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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혈맥>(김현탁 연출): '리얼을 구성하기'
    REVIEW/Theater 2013. 5. 29. 02:48

    주변부의 삶을 비추다


    ▲ 지난 5월 2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연극 <혈맥> 프레스리허설 (이하 상동)


    이 작품은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것에 균열을 내며 과거를 현재적 관점에서 재접속한다. 독특한 프레임과 다양한 사람들의 절합적 만남이 우연적으로 무대에 배치된다.


    '다스베이더'를 가리키는 사운드 지표는 현실을 상상계의 어느 지점에 위치시킨다. 이발을 하며 중얼거리는 털보는 객석을 잇는 경계를 지운 연결‧접속 지점을 만드는데, 이 대사들은 옹알거리는 형태로 잘 들리지 않는다.


    털보의 일상의 삶에서부터 시작한 극은 등장인물들 곧, 소시민들의 삶을 ‘주체’의 위치로 가로 놓지 않는데, 이는 주변인 자체의 내용에 ‘무게’를 싣지 않게끔 하는 사투리의 사용이나, 무대를 잠깐 스쳐지나가고 마는 식의 무대 선점이라는 형식으로 인한 것이다. 


    의자를 주변에 놓아두고, 이 ‘안정된 자리’를 이전의 잠깐 이 ‘안정적이지 않은’ 무대 중앙을 점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이 전도된 중심‧주변의 지형학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독특한 병치의 절합 구도'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지난 맥락들과 결부되어 단편적 표출로 드러나고 여기에는 역사의 흔적이 묻어 있기 때문에 이 ‘파편적 몽타주’는 서사의 궤적을 유기체적으로 엮기보다 역사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마주하는 것 같은 인식을 선사한다.


     ‘내 구주’‧ ‘내 사랑’의 찬송가와 ‘어야디야’ 전통 우리 노래를 두 인물을 통해 병치시켜 이 혼종의 역사적 체현물을 기입한다. 이 ‘중앙’에는 너무나 많은 인간 유형이 머물다 가는데, 무대 중앙에 달린 링을 사용하며 ‘체조 선수’를 재현하기도 한다.


     CD 파는 이, 민중 선동가의 절합 구도는 앞선 자살하듯 링에 매달린 여자와 진짜 선수, 그리고 그 전에 두 상이한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관계에도 상응한다. 이 ‘절합’은 좀 더 내용상의 혼합을 이루도록 부자연스러운 충돌의 사건의 발생을 가한다.


     3장에 10000원인 CD와 노동 전단의 널브러진 광경이 그대로 무대에 남은 뒤에 ‘여자’를 소개시켜 주는 두 여성의 노래 연주와 라면을 먹던 털보와의 협상이 이뤄진다. 막의 구분을 통한 연극의 비가시적 규약의 환영적 창출 경로를 구현하는 대신 연극은 중첩된 시간의 은유를 선사하는 한편, 각 사람들의 사건을 통해 만들어진 실재를 그 증거물로 계속 증명하며 공통의 세계,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 상정하는 것이다.



     만년필 파는 남자친구와 미국 양말을 파는 여자 친구의 가난한 사랑의 ‘장밋빛 서광’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는 어느새 인조로봇의 말투와 움직임을 체현한다. 방금까지 그저 내 품에 머물던 애인이었던 복순의 언캐니한 변용은 미래로의 출구 없는 소시민의 퍽퍽한 삶과 리얼리즘을 정동 없는 ‘주체가 될 수 없는’ 기계의 형식을 메타적으로 드러내며 비가시적으로 은닉되어 있고 사회적 정보의 형식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의 정도를 한층 높인다. 


    이를 땅굴 속에서 배를 채우려는 허덕이는 인민의 삶을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원칠과 남양 ‘넘버원 가수’인 텅 빈 메아리’의 절합이 또한 발생한다. ‘꿈을 노래하는’ 여자의 노래 “라 비 앙 로즈”는 무대 전체를 온전히 채우는 형식이기에 립싱크는 ‘결여 없이’ 그것을 전유하며 환희를 떠안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끊임없이 중앙-주변의 재배치와 그리고 마치 전의식이나 무의식처럼 무대 양옆 대기 장소마저 개방되어 있어 중앙을 점하기 전 ‘직전의 단계’를 형성하는 ‘틀’을 적시하는 구조 아래 단편적 표출 형식의 리얼리즘은 절절하지만 관객에게 소구되지 않는다.


     이는 김현탁 연출이 리얼리즘을 그 자체로 전유하며 그것이 어떤 낭만주의의 감응과는 철저히 거리가 있음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곧 우리의 모습이면서 비극의 ‘숭고한 주인공’이 절대 아닌 이 사람들의 ‘그들만의’ 그리고 ‘대표적인’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진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게 몰입이 가능한 인물이 되지 않는(곧 개입하고 참여해야 하는) 우리 (주변부)의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완벽히 이에 거리 두기와 동시에 몰입하기의 역할에서 실패를 겪게 된다. 전자에 있어서는 우리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한 후자에 있어서는 매끄럽게 ‘주체’로 구성되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결여’와 ‘인물의 결여’ 사이에 우리 스스로로부터 파생된 시차적 생산이 어쩌면 우리가 역사 속에 지닌 리얼리즘의 감각을 꿰뚫고 교란한다고나 할까. 


    '리얼에 대한 시각: 파편들의 합산'



     ‘리얼리즘’ 자체를 재현하되 독특한 프레임 배치 아래 ‘순간’들로 둠으로써 이는 역사의 한 순간을 전후 맥락의 상세한 접근을 배제하여 낯설게 현시되는 느낌을 주며 인물 자체에 내재적으로 소급되는 기호들의 차이들의 분별로서만 튀어나오고 연결‧접속의 구분점으로 분절되기 때문에 이 낯선 잉여의 덩어리는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 구성되는 것, 곧 내재적인 모나드들은 극 속에서 배치와 우연적인 접속을 통한 인위적 형식 아래의 결합물로서 드러나며 리얼리즘 역시 구성된 무엇으로 여겨지게끔 한다.


    파편적 리얼들은 구성된 것의 의도, 분산된 집중의 흩어짐을 성립시켜 리얼리즘을 균열적으로 재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구현하는 것으로부터 실타래처럼 흘러나오는 육화된 이야기를 우리는 보기보다 접하게 되고 또 마주치게 된다. 이는 리얼을 비켜 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리얼’임을 적시하며 리얼을 그러한 ‘균열’에 의해 드러내는 것이다.



    관객석이 부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무대 전복’이 마지막에 일어난다. 무대가 아래로 떨어지며 일종의 지옥도의 광경을 그리고, 환영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환영이 곧 역사였음을 곧 일종의 환영의 현시였음을 지시하는 것 같다.


    무대는 실상 ‘비뚤어진 시선’에 의해서 유영하는 셈인데 버스는 정면이 아니라 앞뒤로 대칭인 객석 구도를 관통하는 일종의 정지된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중앙의 ‘손잡이’ 곧 링은 버스의 손잡이였고 이후에 전체가 버스 그 자체였음은 마지막의 무대 전복에 의해 확연해진다. 이에 따라 들어오고 나오는 사람들은 결국 마주할 수 없는 상태에서 스쳐 보내게 된다. 


     사실들의 우연적 접속과 분출의 묘연한 교직의 구성 아래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일부를 그 조각 난 것처럼 기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며 이를 하나의 프레임 아래 상정하고 또한 또 다른 프레임으로 분리하는(‘저 세계’로 보내는) 결말을 통해 연극은 과거로의 연결‧접속을 현재 그것과 괴리되어 있음의 리얼과 한편으로 여전히 유효한 삶의 내용들로서 리얼을 비뚤어진 시선의 시차를 통해 한데 묶어 낸다. 


    ▲ 김현탁 연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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