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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 <죽고 싶지 않아>:청소년극의 불안정한 좌표
    REVIEW/Dance 2016. 6. 27. 01:45

     <죽고 싶지 않아> 공연 사진[=국립극단 제공]

     

    청소년극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청소년을 소재로 하여 청소년을 향한 이야기를 하며 청년으로부터의 시선을 창출한다, 정도가 될까. 절반이 노출된 정육면체 검은 큐브의 4면은 칠판을 대신해 빼곡이 낙서가 자리한다. 이는 복잡한 청소년의 머릿속을 은유하는데, 곧 정리되지 않은 분열된 언어의 카오스에 휩싸인, 온전한 신체가 아닌 오로지 가득 찬 머리를 가진 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공적 공간의 형상화인 셈이다. 이는 한편으로 초반에 교실로 자리하는데, 빠르게 가속하는 일과의 여정이 적당한 춤으로 재현된다. 여기서 '적당한'이란 춤의 테크닉을 현실적 몸짓으로 다듬어 내는 일이다. 재현과 표현의 중간쯤에 위치한, 곧 현실의 묘사를 통한 공감과 춤이란 예술의 폭력이 주는 불가능한 소통의 중간에서 극은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는 구성을 취하는데, 어쩌면 청소년의 이해와 청소년에 대한 이해 사이에서 청소년을 재현하는 한편 청소년을 이해시키려는 초반의 노력은, 예술로서 춤을 처음 접하며 그냥 하나의 관객으로 구성되어 가면서, 실상 의도되지 않은, 실은 건강한 청소년극의 외양이 하나의 타협점 정도였음을 드러내는 식으로 극은 급격하게 이탈한다.


    청소년, 아니 청소년의 뇌를 이해하는 뇌과학적인 설명은, 반쪽 뇌를 가진 청소년에 대한 이해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소셜 브레인이라는, 아마 사회적 뇌쯤으로 번역 가능한 개념을 설파하며 그들을 단지 지켜봐주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청소년 스스로를, 또 그를 타자로 보는 그 밖에 우리를 납득시키고자 하는데, 이는 움직임을 적절히 더해 분절된 언어로 효과적인 렉처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이 극을 '탄츠 테아터'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유효하다는 게 프로그램의 송현민 평론가의 의견인 셈인데, 이 극이 탄츠 테아터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음은 차치하고, 우선 안무가가 (연)극을 만들 때 그것이 연극임을 입증하기 위한 구실로, 탄츠 테아터라는 연극+춤의 접점임을 주장하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며, 역설적으로 탄츠 테아터는 춤의 계보로 묶이는 편이지 연극의 계보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간과되는 듯하다. 곧 연극으로 묶기 위한 편의적 개념의 잘못된 이해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전체와는 이격되는 겨우 잠깐의 움직임과 말이 어떻게 탄츠 테아터임을 담보하겠는가.


    이 극은 전반적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뿐 뮤지컬의 과잉된 움직임과 언어를 통한 재현 양상과 꽤나 비슷한데, 중고등학교 정도의 남녀 커플이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의 현격한 상투적 차이를 재현하며 기성 발레 동작의 캐릭터들을 우스꽝스럽게 전유한 긴 부분 같은 과잉된 잉여의 부분들은 특히나 더 그러하며, 무슨 의도로 넣었는지가 심히 의심스러운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결코 탄츠 테아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극은 전반적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뿐 뮤지컬의 과잉된 움직임과 언어를 통한 재현 양상과 꽤나 비슷한데, 중고등학교 정도의 남녀 커플이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의 현격한 상투적 차이를 재현하며 기성 발레 동작의 캐릭터들을 우스꽝스럽게 전유한 긴 부분 같은 과잉된 잉여의 부분들은 특히나 더 그러하며, 무슨 의도로 넣었는지가 심히 의심스러운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결코 탄츠 테아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그러한 동작들에서 철저히 보여주기 위한 방식, 우리의 시선에 바로 맞닿으며 어떤 거리 두기 자체를 불가능하게끔 밀어붙이는, 무화된 시선의 관람자를 창출하고자 하는데, 그래서 재현의 이질을 통한 현실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나 어떤 지적 이해에 대한 춤-언어의 초반 감행은 매우 무력한 지점에 허우적대게 된다.


    한편으로 청소년을 재현하다 학부모나 고지식한 교감 선생 정도의 외양 정도를 전유하며 쓰여 있던 낙서를 하나하나 읽던 폭력적이고 무식한 어른의 시선으로 대립의 각을 만들어낸 이후 어른들이 한 명씩 등장해 뮤직비디오의 여러 다양한 군상으로 한데 모여 싱크를 맞추는 것 역시 단순히 재미를 위한 배려인지 의아하게 비쳐지는 장면이다. 사실 그에 이어 거친 록의 웃통 벗은 로커를 재현하는 것에서부터 춤의 폭력이 연장되는데, 벌거벗은 근육질의 몸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어느 정도 형태적 유사성을 띤 채 'I'll survive'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익숙한 의지적 지향의 노래를 전유한 데 이어 전혀 내용적인 연관이 되지 않는 춤의 향연이 이어지는데, 그러한 지점에서 청소년이 갖는 매혹은 청소년극이 갖는 특별함이 아닌, 대중매체와 인접하지만 한편으로 그것과 다른 춤이 가진 특별함인데, 이는 여전히 청소년이라는 주체에 맞춰진 지점이라는 점에서는 특별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청소년이라는 호명을 통해서만 극을 보는 청소년이 현상된다는 점에서, 청소년극은 계속 행해질 수밖에 없으며, 청소년극이라는 어떤 압박 속에 극의 새로운 시도, 또 굴절된 창작 작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이 극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그냥 보통 다를 바 없는 춤-사실은 조금 유치하고 정교하지 않은 춤-은 안무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점에서, 청소년을 위한 혜택과 홍보의 포인트를 강조하며 그냥 오르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청소년극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전문가와의 협업, 그리고 텍스트를 수집하고 드라마투르그를 두고 해석의 근거들을 마련하는 등의 연극의 프로세스를 안무가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결국 이질적으로 뒤섞이는 10개의 장이 따로따로 놀며 하나의 안무로 묶이지 않는 불안정한 작품을 만들고 말았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 전문적인 무용수 외에 연극이나 젊은 예술가가 참여해 만드는 가운데 갖는 어떤 싱그러움, 그리고 사실 적절히 춤을 깎아 내 타협 점을 갖고 만든 움직임이 발하는 찰라적 생기 같은 것이 전하는 긍정적 에너지를 부정할 순 없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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