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Theater
-
주은길, 〈초록이가 거짓말을 하면 우린 모두 박수를 치는 거야〉: 연극이라는 외양은 현실에 대한 망각적 진리를 시현하는 것…REVIEW/Theater 2025. 11. 5. 14:17
〈초록이가 거짓말을 하면 우린 모두 박수를 치는 거야〉(이하 〈초록이〉)에서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면, 초록이가 꾸었다며 들려주는 ‘갈색수염을 입은 북극곰’ 이야기로, 사냥을 하러 온 인간인 갈색수염을 죽이고 이를 뒤집어쓰고 그의 외양으로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북극곰이, 알고 보니 주변의 모든 인간이 북극곰이 위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지는 그들 모두가 북극곰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아가 그만 빼고 모두가 그 위장에 대한 사실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북극곰과 인간 사이의 공통의 지점이 그 존재적 본질을 구성하며 연결될 수 있는, 어떤 신화적 시간을 가리키는 ‘대칭성 인류학’적 진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종의 위장된 존재로서, 그 ..
-
김상훈, 〈유인매장〉: 유인(誘引)하는 유인(有人)들로서 극장REVIEW/Theater 2025. 11. 4. 22:12
〈유인매장〉은 실재의 오프라인과 넷상의 온라인이 연동된 〈유인매장〉은, 무인매장을 특정 스케줄표에 맞춰 “출연/노동”자를 그것에 투입하는 것으로써 유인매장으로 전유하는 한편, 온라인상의 중개와 개입을 통해 이를 다시 전유한다. “서울 강북구 번동 470-1 1층 무인아이스크림할인점 아가 변동점”이라는 실제 장소를 기준으로, 그와 연동된 웹페이지가 여러 차원에서 연속적으로 상황을 기록하고, 또한 유저 역시 로그 기록을 남기며 참여 가능한데, 이는 카카오톡의 오픈 채팅으로 연장되는, 일종의 스트리밍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장소 일부만을 비추는 매우 해상도 낮은 카메라 렌즈를 경유하며, 그 장소에 대한 결여된/불충분한 시선과 텅 빈 제스처를 드러낼 뿐인데, 따라서 그 밑에 따라 오는 출연자의 ..
-
이민진, 〈수평선 옆에 (여전히)〉: 진동하는 서사 혹은 시각REVIEW/Theater 2025. 11. 3. 01:29
이민진의 〈수평선 옆에 (여전히)〉에서 누드는 지배적인데, 이는 어떤 ‘수평선’을 상기시키는 서사의 시작과 연결된다. 누드는 그 서사의 일부로서 튀어나와 그 서사를 완성시키는 보족물이자 수행적인 신체의 매체적 전환으로서 그 서사를 찢고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누드는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반향, 처음의 순전한 픽션이 아니라 두 번째 다큐멘터리적 기록의 차원에 대응하는, 감각의 차이를 가진 똑같은 춤의 반복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옷을 하나씩 벗어가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어느 해변에서 뒹구는 남녀를 조심하라는 조언을 듣고 걷던 안무가의 일행이 급작스럽게 마주친 누드로 배낭을 멘 남자를 먼저 실루엣으로 식별할 즈음에 이르러, 작가는 거의 누드를 완성한다. 그러니까 누드에 대한 (경험의 외양을 띤) ..
-
이우람, 〈순희, 영숙, 연수-ㄴ〉: ‘엄마’를 호명할 것인가 마주할 것인가REVIEW/Theater 2025. 11. 3. 01:09
〈순희, 영숙, 연수-ㄴ〉은 ‘엄마’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추출하고 또한 개념으로서 사유하고자 하는데, 출연하는 세 배우, 이우람, 정혜민, 이 청이 각각 소환한, 조순희, 이영숙, 전연수/임연순―전연수의 (시)어머니―이라는 자신들의 어머니를 마주하고 서사를 구성해 분배하는 방식은, 후반 이 셋이 이루는 가족의 방식과 토대에 대한 탐구로 선회한다. 이는 아마도 연극의 실질적 출발점이 ‘엄마’가 아닌, 그것을 모티브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합의에 이른 세 배우의 관계성에 있음이 착안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순희, 영숙, 연수-ㄴ’은 우람, 혜민, 청으로 다시 바꾸어 쓸 수 있을 텐데, 이 셋이 자신들의 엄마에 다가가고자 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건 이들 자신으로, 또 그 과정에서 논의와 실천을 함께 하는 작업 공동..
-
극단 빨강도마뱀, 〈먹태깡에 대한 명상〉: 세계로의 확장, 그리고 내면으로의 재반환REVIEW/Theater 2025. 10. 20. 16:09
극단 빨강도마뱀의 〈먹태깡에 대한 명상〉은 먹태깡의 주요한 원물(元物) 하나 하나를찾아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다섯 명의 배우를 포함한 창작의 과정 자체이기도 한 점은, 5장을 한 명의 배우가 각각 한 장씩 주도하여 전개하는 규칙 안에서 자기 지시성을 띤 발화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특징은 역할이 따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만드는 과정 안에서 본래적 자기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연극의 한 예시로 드러난다. 먹태깡의 원물들은 이들이 리서치와 답사를 통해 찾아 나서는 시도 안에서 조명되게 되는데, 이는 명태, 밀가루, 설탕, 시즈닝, 팜유 순으로 진행된다. 이 원물의 여정, 그것이 과자 한 봉지에 담기기 위한 이동의 경로는 미국의 세계적인 초대형 기업 카길을 인터넷 지도상에서 연..
-
이성직,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안티고네』라는 매개REVIEW/Theater 2025. 10. 19. 22:57
이성직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착생 식물이 공간 전체를 장식하는 하나의 무대가 되는 환경 아래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안티고네의 서사를 파편적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이는 안티고네와 착생 식물의 형태소 차원에서 언어적 분절과 재조합을 통해 두 개의 단어가 갈라지며 주렁주렁 하나의 신체로 기이하게 엮이는, 또는 환유되는 명명에 대한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안티고네를 착생 식물로 비유하는 하나의 착안이 전제되며, 이 같은 명명은 두 사람의 시차를 둔 두 단어에 대한 호명으로도 볼 수 있을 텐데, 〈착생 안티 식물 고네〉에는 공교롭게 두 명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이 둘은 희곡을 다만 읽어낼 뿐이다. 반면, “안티고네”는 따로 있는데, 그는 처음 중앙의 착생 식물로부터 떨어지는 ..
-
이수민 작,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 여성에게 허락된 의무(?!)REVIEW/Theater 2025. 10. 19. 21:45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는 가슴 재건 수술을 1년 앞둔 여성 문솔의 경험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방식을 택한다. 작가의 자전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 공연은 유방암에서 실리콘 가슴 재건 수술로 이어지는 단계를 필연적인 옵션으로 선택하고 마는 여성의 신체적 경험의 특수성 ‘너머’ 사회적 시선의 작용을 파고드는데, 이는 가슴을 가진 매력적인 신체의 여성이라는 상징 언어와 문솔의 꿈을 지배하는 상상적 영역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상응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문솔이 꾸는 꿈은 현실의 영역만큼, 그 이상으로 그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반영되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얽힌 꿈은 무의식적이라도 분명히 신체 체현적인 무엇으로, 상상계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거꾸로 상징계의 이데올로기 작용과 결부된 실제적인 정..
-
〈산재일기〉: ‘그들’을 불러오는 방식들REVIEW/Theater 2025. 10. 19. 21:37
〈산재일기〉는 각종 산업 재해의 피해자들, 그 주변의 여러 이해 당사자 및 관계자 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다. 소속 및 지위가 함께 표기된 이들의 이름이 극장 전면에 띄워져 있고, 암전과 함께 나타나는, “2,080 / 122,713”은 2021년 산업재해 사망자 수와 재해자 수로, 산재보험을 받은 인구, 법망의 테두리 안에서 등록된 인구에 해당한다. 〈산재일기〉는 이 숫자의 바깥을 향하는 동시에 이 숫자 자체를 비판하는데, 전자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을 수많은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을 하나의 범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후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그 존재들의 발화를 경유해 이 숫자의 다분한 관념성과 피상성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숫자가 무언가를 확인시키면서 다른 많은 것을 (내용적으로 그..
-
공놀이클럽, 〈클뤼타임네스트라〉: 현실과 연극의 변증법적 유희REVIEW/Theater 2025. 10. 19. 21:26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연극을 만드는 존재들, 작가, 배우, 작가이자 연출 등이 중심인물이 되며, 이를 현재 연극 제도의 현실과 결부 짓는다. 이를 통해 연극 바깥의 현 정치 상황들과 직접 연루되는 현실의 고유명사들 역시 개입할 여지를 현실화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단지 현실에 상응하는 사례라는 효과를 주는 데 가까운데, 여기서 나아가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삶 속에 깊이 연루된 연극에서 다시 삶과 연극의 경계를 모호한 것으로 반죽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는 연극을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을 사는 것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연극 제도가 아닌, (그것을 표층으로 만들며) 연극이라는 이상향을 극단적으로 좇는 중심인물들의 행위가 현실을 비집고 나오는 순간들을 만들..
-
팀 머구리,〈북/치기/박치기 : 아마도 이건 북어 이야기?〉: 현실로의 서사를 완수하는 북어의 주체적 미션에 대하여REVIEW/Theater 2025. 8. 20. 22:48
〈북/치기/박치기 : 아마도 이건 북어 이야기?〉(이하 〈북어〉)는 액막이 북어의 자기소개 이후, 자발적 백수를 택한 영동이의 자취방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10년간 자신의 집에 걸려 있던 액막이 북어가 없어지고 난 뒤 겪은 불행들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액막이 북어를 찾는 영동이의 여정은, 바다를 찾아 떠난 액막이 북어와 배송 중 사고로 이탈한 동태 한 마리의 여정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특이한 장소 안에 머물게 되면서 새로운 공동의 탐험이 요청된다. 그리고 이 비선형의, 삐뚤빼뚤한 여정의 그늘진 서사는 그 처음의 시작으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곧 그 어둠의 캄캄한 방의 고립된 공기, 그것에서부터 가능한 건 또는 그 안에서 예외적으로 유동적인 건 상상력의 일환일 것이라는 점을 반..
-
적극,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 광주는 (어떻게) 흐를 수 있는가REVIEW/Theater 2025. 8. 20. 22:42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에서 연극의 등장과 퇴장은 설치와 철수의 절차로 바뀐다. 오브제와 한 몸으로 또는 오브제를 다루는 이들의 등장과 퇴장, 곧 이들이 오브제를 가져오고 또 가져감에 따라, 사물-신체들은 일시적이고 임시적 것이 된다. 그사이에는 천지창조의 7일과 안식일, 그리고 종말 7일을 지정하는 자막의 언어가 투사된다. 곧 〈어디로나 흐르는 광주〉는 각기 다른 장면, 이미지들을 넘겨보는 것, 그 같은 이미지들이 생겨나고 수거되는 데 따르는 행위들을 보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극장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퍼포머들은 스태프처럼 곧추 세운 신체들로 전력 질주로 공간을 활보해야 한다. 이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사유하고 감각하기 위한 이미지들의 무덤으로서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작은 소실점들의..
-
공놀이클럽,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퀴어라는 세계/설렘의 입구 혹은 시작REVIEW/Theater 2025. 7. 30. 23:27
공놀이클럽의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이하 〈말린 고추〉)은 소시민 가족의 한 전형으로부터 퀴어와 페미니즘의 의제를 길어 올리고 맞세운다. 이는 각각 서울대 사범대학을 휴학 중인 규빈과 그의 동생 재수생 은빈에 해당하며, 이 둘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욕망 실현을 위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질서 아래 자신들만의 비밀을 은밀한 것으로 둔다. 그 질서를 지키거나 승인하기보다 그 아래 또 다른 삶의 지층을 전개하는 것이다. 은빈의 시점에서 가족의 모습이 그려지고,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지닌 오빠 규빈의 비밀이 은빈의 삶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은빈의 은밀한 기호로 연장된다. 오빠는 그 전과 같이 남성으로 대별되어야 하고, 자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유예되어야 하는 사실이 된다. 규빈이 할머니의 가부장적 ..
-
김상훈 작, 박해성 연출, 〈러브미투마로우〉: 고정적인 것으로부터 유동적인 것을 추출해 내기REVIEW/Theater 2025. 7. 15. 18:05
〈러브미투마로우〉에서 과잉된 무대 장치, 곧 무대 위에 놓인 비석 구조물들은 복잡한 지형지물의 한 전경으로 묶이는 대신, 편재된 비동시성의 동시성 아래 각각의 자리로 할당된다. 이 하나의 터전 아래 상응되는 유사성의 한 계열들―구조물들―은 하나의 매끈한 장면으로 처리되기에는 과포화된 상태로서 무대를 가로막고 제한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그 일부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거주하며, 그 구조물들로부터 발화하며 생성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물론 제약 조건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창발의 노드들에 가깝다). (시간적) 분할들과 (공간적) 배치들의 연극, 곧 내용적 단위의 분할들의 공간적 접착으로서 배치들, 그리고 반복으로 거듭나고 회수되는, 그보다 회수되며 거듭나는 이 연극은, 부분들, 단위들이 서로와 접합되어 놓이며,..
-
이예본 작가, 극단Y: 〈로비: 기어코 그 손을 잡고〉: 공백을 향하는 응시의 손길REVIEW/Theater 2025. 7. 15. 17:41
〈로비: 기어코 그 손을 잡고〉(이하 〈로비〉)는 청소노동자의 노동 행위와 산재 사고로 죽음을 맞은 이의 유가족의 팻말 시위가 겹쳐지는 하나의 지대를 로비로 제시한다. 이는 중앙의 직육면체의 프레임 안에 숫자를 표시하는 상단의 LED 문자가 엘리베이터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과 함께, 고층 건물의 수평적, 수직적 차원에서의 직선의 선분이 각각 펼쳐지고 확산되는 것으로 상상된다. 또한 로비는 일종의 인트로에 해당하는, 〈로비〉의 등장인물들이 무더기로 지나가는 짧은 장면으로써 무정형의 사람들이, 보통의 바쁜 현대인이 냉랭하게 또는 생기 없이 지나가는 특색 없는 통로를 나타내며, 무엇보다 이를 생계의 차원으로 전유하는 복희(한혜진 배우)의 존재가 이곳을 가장 먼저 그의 삶의 일부로서 주요하게 점유한다. 이 수평..
-
음이온(김상훈 연출),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 재현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주체들REVIEW/Theater 2025. 3. 12. 00:11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이하 〈서대문구〉)은 제목과 같이, 전면에 내세운 특정 관객층을 대리한다는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는 타자의 시점과 욕망을 향한 매개의 윤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대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자 결과이면서, 일종의 연극을 하는 것의 명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욕망은 창작자의 도덕에 온전히 혹은 완전히 잠식될 수 있는가. 여기서 타자를 향한 도덕은 자신의 내재적 윤리에 부합할 수 있는가. 〈서대문구〉는 이러한 대리자의 지위로서 어떤 것을 성취하려 하는가. 아니 성취할 수 있을까. 100초 단위의 재현 질서의 토대가 되는 50개의 설문 아카이브는 불특정한 고유한 개인들의 욕망에 대한 목록과 특정 집단의 공통된 지점이 산출되는 지역 문화적 인류지 사이에 자리한다. ..
-
이무기 프로젝트, 〈이태원 트랜스젠더-클럽 2F〉: 존재들의 성좌, 그리고 진동REVIEW/Theater 2025. 3. 11. 23:46
이무기 프로젝트의 〈이태원 트랜스젠더-클럽 2F〉에서 색자, 미래, 미란, 세 등장인물은 트랜스젠더 클럽의 초창기를 연 대표적인 세 개의 클럽, 1978년 열매, 보카치오, 1984년 여보클럽의 시작을 알리며 등장한다. 세 명의 존재는 연표적 기입을 통해 그 공간을 대표하게 된다. 곧 그 공간을 존재에 일임하면서 역사의 기원을 선취하는데, 공간의 개별 역사적 특징을 기록하는 대신에 존재의 서사를 체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 존재는 그 스스로를 정의하기보다는 다른 공통 존재의 식별에 의해 기입되며 “언니” 혹은 “이년/저년”이라는 호명에 의해 세계의 일원이 된다. ‘미래’가 경험한, 구별 짓기의 시선에 의해 세계 바깥으로 밀어내는 또 다른 식별의 행위 바깥에서, 그러한 호명을 통한 수렴, 구분 짓기는..
-
동이향 작/이인수 연출, 〈간과 강〉: 언어의 꿈과 해제REVIEW/Theater 2025. 3. 11. 23:29
〈간과 강〉은 증상과 징후로 가득하다. 재앙과 종말의 기후와 분위기가 몸에 치밀어오르고 파고드는 주인공 L의 증상은 ‘간과 강’이라는 각각 몸의 장기 일부라는 개체의 내장 감각과 흐르고 흘러가는 것으로서 인류에 내속되는 역사적 힘에 대한 이미지, 그 두 단어의 유사성의 결합이 지닌 어떤 양상에 상응한다. L은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질병에 걸려 있으며, 그것은 〈간과 강〉이 쌓아갈 언어의 세계가 언어를 정초하고 언어의 사이를 매만지고 헤집는 과정으로서 존재함의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 이 언어는 대중문화적 재현을 경유한, 도시의 풍광 이미지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지되는데, 언어의 토대를 불확실한 것, 아니 부조리한 차원으로 이끌고 가는 차원에서, 현실의 빈틈을 메워 현실의 토대를 무의식적인 진공의 토대로 연..
-
조음기관, 《기존의 인형들》: 인형이라는 물질로부터…REVIEW/Theater 2025. 3. 4. 22:39
《기존의 인형들》은 인형이라는 사물 혹은 대상으로부터 되먹임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문을 전제한다. 작년 낭독 쇼케이스에 이어 이번에 본 공연으로 오른 ‘인형의 텍스트’라는 부제로 열린, 세 번째 ‘기존의 인형들’은 그동안 세 명의 작업자들과 함께해 왔으며,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기존’의 인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각의 출발점을 예비한다. 인형의 텍스트는 또한 인형으로부터의 텍스트이기도 한데, 이 두 사이에서, 세 개의 극작이 이루어졌다. 이는 인형의 존재론을 쓰는 일로 이어진다. 인형의 존재론은 곧 언어와 서사의 형상을 새롭게 정초하는 하나의 단초로(〈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 로봇(인형)과 인간(만)의 의사소통의 관계가 상정되는 시기에 대한 상상으로(〈범..
-
밀로 라우, 〈에브리우먼〉: 극장, 죽음, 공동체REVIEW/Theater 2024. 6. 5. 19:00
〈에브리우먼〉은 무대에 홀로 현존하는, 배우 우르시나 라르디의 전적인 매개의 위치를 상정하며, 스크린의 영상을 병치시키되 이 역시 라르디의 신체를 경유하여 재생한다. 〈에브리우먼〉은 휴고 폰 호프만스탈의 『예더만』을 가져오되(“예더만”은 ‘모든’과 ‘사람’이 합성된 하나의 단어로서, ‘누구든지’, ‘모두 다’라는 이 단어에서 영어로 man에 해당하는 부분을 woman으로 바꾼 제목이 〈에브리우먼〉인 셈이다.), 헬가 베다우라는 시한부 선고를 맞은 현재적 인물을 겹쳐 놓음으로써 죽음이라는 알레고리를 도덕적인 교훈극이 아닌, 하나의 수행사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한다. 처음에 나오는 음악은 라르디가 카세트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르자 사라진다. 이는 라르디의 바깥에서의 제어가 아닌, 무대..
-
김상훈, 작/연출, 〈히라타 오리자를 위한 유튜브 스크립트〉: 발화가 아닌 발설의 장면들REVIEW/Theater 2024. 6. 5. 18:56
〈히라타 오리자를 위한 유튜브 스크립트〉(이하 〈히라타 오리자〉)는 제목과 같이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이론을 소개하는 유튜브 스크립트를 짜려는 유튜버를 보여준다. 연습과 중계의 어느 사이에 자리한 그의 행위는 관객을 느슨한 혹은 타격감을 잃은 시청자-관객으로 연루시킨다. “세미 퍼블릭”이라는 히라타 오리자의 용어는 시종일관 머뭇거리며 웅얼거리는 전혜인의 화법에 의해 그의 신체로부터 난반사되는데, 내부를 매개하는 외부의 출입이 가능한 특정 시-공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세미 퍼블릭의 시간이 일차적으로 그것을 전달하려는 자의 불확정적인 상태에서부터 덜그럭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사적 영역은 제4의 벽에 가로막혀 보이지만, 그의 입지는 분명 공적인 사태라는 판단에 근거한다. 사실 그가..
-
정유진 작/연출,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미시사적 기술과 재현이 접근하는 역사REVIEW/Theater 2024. 6. 5. 18:29
‘역사시비’ 프로젝트에서 카메라의 실시간 포착과 화면 중계는 기본 전제가 되는데, 이는 행위의 현재진행형의 수행성을 지시한다. 역사의 시비를 가린다는 건, 현재로 소급된 역사에 대한 관점을 진단함을 의미한다.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이를 다시 개인의 몸들과 연관을 지어 다룬다. 그 방편은 미시사적인 기술이거나 인식 체계의 정형성과 관습성을 깨뜨리는 것인데, 이 둘은 상호 연결된다. 이를 통해 역사의 미세한 틈을, 관점의 차이에 의해, 미시사적 개인의 몸을 통해 벌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작가의 휘어진 척추의 X-레이 사진은 보이지 않는 신체의 유물론적 역사성을 전제한다. 거기에는 누적된 시간의 무게가 있다. 이러한 시선은 배우와는 다른 위상으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기다려〉: 배우 혹은 언어의 존재론REVIEW/Theater 2024. 2. 5. 20:00
〈.기다려〉는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한 윤리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제도 비평적인 작업이며, 연극이 시작되는 물리적 경계를 관객의 승인 아래 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윤리를 확언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연극이 시작되는 건 누군가가 화장실에 모두 다녀온 후에 시작된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의 안전수칙 공지와 배리어 프리 버전의 설명은 연극을 순전히 대체하고, 그 비가시적인 ‘모두’에 대한 재현으로 향한다. 연극의 태도와 정신이 연극을 지배한다. 올바른 연극이 (시작)되기 위해서 필요한 도덕적인 혐의 차원의 언어는 극단적인 과잉을 향해 감으로써 비로소 순수한 형식으로서 연극의 내용이 된다. 기어이 한 명의 배우는 화장실에 갔다 옴을 보여준다. 연극이 현실의 시간을 끌어들인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작위적인 장..
-
〈러브 앤 인포메이션〉: 재현 체계 혹은 재현 방식의 사이에서REVIEW/Theater 2023. 12. 11. 17:25
〈러브 앤 인포메이션〉은 짧은 에피소드로 점철된다. 맥락을 형성하는 인지 단위로서의 불충분성이라는 하나의 공통됨은 정보의 과잉들 혹은 그로 인한 소통의 단절 현상을 묘사하는 메타포라고 의미화할 수 있을까. 그것이 쇼츠건 릴스건 어떤 짧은 구문의 재기발랄함으로 부상하는 즉시 사라지는 이미지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떤 유의미한 지점으로 부상하는가. 시대에 관한 적확한 차원의 은유로서 나아가 극장의 공백이 불가능해지는 임계점에 대한 탐문으로서? 〈러브 앤 인포메이션〉은 일종의 ‘지시’로서 장면들이 추출됨으로써 이입에 대한 당위를 벗어난다고 할 때 그와 같은 나열의 방식은, 희미한 맥락들의 접합까지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미궁이라기보다 미로로서 작품은 일종의 퍼즐과 동기화된다. 등장인물들은 기억에 대한 불확실..
-
성다인, 〈beingbeingbeing〉: ‘극장이라는 어떤 규칙’REVIEW/Theater 2023. 11. 24. 00:17
연극 〈beingbeingbeing〉은 극장의 입구를 끊임없이 더듬는다, 극장이 시작되고 다시 시작됨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들며 출구를 부정하는 지시를 통해. 작업은 극장에 대한 탐문으로 자리한다. 이념적인 차원에서 메타-극장을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극장에 갇힌, 또는 닫힌 극장에 놓인 인격들의 무한 반복의 관념과 상념이 또한 있다는 점에서, 해소되지 않은 원환 감정의 고리를 이루는, 일종의 부조리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자리하는 극장을 보여주는 한편, 인격들은 극장 관계자이자 극장 바깥의 역할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제도적 차원의 메타포 역시 소환한다. 결과적으로 이 셋, 아리(박하늘 배우), 마지(이우람 배우), 사키(백소정 배우)은 무형적이고 유령적인 캐릭터로 읽히지만..
-
이경성, 〈세 개의 짧은 연작들-신촌텍스트, 빨치산, 나의 극장〉: 주체의 공백에 다가서기REVIEW/Theater 2023. 11. 23. 23:10
이경성의 〈세 개의 짧은 연작들-신촌텍스트, 빨치산, 나의 극장〉(이하 〈나의 극장〉)은 담백하고 대담하게 연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는 프로덕션이 가진 부피감과 완성도에 대한 강박 너머, 결국 개인의 서사와 수행이 역사와 현재, 현실과 만나 전면에 등장할 때 그 효과가 만듦새를 뛰어넘어 입체적으로 확장, 증폭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곧 작가-연출가로서의 관점이 다른 모든 여타의 것들을 상쇄할 수 있고, 더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이는 구자하 연출에 대한 상찬이 그가 여타의 모든 것을 자신이 한다는 것, 테크니션으로서의 성취만을 향하는 것이 오류인 것에 상응한다. “신촌텍스트”, “빨치산”, “나의 극장”의 순으로 진행되는, 〈나의 극장〉에서 이 세 개의 단어는 각각 현실의 표층, 역사의 비가시..
-
김우옥, 〈겹괴기담〉: 구조는 서사의 바깥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REVIEW/Theater 2023. 11. 15. 17:27
〈겹괴기담〉의 대칭으로 서로 마주 보는 객석의 구조는 공연의 바라보기의 방식을 절대적으로 규정한다. 여기에 여섯 개의 샤막(=겹)은 다섯 개의 앞뒤 공간을 만든다. 이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관객은 마주하기보다 바라보게 된다. 단속적으로 꺼졌다 켜지는 조명과 음악에 따라 그것들은 일종의 분절된 그림들의 연결로 감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 체제와 반복되는 구조의 형식 아래 유사하지만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두 이야기 모두 가장 바깥쪽에서 시작되며 따라서 먼 쪽의 이야기는 가까워지고 가까운 쪽의 이야기는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가 마침내 교차되며 두 이야기가 사실 다르지만 하나의 실재로서 맞물리는 것임을 그야말로 고스란히 보여준다. 첫 등장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이와 ..
-
구자하, 〈Cuckoo〉: 압력 사회를 바라보는 법REVIEW/Theater 2023. 11. 15. 16:45
구자하의 〈Cuckoo〉는 압력밥솥 브랜드 “쿠쿠”를 전면에 내세운다. 쿠쿠를 존재화한다. 무대에는 세 개의 쿠쿠가 있고, 두 개는 해킹돼 두 다른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쿠쿠에 체현된다. 나머지 말을 하지 못하는, 하나의 쿠쿠 밥솥이 밥을 하는 과정은 한국 사회에 관한 비유, “압력사회”를 재현하지만, 유학 시절 한국에서 가져갔던, 쿠쿠의 상투적인 멘트는 구자하에게 친구 혹은 동반자의 감정을 체현했었을 것이다. 그것이 구자하라는 인물만에 대한 것임이 아님에도 그 멘트는 오직 ‘구자하’만을 경유하기에, 이것은 타지에 온 이에게 들리는 듣기 쉽지 않은 모국어이기에 구자하에게는 매우 특별한 것이 된다. 구자하의 하마티아 3부작 중 하나이자 가장 앞서서 만들어진 〈Cuckoo〉는 다른 두 작업과 마찬가지로, 한국..
-
구자하, 〈롤링 앤 롤링 Lolling and Rolling〉: 한국 사회의 어떤 역사REVIEW/Theater 2023. 11. 15. 16:36
〈롤링 앤 롤링〉은 한국 사회에 자리한 영어 교육 강박이라는 무의식을 포착한다. 이는 직접적인 사회 비판이나 풍자로 부상하기보다는 사적 이야기의 맥락 아래 가라앉는다. 후자를 성립시키는 건 자못 비장하고 우울한 구자하의 퍼포머로서의 태도이다. 유럽에 갔을 때 첫 번째 자신의 영어 선생과의 격의 없는 친구와도 같은 관계는 구자하의 경험이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상 미시적이고 잉여적인 부분으로 보이며, 나아가 극의 주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주는 안온함은 영어 강박을 앓는 한국인의 의식을 대체한다. 곧 한국 사회라는 상징계를 벗어남으로 인해 얻는 어떤 인지의 영역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과의 차별화된 기호를 산출한다. 중요한 건 인지의 영역이 아닌, 비-한국 사회에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
-
구자하, 〈한국 연극의 역사 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 슬픈 한국(연극)인의 초상REVIEW/Theater 2023. 11. 15. 16:21
〈한국 연극의 역사〉는 제목 “한국 연극의 역사”를 재현하기보다는 지시한다. 서구 연극을 차용하고 모방하며 형성된 표층과 근저의 욕망으로 점철된 ‘한국 연극의 역사’로부터 그 바깥의 전통의 형식을 소환한다. 곧 구자하는 우선 “한국 연극의 역사”와 ‘한국 연극의 쓰이지 않은 역사’ 또는 ‘진짜 한국 연극(이어야 할 것)’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세운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지나친다, 각각 배제하고 아득한 것으로 두며. ‘진짜’라 함은 가치 판단의 범주가 아닌, 연극의 말미에서 제시되듯 ‘역사가 다르게 쓰였더라면’, ‘역사가 다르게 시작되었더라면’의 전제에서 출현하는 자연스러움의 범주이다. 곧 자연스럽지 않음의 현재가 아닌, 그 이전의 역사가 계승되어왔었을 시의 자연스러움이 ‘진짜’에 속한다. 물론 역사는..
-
프랑크 비그루 Franck Vigroux, 〈플레시 Flesh〉: 분투하는 어떤 몸들 또는 매체들REVIEW/Theater 2023. 11. 15. 16:03
〈플레시〉는 극장에서의 시지각적 환경을 창출하기 위한 조건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이미지로 덮이고 사운드에 휘감기는 경험이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언어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프로젝션을 통한 이미지는 촘촘하게 극장 전면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그것이 걷히고 무대가 드러났을 때 이 공간이 큐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사운드라는 존재가 무대의 빈 곳에 달라붙기보다는 포화된 상태로 공간을 만든다고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과잉된 집적의 경제를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면, 관객은 양적인 증폭의 흐름에 어떤 종류의 이음매를 모두 지우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결과를 단지 수용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입체 서라운드 시스템의 극장용 버전으로서 존재하는 작업의 특징이 가장 우선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