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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보 반 호브 연출 <파운틴헤드>: 질문을 통한 확장과 매개의 극
    REVIEW/Theater 2017. 4. 11. 23:24

    ▲ <파운틴헤드> 한국 공연 장면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백색 공간의 무대는 거대한 실험실 같은 인상을 준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하나의 테이블에 주인공이 위치하여 원작 소설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이, 이 무대는 거대한 단인 동시에, 그것의 연장으로서 일종의 프로시니엄 아치의 경계에 의도적으로 걸친 상태 역시 가져가며 배우의 모습을 관객의 시선에 맞추면서 진행해 간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결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이는 무대는 또 다른 테이블 위의 스크린을 통해 단 아래 테이블을 포함해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건축 도면들과 신문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을 매개한다. 따라서 공간의 물리적 분배와 입체적 증폭 및 가상 미디어적 덧셈을 통해 연극은 무대와의 관계 맺기를 수행한다. 인상적인 실로폰 등의 연주가 대사와 대사 사이에서 대사와 함께 공명한다.

    건축에 대한 신념은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한 철학을 일견 은유하는데, 특히 이는 주인공 하워드 로크의 건축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양식주의적이고 기존 관습을 형식적으로 복제하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데 머무는 로크의 친구인 피터 키팅으로 대변되는 1920년대 고전주의적 건축 양식에 반해, 로크는 재료로의 환원주의적 접근과 기능주의적 디자인, 인간과 공간의 관계 맺음으로부터 확장되는 건축, 곧 내부에서 외부로의 자연스러운 확장을 꾀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을 주장하며 시대적 예외로 자리한다. 이는 처음 그가 읽던 소설의 문장들에서 드러나듯, 그는 재료라는 건축 위에 우뚝 선 고고한 의지의 인간형으로서, 세상과 사회의 도덕과 가치와는 상관없이 개인주의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한 인간에 대한 신념을 나타내는 한 부분이다. 동시에 이는 그의 험난한 삶에 대한 어두운 징후를 예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그의 소신은 마지막에 그와 대립하던 건축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엘스워스 투히와의 논쟁으로 가시화되며 공론장으로 확장된다.

    건축에 대한 이념이 삶의 철학에 대한 알레고리를 형성하듯, 이는 로크가 현실 차원의 문제들과 마주치면서 사회와 개인에 대한 관계, 도덕과 윤리, 사회 시스템과 건축(예술)의 자율성으로 번져 간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율적인 개체상이 예술 일반의 표현의 자유의 측면이 아닌, 수용자의 요구와 편의 등을 반영해야 하는 실제적 쓰임을 갖는 건축에서도 온전히 가능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로크에 대한 물음보다는 곧 극 내재적인 측면을 향하기보다는 로크와 투히로 대변되는 두 사람의 의견에서 변증법적인 질문을 도출하는 관객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이 극은 단순히 인물에 대한 이해나 공감, 스토리텔링 자체에 대한 유인을 충족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 현재형의 질문으로 극을 초과한다. 극은 극의 내재적 측면의 이해로 소급되는 대신, 이를 극의 외부라 오해되곤 하는 관객에게 질문으로 남겨둔다.

    건축과 함께 사회의 구조적인 동력과 표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담론적 장치는 바로 거대 뉴욕 신문 배너의 회장인 게일 와이낸드로 대변되는 뉴스라는 세계다. 뉴스가 자극적인 세계상으로 미래 없는 인간형의 소모적인 하루하루를 가능케 하며 거꾸로 그에 기식하는 것이라면, 곧 단순 소비자의 지위를 창의적이지 않은 인간 유형의 가십거리에 불과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라면, 이는 궁극적으로는 로크라는 예외적 인간 유형과는 대립되는 지위를 구성한다. 곧 건축이 로크라는 자율적인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는 장치라면, 뉴스는 당연한 것들의 충격을 제시하고 감내하게 하여 평범한 일상으로 그것을 봉합하는 가운데 개성 없는 대다수 인간 유형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뉴스에, 그러한 뉴스에 대한 소비자에, 그러한 뉴스를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혐오를 간직한 건 와이낸드이며 동시에 그것이 성립하기에 자신은 그것을 지속시킬 뿐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일을 정당화한다. 그에게는 로크라는 인간을 이 사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의 대표인 건축가 가이 프랭컨의 딸 도미니크 프랭컨 역시, 기존 건축에 대한 혐오를 반어적 어법으로 구사하는 가운데, 사회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프랭컨이나 와이낸드에게 로크는 예외적 인간이자 거의 유일한 삶의 지향점이 된다. 로크는 이미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고 흔들리거나 하지 않으며, 이는 법정에서 그의 마지막 최종 변론 형태에서 드러나듯 사회의 여론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바꾸지 않는―자신의 자율적 예술가상의 자유를 부르짖는―것으로도 분명해진다. 이 극이 결정적으로 비극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은, 이 극이 로크의 이야기만이 아닌, 로크를 하나의 질문으로 변환하는 극의 메타적 수행의 동력 때문인데, 이는 한편으로 입체적인 인간 유형들이 갖는 욕망이 오히려 로크에 비해 절대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크가 최종 변론에서 클로즈업된 모습으로 비치는 스크린의 모습에서 커다랗고 푸른 눈이 점유하는 순수에 대한 어떤 매료는, 인물에 대한 공감보다는 모델 그 자체에 대한 측면이 큰데, 극 전반에 있어 오히려 그를 둘러싼 다른 입체적이고 또한 비극적으로 주조되어 가는 인간에 비해 그는 이상주의적 형식과 이념으로 동결되어 있는 데 가깝다.

    마치 뉴스라는 표피 아래 잠재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백 그 자체를 직시케 하는 듯한 그의 눈과 얼굴은, 타자들에 의해 접근되고 완전히 밀착되지 않는 가운데 그 사이에서 오히려 타자들의 욕망과 삶의 구체적 단편들이 확인되는 것이다. 로크는 따라서 모든 인간의 공백이자 극 자체가 향하고 비껴서는 공백과도 같다. 그는 그 스스로 주체가 되기보다 하나의 이념형에 가까우며, 오히려 주변 인물들을 주체의 자리에 다가서게 한다. 그의 독창적인 재능을 평생 시기하고 교활하게 이용하는 키팅과의 관계는 역으로 보자면, 와이낸드가 범속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에 굴복하게 하는 와이낸드와 같이, 로크가 키팅의 설계를 여러 차례 대신 해주면서 오히려 키팅이 표면적으로 좇는 명성과 지위를 얻는 대가로 자신의 가짜 삶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악마적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키팅과의 관계는 독자적인 인간상으로서는 유일하게 그가 사회와 맺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재현으로서 건축, 대중의 욕망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창조하는 건축,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시대를 비껴나며 얻는 새로움의 건축을 추구함은 키팅의 두 차례 건축 공모의 콘셉트에 맞춰 현실과 절충주의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로크의 공백이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한 장면은, 키팅의 첫 번째 건축 공모를 위한 설계를 대신할 때의 표정이다. 키팅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자신의 신념을 굴절시켜 키팅에게 투영하는 장면. 거기서부터 사회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기로 한 로크의 결단이 성립한다. 도미니크의 순수와 그로 인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경멸은, 신분과 계층으로 분절되는 사회와 창조적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고립된 처지에 대한 분노의 로크와 절합한다. 로크가 채석장에서 일하며 도미니크를 마주하고 그녀를 범하는 것 같은 장면은―로크와 도미니크는 서로의 심연을 마주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폭력적 사건으로 출현하며 부자연스럽게 삽입된다. 일차적인 창조자가 아닌, 극의 언어를 빌리자면, '발명가'가 아닌 해석자로서 도미니크는 로크와 사회의 만남을 차단하고 사회가 스스로의 기만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만적 표면에 속을 수 있도록 키팅에게 건축 의뢰를 전한다―그 전에 도미니크는 키팅과 결혼을 선언했고 기만적인 계약 관계로서 결혼을 선택한다. 그것은 극에서 굳이 제시되지 않지만, 기존의 것의 차용과 흉내 내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로크 주위를 맴돌면서 그를 사회와 차단시키고 사회적 파면과 파멸을 부추기면서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도미니크의 모습은 일견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그런 불가해한 인물 군상으로서 와이낸드와 함께 도미니크는 로크라는 공백을 향해 있다. 로크가 지은 스토더드 신전이 신의 자리에 인간의 자리를 세운 '신성모독'적인 건축인 것과 같이, 로크의 사상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시대에서 차라리 로크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도미니크가 자신의 경멸 속에 은신함을 선택했다면, 와이낸드는 마찬가지로 로크에 대한 신념을 갖지만, 극단적으로 배너를 통해 로크를 옹호하며 표면의 거짓들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 신념을 예외적 진리를 드러내는 로크의 이념으로 대치하고자 하며 자신의 지난 경멸을 철회한다. 하지만 자신을, 사회를 기만한 대가는 모두의 파면 혹은 파멸이다. 와이낸드는 주주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한편 도미니크의 와이낸드와 두 번째로 결혼한 이후 와이낸드의 '섬'에 갇혀 있다 돌연 추락한다. 이는 로크의 설계를 대신 제출해 선정된 코틀란드 공공임대주택의 폭파에 대한 충격을 상쇄하는 그에 앞선 파국의 징후이자 증거물 같은 느낌을 주는데, 물론 그에 대한 심리적 동기는 복잡다단하지만, 일련의 뒤따르는 사건들을 선취한 것에 가깝다고 보인다. 

    사실상 사실주의적 심리 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운 듯한 극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두 번의 끝 사이에 담론을 이끌어내는 로크와 투히의 변론 장면이다. 갑작스런 '끝'의 고지가 연극 자체에 대한 실재의 부상으로 다가온다면, 0으로 멈춰 있던, 지속되던 무대 뒤편 전자시계가 작동을 시작하고, 이어 자율적 창조자로서 발명가를 옹호하는 로크와 신호등을 예로 드는 것과 함께 사회의 안정적인 질서 체계가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전제적 통제와 전체적인 합의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투히의 변론이, 제4의 벽을 넘어―이를 위해 프로시니엄 아치 밑을 무대로 활용하거나 스크린으로 무대를 확장하는 등의 수행이 따른다―관객을 마주하고 직접 발언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곧 등장인물로 역할을 두는 대신, 극 바깥으로 그들을 끄집어내며, 두 개의 이념형으로 승화해 관객을 대면하고 관객에게 질문을 수여한다. 그리고 멈춘 시계는 "04:33"이라는 건 존 케이지의 동명의 시간/제목을 상정하며, 마치 이 무대의 시간이 모든 관객의 소음을 포함한다는 걸 역설하는 듯하다. '무대는 배우의, 역할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다!' 이것은 연극이 관객을 직접 자리 시키는 대신 동시대의 삶의 질문/물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며 관객을 존재케 하는 고도의 수사이자 전략 아니겠는가.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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