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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G아트홀_댄스 엣지] 이선아 <Touch!>: 현혹의 이미지와 몸의 노동 사이에서
    REVIEW/Dance 2013. 5. 16. 02:37

    미시-신체가 만드는 환영적 세계


    ▲ 이선아 <Touch!>, LIG아트홀ㆍ합정 개관기념 공연 댄스 엣지Dance-edge ⓒ 김두영 [사진 제공=LIG아트홀]


    이선아는 스스로로부터 특별한 세계를 파생 그리고 재생시킨다. 손발의 미시적 분배의 장은 미니멀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거시적이라 볼 수도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 자잘한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고 이를 멈춘 커다란 몸통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으로 본다면.


    역으로 손발의 움직임이 각자 하나의 동력을 갖춘 무엇으로, 이것들의 움직임이 상호 작용하며 하나의 세계 속에 머문다는 느낌으로 이 작업을 보지 않는다면, 재미를 얻지 못할 것이다. 곧 하나의 몸이 아닌, 몸통을 제한 부분-신체들, 가령 발가락의 단독적인 움직임과 같은 미시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재생으로 이 작업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영은 무대라는 공간 내에서의 특수한 실재다. 이는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겪어 냄의 문제에 가깝다. 곧 움직이지 않는(그러나 떨리고 있는, 무대에서 잉여로 남는 작동하지 않는 듯한) 몸에 작동되는 의지와 메커니즘까지 우리는 모두 안 상태에서 그 환영적 세계의 진귀함에 혀를 내두르는 셈이다.


    이미지들의 변용태


    어떻게 보면 움직임의 순간들과 자취들로 환영의 탑을 쌓는 여타의 무용과 달리, 이선아의 안무는 정확한 재현과 이미지들의 변용태 자체에 대한 수용을 만들어 낸다.


    가령 두 발을 붙이고 양옆으로 골반을 벌리고 뒤돌아 앉아 공을 들고 아래로 떨어뜨림은 거미와 같은 생물이 알을 낳는 것을 연상시킨다. 일종의 환영성이다. 분절되어 움직이되 이것이 어떤 특정한 움직임의 묘사들로 비춰지며, 그 움직임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얻는 한 순간인 것이다.


    앞선 환영의 감각을 창출하기 위해, 한편으로 이미지의 틀을 주조하기 위해 대칭은 꽤 중요한데 몸통을 그대로 위치시키며 추동하는 에너지를 간직하며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팔‧다리‧손‧발의 움직임 뒤에 보이지 않는 몸통의 힘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또한 데칼코마니 같이 움직임의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측면도 크다. 테이블과 90도로 짝을 이뤄 접힘과 펼침을 조율한다.


    실체적 그림자


    커튼 중앙에서 나오는 영상 이후에 신축성 있는 큰 티를 입고 나옴으로써 앞선 영상에서 커튼 중앙을 열고 얼굴을 희미하게 비치던 것에 이어서 표면과 심층의 형태를 실험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테이블로 옮겨 왔을 때 직선과 곡선의 대비도 만들어 낸다. 


    ‘작은 존재들의 커다란 세계를 만드는 것’에서 ‘기하학적 대칭과 대비의 구도에 몸을 절합시키는 것’으로, 다시 ‘일종의 표정을 지닌 신체, 몸에 특별한 표현의 주름을 만드는 방식’으로 옮아간다.


    꼿꼿이 섰을 때 발레의 기본적 동작과 현존을 상기시키지만 어느새 미시적 분절을 이루는 움직임들로 표정을 만든다. 그야말로 몸은 분절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공간을 펼치고 들어가는 커튼이 이중의 표면을 만드는데, 그림자 뒤의 실체(실루엣)의 뚜렷한 표현과 커튼에 비치는 그림자의 물결로 인해 이중으로 그리고 약간의 시차를 가지고 발생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고, 이 흐름을 이용하며 커튼과 밀착해서 커튼에 또 다른 신체의 무늬를 새긴다.


    ‘움직임에 방해를 주지 않는 연주’는 라이브임에도 의식의 흐름에 미약한 도움을 주는 정도로 나서지 않는다. 음악은 어둠이 사그라질 때까지 곧 완전히 빛이 점멸해 어둠의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는 환영의 소거가 이것이 완벽한 환영이었음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데 가깝다.


    현혹의 이미지와 몸의 노동 사이에서


    앞선 첫 번째 미시적인 움직임들의 환영적 세계와 숨 쉴 틈 없는 집중을 만드는 방식이 지난 그녀 작품에서 주로 선보인 것이었다면, 다양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차원에서 시차적 겹의 발생과 같은 움직임의 생산은 새롭게 선보이는 작업 방식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그녀 작업이 ‘실체의 환영적 변용’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실체를 정교하게 가지고 노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일종의 무대의 클리셰와 같은 환영의 규약으로 끝을 가져간 것은 일견 당연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불가피한 작업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 새로 생겨난 다양한 이미지들이 주는 신선함 외에 그것의 내재적 완성에 대한 강력한 몰입에 대한 요구는 숨을 조이는 느낌도 들었는데, 이 모든 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여전히 어떤 몸이라는 것의 실체, 그리고 장인정신과도 같은 몸의 틀 짜기와 훈육의 고된 결과라는 점으로 소급되는 측면이 짙다.


    이 환영의 환영됨에 현혹되다가도 그것의 이면 곧 실체의 경험적 진실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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