체의 일부, ‘중간의’ ‘시’ 공간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며 자동으로 ‘작동’된다. 곧 검은 카펫으로 구획된 하나의 방, 그 방과 분리될 수 없이, 그리고 그 구성의 요소들로 하나의 시(공)간을 이루는, 켜지고 꺼지는, 단속적으로 작용되는 사물들, 시청각적 환영, 그리고 개입하고 있는 원래 주인을 상정하는 것으로 편집된다. 다시 말해 이 공간에 편입됨을 선택함은 그 편집공학의 역학에 포함돼 (재)구성됨을 의미한다. 이 방, 집을 왔다 갔다 하며, 헤드폰을 꼈다 벗었다 다시 TV를 켰다 껐다 음악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부재의 흔적은 가상으로 구성하며 성립되는 주체 이 순환·반복의 어떤 시간대에 그것과 결부되는 어떤 공간에 한 부분을 전유하기 시작했을 때 곧 이 거대한 시각의, 편집 자장에 온전히 속할 때, 그 유령적 존재 자체가 됨을 인식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역설적으로 그 존재하지 않는/않았을 유령의 기원이 된다(만약 소외가 계속된다면 이 방의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계속해서 유령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편집된 영화에 주목해 본다면, 이는 언어 텍스트로 수렴되는 소리와 말이 주효하다. 곧 이 공간의 초대받지 않는 손님으로서 유령이 되는 대신, 이 유령의 흔적들의 구성된 시간에 편집의 일부가 되어보는 것에서 언어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전시의 제목 ‘모험의 편집공학’의 모험은 곧 이런 주인 되기, 누군가의 체험을 체험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언어/소리를 사유로 새기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그 안에 앉았을 때 마치 유령으로서 몸이 사라지고 정신의 감각점들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전체 구성된 텍스트에 앞서 개인의 방과 ‘같은’ 어떤 그 느낌은 (그러니까 그 ‘개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유령, 과거의 것으로서 현재 재생되며 미리 재생될 누구라는 것에서 확정할 수 없었던 그 존재가 자아내는 시공간에서 오는 그 느낌은; 앞서 ‘같은’은 모종의 잠재된 지배가 펼쳐질 모험에의 요구가 뒤따르는 셈이다) 이 방의 주인의 머릿속의 생각들을 듣는 것과 같다. 곧 여러 개의 문장들 머릿속에 기입되는 것 같다. 가끔 켜지는 화면은 의식을 환기시키는 것 같으며 간간이 휩쓸려오는 음악-리듬과 물질-사운드는 이것을 평화롭게 하는 풍요로움의 긴장으로 자리하는 것 같다. 


     처리 단계의 과정들의 언어들



    주어진 말들은 언어와 인식 그 자체에 대한 것, 곧 (메타 차원의) 언어학이자 인식론이다. 어떻게 인식하는가, 또 그 인식이 작용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에 가깝다. 가령 ‘무의식의 풍경’은 초현실적 판타지에 경도됨을 야기하는 것보다 표현/정의되기 전의 의식 단계, 뇌 내 처리 단계들을 지시하는 것 같다. ‘무의지적 움직임의 규약’ 아래 ‘당신 꿈에’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어떤 이야기가) 기입’됨은 당신 기억의 신화의 구성 방식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인식의 간극과 균열을 통해 획득하는 인식 자체에 대한 고찰은, ‘더 잘 보기’ 위해 선택해서 보는 것과 같이 인식되지 않고 선택적으로 절취되는 현실의 잘려나감과 그 잘려나감과 더불어 존재하는 다른 모습의 ‘현실’을 지시하고, 통상의 현실이란 개념의 쓰임으로부터의 인식적 간극과 함께 본래의 ‘현실’의 개념을 재구성·환기시킨다. 또한 이 말들, 목소리들은 고유의 아포리즘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인식 자체를 반영하는 메타-인식, 전-의식을 통해 인식(의 간극)에 대한 인식을 초하며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험’은 그 편집 작용을 감지하며,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인식의 전 단위의 확인의 자리에 접촉하는 것, 그것을 듣는 자리에/자신의 몸에 속박된 관객으로서 그 목소리에의 편집에 작용되고 있음을 가리킬 것이다. 가령 어떤 대상을 다루는 방식으로 “아”와 “오”를 “나”와 “너”로 기억하고 사고하는 방식은 (대상을 존재로 추상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감지된 대상의 명명,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으로 비춰지고, 거기서 나오는 대립 이전의 어떤 구문의 한 지점에 가깝다. 


    ‘믿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의 부분)’이라는 말은 믿음이 믿음 자체로 환원되는 인식의 구조를 드러낸다. 곧 합리적인 판단의 기억을 따르지 않음에서 기인하는 이 모험의 공간은 인식의 구조를 더듬는 과정과 더불어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항상 요구’되는데, 곧 그 크기를 계측하고, 시각적인 분열들과 함께 전체의 종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굳이 ‘상상력’인 것은 그것을 이미 객관적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 아님에 대한 고찰까지 이 전체의 작품에서 추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들의 흘러감에 따른 시공간의 변화에 따른 적응, 곧 상상력이 요구된다. ‘당신의 삶 안에 포함돼 운반’되는 어떤 대상/타자들은 당신이 멈출 때 이제는 그들이 단지 분류의 대상에 그치는 게 아니고 실제로 당신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몸을 표현으로 그리고 기억/의식들을 내용으로 자의적인 기호로 묶어 내는 게 아니라, 기억/의식을 용기(用器)로 두고 또 다른 (생각-)기표들의 구분으로 분리하여 둔 채 각각의 작용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인식과 실재(작용)의 경계를 의문스런 태도로 되묻는 것 같다. 그들과 ‘그들’의 구분, 곧 각각 단순히 명령과 힘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주체(들)와 실제 윤리·내재적 차원에서 나를 추동하게 하는 (타자로 여겨지는) 주체와의 인식의 간극·균열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술적이거나 환유적인 메타 텍스트



    한편 이 텍스트들은 인식의 구조를 가늠하는 것과 더불어 이 전시 자체에 대한 메타 은유로 기능하기도 한다. ‘동시대를 산다는 건 흰 공백과 검은 고립을 넘어선다는 것을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전시장 곳곳에 놓인 흰, 초크와 알약들은 사물들의 파편들을 물리적/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TV와 소파 사이에 놓인 흰색 타일들(프레임/모나드의 은유·환유)이 균열·분열되어 놓여 ‘흰 공백’에 대한 지시적 기호가 된다. ‘흰 공백’은 투명한 공백이 아닌 것이다. 흔적으로서 기입되는 흰 공백에 비해 검은 소파와 의자에서의 조감의 시선과 체험적/인식적 고립이 동반된 체험은 그 공백들을 향하며 그와 정확히 맞물린다. 고립된 체험, 몸은 검게 마치 부재한다. 여기서 인식들이 떠돌며 편집되고 있음, 유령으로서 몸이 존재하고 이 몸은 상상력과 메타 인식, 사유의 연쇄 작용으로의 취함을 가능케 하는 그것과 표현적으로 직접 상응하지 않는 용기로서만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애초 ‘같은’ 어떤 방의 느낌은 그 떠도는 기표들이 내밀하게 체험됨에서 이 공간 자체가 더 이상 물리적/가시적인 것으로 확정지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에서 기인할 것으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곳’과 ‘저곳’은 엄밀한 실재의 체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유의 흘러감의 현전 속에 가능해진다. ‘어제-오늘-내일’이 한 덩이인 유기체적 또는 순차적인 시간 양상의 ‘이곳’과 ‘어제-오늘’의 경계가 있지만 ‘오늘-내일’이 ‘유기적으로 설계된 듯 보이는 저곳’은 대별된다. 곧 역사(어제)가 존재하는 대신 목표지향적인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를 가진 후자의 근대적 시간관의 차이를 가정하는 두 시간(-인식)관을 전제하고, 그 인식에 따라 다른 두 세계의 평면을 가정한다. 하나로 짜인 셀 수 없음을 전제하는 짜임의 텍스트와 애초 그것을 포기한 텍스트의 흰 공백(인식/사유)들은 검은 방(의자)에서의 어둠에서의 인식되지 않는 적응을 통해 가능해진다. 또한 미끄러진 프레임들의 모음, 곧 균열되고 틈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프레임은 이 전시의 모아지지 않고 흘러가되 흐르며 다시 돌아오는 하나의 파편적 구조(와 그 양상)을 지시하는 것에 비해, 전자의 텍스트(산재된 파편들)는 하나의 비언어적 제스처를 띠고, 언어 텍스트에 겹치고 쌓이며 동시적으로 기능함이 가능한 (서브) 텍스트로서의 또 다른 축으로 이 전시를 지시한다.


    헤드폰을 끼는 또 하나의 방에 오고, 하나의 헤드폰만 있어 하나만 유효한 두 개의 방석 중 한 방석에 앉으면 커서가 켜져 타자를 침으로 인해 쓰이는 텍스트 화면과 반복되는 음악이 부상하는데, 고유하지 않는 두 명의 주인공과 디에제시스 공간만이 있는 어떤 영화에 대한 설명은 이 전시의 메타-텍스트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곧 두 대의 스피커에서 교차되며 튀어나오는 텍스트들, 화자의 대화 않는 일종의 각각의 낭독/사유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 영화의 (설명으로서 그) 일부 텍스트 제시와 그에 대한 설명을 후자가 전자를 앞에서 밀어내며, 편집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타자의 편집 기술은 메타적 구성에 따라 이후의 텍스트가 다시 텍스트의 처음이 되는 ‘편집공학’의 구조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곧 처음과 끝이 없는 전시, 또는 그 둘이 뒤바뀌는 전시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의 (재)배치가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들의 짜임 방식은 그야말로 인식이 몸에 기입되는 방식이며 ‘큰’ 방에서 나와 ‘작은’ 방으로 갔을 때는 또 다른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 옷을 가위질하고 수치를 재고(파악하고) 하는 과정은 파편화된 조각들을 덧대고 마감하는 직조의 텍스트 구성·편집 과정을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으로 빗대며 그에 대한 주석을 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맞춤옷을 입은 화자가 거리를 걸음은 타인에게 자신을 보임의 경계 인식이 생겨나는 시선과 미적 감각의 타협 지향점이 생겨난다. ‘부름과 응답, 부름과 도착, 말과 리듬, 말과 약속’으로서 시차적 대화의 텍스트는 이 전시의 텍스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리하는 가상의 것이며 도착했을 때 부재하는 유령의 흔적을 가리키는 듯하다. 시작에 대한 고찰을 제시·지시한다. 


    작은 방과 큰 방의 연결고리는 (큰 방의) 초크와 (작은 방에서의) 실패(:실을 감아 두는 작은 패), 바늘꽂이, 그리고 텍스트 속 맞춤옷의 재단 과정들이다. 큰 방에 걸려 있던 검은 옷과 카펫의 구석에 접힌 자리(이 틈은 이 전시장 전체가 재단된 것임을 의미한다.), 큰 고리로 놓인 실패다. 이 가상적이고 물리적인 재단(편집)과 돌돌 말려 있는 실패와 같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의 배치의 방식은 인식의 모험을 가능케 하는 편집공학이다. 증인으로서 전시와의 분리·소외가 아닌 유기적으로 묶인 하나의 옷/방에서 그 옷의 입었음을 인식 않는 그 내가 그 경계를 확인하는, 꼭 ‘맞춤’되며 그 맞춤의 인식들을 그것에 대한 사유/지시로 인식한다. 곧 나와 텍스트(그 자체가 아닌) 그 경계에 대한 무엇을 경험 아니 모험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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