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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스프링댄스페스티벌] 안애순 안무, <In Gut Out>: '신명'나는 춤판을 향한 대중가요의 전유
    REVIEW/Dance 2013. 5. 28. 10:20


    ▲ 안애순 무용단, [제공=강동아트센터]


    초록색 레이저의 방출, 이는 무언가 신성한 곳을 가리킨다. 5000년 역사를 ‘침략 당함의 역사’, ‘평화의 성향을 지닌 민족’으로 표상하는 가운데 기운다. 


     ‘진짜 사나이’,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 ‘밤차’,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때 그 사람’ 등의 대중가요가 한국적 정서의 표층을 배회하고 있는 음악들을 배치한다. 이는 시대상이 반영된 대중 풍속도의 유형학을 구축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사실상 이 역사의 시간을 현재로 호출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허무하면서도 실은 어느 정도 읽는 데 실패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신’이 든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말하는데 손가락을 어떤 기류처럼 자유롭게 놀리며, 영상에서는 나무뿌리가 생겨나고, 웃으며 음악의 “아름다운 그대 모습”으로서 신들림을 드러내고 일상의 시간‧몸과 달라진 차원에서의 특별한 표식을 드러낸다. 


    춤추는 존재들은 잠시 무대를 채우고 어느덧 사라지고 마는, 곧 다른 춤추는 존재와 중첩된 후 치환되어 사라지고 마는데, 이는 곧 기억, 개인의 다양성을 표시하며 그것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춤은 대중가요의 춤, 대중문화의 코드를 전유한 채 순간적으로 그것들이 육화된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식인데, 이로써 몸은 미디어의 매개체이자 문화의 단면, 삶의 부분들을 드러낸다.


     미디어(텔레비전) 스위치를 돌리기, 그 속에 부분 점들에서 색색깔의 현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 양상은 뭔가 과거적 현재로 가는 통로를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미 신이 들려 가는, 춤의 돌발적, 정위 지을 수 없는 리듬을 체현하는 여자, 그리고 앞서 미디어의 막이 됐던 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흔들림과 상응하는 움직임을 만들게 된다.


     이는 우리가 비가시적인 것에 의해 끊임없이 추동되는, 영적인 존재임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을 세수하는 것 같이 두 손을 움직임, 규칙적인 박자의 체조, 사교댄스로의 전유로 이어지는 단락의 층차는 신성한 과거의 춤과 비교적 현재에 가까운 어느 시간의 혼종적 경계를 상정하며 이 신들림의 형국을 중단시키게끔 한다.


     이 음악에 따른 믹스‧리믹스된 음악‧노래들의 혼종은 단락들의 재현들과 치환을 통한 결락들을 생성하며, ‘무의미한’ 의미 질서를 생성해 낸다. 


    이는 몸이 체현하고 있음을 순간적인 드러남만을 지정하고, 이는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맥락의 피폐한 절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이로써 무용수는 매개자적인 전달자로 주체의 자리는 어던 잠시 스쳐가며 관객의 의미 질서에 공명하는 순간으로 생성될 뿐이다.


     이 춤은 그런 의미에서 환영적으로 남고, 목소리와 음악 안의 기표 속에 종속된 듯 보이며 그 목소리들이 역사의 환영적 증거로서 주체적인 자리를 전하며 관객과의 공명 아래 어느 한 지점들에서 육화되고 사라질 뿐인다.


     결과적으로 ‘꼭두각시’ 같은 무용수들의 춤의 조각들은 이 무대 자체에 환영적으로만 육화될 뿐이다. 이러한 강도 없는 의미의 잡히지 않는 흐름들의 파편적 조합만이 늘어서자 어던 허무함이, 비장함이 빚어지는데, 안애순 안무가는 의미를 뒤섞는 것을 너머 의미없음을 의도적으로 포기해 지속의 양을 증가시켜 새로운 질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어떤 질적 강도를 높이는 힘들을 표출하는 지경민에 이르면, 앞선 단편들의 합산을 그의 신체‧움직임을 통해 꾀하게 된다.


     앞선 무용수들의 대중문화 전유의 춤은 왜 그들의 춤이 대중가수의 그것보다 못한지를 잘 보여주는데, 일종의 대중가수의 춤은 집단의 정형화된 틀의 프레임 안 정교하고 ‘각’ 있는 배치와 호흡‧시선, 그리고 ‘홈 파인 공간’의 영도 아래 움직임들을 적확하고 강도 있게 분배하기 때문이다. 반면 무용수들의 몸은 흐물거리며 하나의 방향을 정위하지 않으며 ‘각’ 있는 안무의 매무새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친구’의  “행복한 인생”으로부터 분기점이 되는데, 박수를 유도하며 난타 형식을 만든다. 이 ‘신명’은 현재의 수행성 속에서 왔고, 박수 유도로 인해 가능해지는데 ‘신명 유도’는 그리고 한껏 난잡한 판을 벌임 역시도 그러하다.


    한편으로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전유와 순간적 지나침의 활용들로 인해 관객은 가닥을 좀처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분들을 신체적인 감각으로 설명해 내는 시도가 아닐까.


    결국에는 이러한 춤의 낯선 감각의 전유는 새로운 움직임의 일환인가 아니면 감정과 감각을 극단화한 (그에 그치는데) 인간의 표상을 재현한 데 더 가까운가.


    이제 육화됐던 것들을 ‘질서 없이’ 마음껏 펼쳐내며 혼합의 덩어리들은 막 섞이면서 앞서 환영의 조각들로 존재했던 무용수들은 비로소 자율적 주체로 존재하는 듯하다.


     인사할 때 비로소 보였던 것인데, play(재생), 빨리 감기, stop 등의 옷에 새겨진 문양들이 그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이 음악에 따른 메타 구문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실은 움직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교하게 지켜졌는지, 구현됐는지는 의문이다.


     이 판의 신명은 급작스러웠고 이런 돌발성은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졌던 음악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곧 신들림의 ‘신’이라는 것의 유형 대신 오로지 그 중간의 혼합 상태만이, 시각의 지정할 수 없음만이 지시되며 이 신명나는 판의 질서 없음의 질서, 음악 없음의 음악으로서 모든 것을 대신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이 판의 폭발 이전의 것들은 너무 흐물거리지 않았던가. 너무 유동하며 떠다니는 것은 아니었나. 마지막으로 그 폭발의 순간은 너무 짧지 않았던가.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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