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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상현, 《플래시메모리-칼(Carl)》: 전시라는 명명이 붙잡아두는 죽음의 명멸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7. 12. 18. 00:04

    ▲ 하상현 연출, 《플래시메모리-칼(Carl)》 하상현(이하 상동)

    전시는 말과 함께 시작된다(핸드아웃상의 퍼포먼스 <아이소메트릭 내밀기>와 <On & Off>는 그제야 실행된다). 그 전에 신촌극장은 입장과 함께 나눠준 두 장의 텍스트(핸드아웃, <9번째 밤>)와 구석구석 이름 없는 사물들(<죽은 거울(2016.3.7)>, <죽은 거울(2014.12.26)>, <칼(Carl)>)과 벽에 투사된 영상 <수면 중인 칼>을 관객은 더듬더듬 살펴 나간다. 단지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매체들만이 적시/나열된 핸드아웃은, 설치의 (시)공간적 좌표까지 명시(=도면)하지는 않은 채 온전한 전시에 대한 이정표가 되지 못한다.

    전시를 구동하는 건 ‘칼’이란 화자로, 프로젝트로 한쪽 벽면에 투사된 문장들로 나타나는 칼에 의해 설치-이미지는 지시되며 텍스트에 함입된다. 텍스트는 사물을 의미로 지칭한다. 전시의 관람객은 텍스트를 통해 사물을 이미지화하고, 의식의 흐름과 주체성을 획득하며 공연의 관객이 된다. 관객과 사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퍼포머로, 퍼포머는 사물을 의미로 번역한다. 사물은 퍼포머에 의해 사용된다. 칼의 친구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은 여러 차례 퍼포머의 떨림으로 재현된다, 아니 퍼포머의 떨림은 말에 의해 동시적으로 죽음으로 번역된다. 텍스트와 이미지-움직임은 상응하도록 작동한다. 텍스트는 따라서 수행적이다.

    이것들은 왜 전시일까, 아니 전시여야만 할까. 다시 말해 전시라고 명명되었어야 할까. 사실상 극장에 들어서고 여기저기 놓여 있는 사물들은 그저 사물들인데, 핸드아웃에는 그것들을 지시/지정하는 온전한 도면(이라는 예술 제도적 맥락)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의 문장 아래 이것들은 차례차례 지시되면서부터 도면상의 캡션(제목과 그에 관한 설명)들을 ‘용인’하기 시작한다(비로소 지각되면서 무형의 임시적인 캡션이 생겨난다), 시간과 장소의 좌표값에 캡션이 새겨지고 사라진다. 그리고 이 좌표 값을 물리적으로 지시/지정하는 건 퍼포머로, 우리의 시선은 자율적이기보다 퍼포머의 동선에 따른 구성 아래 있다. 이 작업은 무형의 도면을 관객이 인식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전시이다.

    여기서 하나의 속임수란, 하나의 은폐된 지점이란 퍼포머로, 텍스트의 사물에 대한 지시는 사실상 퍼포머를 경유한 것이다. 텍스트는 사물을 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퍼포머는 텍스트로부터 자율적이며, 텍스트는 사물에 맞닿는 퍼포머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텍스트에 묶이게 된다. 이런 텍스트-퍼포머-사물의 결속이 깨어지는 건, 마지막 자막 속의 칼이 관객에게 이별을 외치는 순간 이후에 온전히 무대에 남는, 그보다는 전시가 되는 퍼포머의 몸으로 관객의 시선이 옮겨가게 됐을 때로, 그의 몸은 떨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초의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일까, 또는 죽음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일까, 곧 말이 없는 감각의 순간에. 말이 지시하지 않는 몸, 말을 재현하지 않는 죽어가는 몸을 그제야 보게 되는 것인가. 그 전까지 <9번째 밤>이나 칼의 발화는 죽음을 주로 유예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몸은 사물을 다시 지시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조명에 따라, 곧 사물에 지시된 정보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백을 따라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탈구되지 않는 사물로 지시된다. 나아가 그 말의 잔상 속에서 여전히 ‘죽음’을 또 ‘천사’를 작동시키는 텍스트의 온전한 효력을 통해 그 몸에서 몸이 아닌 텍스트의 잔여를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 ‘퍼포먼스’가 아닌가? 곧 ‘퍼포먼스’라고 지칭되지 않았는가? 가령 퍼포머는 이 말의 효과로부터 진동하며 이 말을 떠나서 해석되지 않는다. 말의 중첩적인 층위, 가령 엎드려 누워 떨고 있는 퍼포머의 어깨에는 천사의 날개가 달려 있는 듯하다, 그는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지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다(이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를 떠올리게 한다. ‘얼굴은 과거를 향하지만, 미래로 밀어내는 폭풍으로 인해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천사.’), 한편 이는 내가 목격하는 친구의 죽음이다.

    작업은 임시적인 시간의 구성에 따른 도면을 꾀한다. 그럼에도 전시는 도면으로 온전히 수렴되지 않는다. 가령 핸드아웃상의 <칼(Carl)>이 ‘칼’이 무대 중앙에 놓인 스펀지 옆의 구부러진 오브제를 지칭하는지, 영상으로 실시간 투사되는 화자를 지칭하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또한 ‘칼’이라는 이름/제목은, 영상 <수면 중인 칼>에서 나오는 실제 칼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지칭됨으로써 우리가 아는 사물로서 ‘칼’이라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가져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며(‘Carl’이라는 영어를 보탬으로써) 모호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벤야민의 천사가 (벤야민의 이름을 빼고) 언급되지만, 실은 윤자영의 작품과 같이 그 인용이 향하는 원래의 맥락이 중요한 건 아니다(하지만 벤야민의 천사를 이 작업이 시작되는 원상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천사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 놓인 어떤 상징에서 나아가, 사물과 실재의 간극을 지시하고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전시와 퍼포먼스의 경계라는 메타포로 기능하게 된다. 퍼포머는 그 진동을 그야말로 육체적 한계로 인해 지속할 수 없다. 죽어 감을 연기(연기)/연기(연기)하는 가운데, 그의 진동이 끝나는/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퍼포머라는 실재의 드러남이 되겠다. 곧 칼의 발화가 사라진 순간은 (죽음을 최초의 목격하는 순간이 아니라) 퍼포머의 물리적 한계라는 실재를 증명하는 순간이 되겠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퍼포머가 죽음의 연기를 실패하는 순간, 퍼포머는 퍼포머의 재현/수행 역량을 잃어버리고 사물이 되면서 전시로 흡수된다. 곧 전시를 완성한다.

    “역사의 천사 (…) 이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 하지만 낙원에서 폭풍이 불어왔다. 폭풍은 천사의 펼쳐진 날개를 부풀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사는 날개를 다시 접을 수 없게 된다. 이 폭풍은 천사가 계속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천사를 떠밀고 있”[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난장, p241;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부록에는 벤야민 스스로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프랑스어판(의 한국어 번역본)이 실려 있는데, 이를 일부 인용했다.]

    ‘달덩이가 몸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포스터 [이미지 제공=신촌극장] 

    ※이 작품은 윤자영 연출의 <Lover's leap>와 함께, ‘달덩이가 몸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이름으로 묶여 <Lover's leap> 이전에 전시/공연되었다. 윤자영 연출의 <Lover's leap>에 대한 필자의 리뷰를 인디언밥(http://indienbob.tistory.com/106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은 이미지가 실재로 드러날 수 잇는가, 가상이 체현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자연스레 읽힌다. 윤자영 연출이 실재와 이미지가 맞물려 가는 시각적 공연을 만들었다면, 하상현 연출은 말의 시간(과 뒤따르는 퍼포머의 시간이 간극을 갖는 가운데 이동에 따라 조직되는) 공간적 전시를 구성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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