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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가 사라졌다>(김철승 연출) : '시차적 배치'와 '엄마의 환유'
    REVIEW/Theater 2013. 5. 28. 03:01

    인터미션, 극적 시간을 일상으로 연장하다.



    ▲ <엄마가 사라졌다>(김철승 연출) [사진 제공=LIG아트홀] (이하 상동)


     ‘엄마가 사라졌다’는 말은 엄마가 현재 어디에 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는 엄마가 사라졌음의 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며 현재를 재구성하는 누빔점 역할을 한다.


     테이블을 두고 모든 이는 만난다. 이 속에 엄마는 함께 위치하는가. 이십분 정도의 짧은 시간 뒤에 극은 인터미션을 갖는다. 엄마가 사라졌음을 알리는 콘텍스트는 이제 엄마의 외부성으로서 위치를 관객이 전유하며 과거를 기억의 지점으로 바꾸는 전제로 기능한다. 엄마가 사라진 공간에 덧붙여진 일상의 시간이라는 잉여를 통해 그 사실이 공통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언어 텍스트가 아닌 배치의 몽타주를 통해



     중요한 건 텍스트는 이후 크게 기능하지 않고, 온전한 내러티브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는 끊임없이 사라질 뿐이며 시차를 벌리며 멀어질 뿐이다. 텍스트는 의미의 지형을 만들거나 감정의 상호 소통을 꾀하는 대신 배치에 따른 감각의 순간적인 발현 아래 무화될 뿐이다.


     배우들은 어둠 속에 옷을 벗어던지고 이는 앞뒤로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데, 옷은 엄마와 기억의 환유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위치의 차이와 행동의 시간차는 이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거나 개별적인 주체로 거듭남을 가리키기보다 단지 그 거리와 시간의 조정과 우발적인 생성에 따른 찰나적인 감각의 휘발, 그리고 동일선상의 행동들이 반복의 차이를 그려 나가며, 단지 어떤 운동의 변이 내지 낙차 따위를 낯설게 지정하고 있는, 곧 철저히 어떤 형식적인 운동의 탐문에 있다.


     그리고 이 형식적인 운동의 공간에서의 ‘실제적인 텍스트 잣기’는 ‘대사의 정적인 암송’을 신체 자체에서 촉발되는 ‘감각의 지형학’으로 바꾸고, 아무 이유 없이 ‘엄마가 사라졌다’는 커다란 전제를 공유하는 가운데 사라진 것에 대한 맹목적인 갈급과 그 사라진 것의 직접적인 상관물을 형상화하며 내용을 형성한다.


    감각의 우위



     배우는 관객에게 말을 건네며 커다란 개가 주인이 목줄을 놓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경험을 전달하는데, 이 이야기는 과거는 환영이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전해지는 탓에 현재가 되는데, 여기서 문학과 다른 지점은 그 서술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 경험을 다시 감각하며 초조해지는 남자의 ‘몸이 있다는 것’, 그 몸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몸에 대한 집중은 곧 ‘엄마가 사라졌다’를 엄마라는 존재와의 마주침 자체에 방점을 찍거나 과거를 재현하는 데 별 취미가 없음과도 연관이 된다. 


    평이하고도 별 중요하지 않은 듯한 내용에서 이런 ‘몸’에 대한 메타적 고찰에 도달 가능하다면, 다리를 잃어버린 이후에 그 상실을 뇌가 잘 알고 있다는 설명에서는 그 자리를 인식하고 있는 뇌의 부위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정확한 설명의 덧붙임을 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엄마가 사라진 순간을 엄마와의 신체가 마치 탯줄처럼 연결된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는 단지 그러한 감정을 심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신체에는 엄마의 신체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에 가깝다.


    현시되는 '엄마'의 부재하는 자리들



     엄마는 정위된 자들을 가로질러 간다. 그들이 지정하는 의미들의 재현(이야기와 기억의 상념들)을 넘어 순간적이고 엇갈리는 형식으로 현재의 순간에서, 그리고 이는 다시 기억으로 남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 기억 속에 마주하는 실재의 순간, 꿈꾸는 순간, 재현될 수 없는 순간이 된다.


     일종의 현시됨의 순간은 이렇게 마주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순간으로 각인된다. 곧 무기력하게 방기하는 가운데, 우리 역시 그녀를 정면으로 보며 우리는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시간성은 외부의 그것으로 상정된다.


     사실 이 원피스 입은 마치 애인인 것처럼 붙잡으려 드는 여자가 엄마라는 근거는 없다. 다만 붙잡히지 않는, 비교적 말없이 텍스트의 의미 지형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는, 어떤 상실의 상념에 시달리지 않는 존재, 그리고 바깥에 나가 외부성을 획득하는 존재는 그녀밖에는 없다. 


    니체가 말한 모든 개별자에게 각기 다른 엄마가 있듯 이 사라진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각자 상이한 자들의 체험과 결부되는 엄마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는 엄마가 존재한다. 


    이 극은 어떤 특정 역할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와 세계의 분명한 의미망이 상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파편적인 대사들을 위치의 지형학에 따라 순간적으로 분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기에 엄마라는 인물 역시 차이의 관계망에 따라 정해지기보다 실제적인 위치(여기서는 외부성) 그리고 상실의 공통 전제를 겪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추정될 뿐이다.


    개별자가 아닌 '잠재적 위치'들의 연결/접속




     인물들은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막 달리기도 한다. 이는 단지 어둠 속에서 전등을 흔들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났을 때는 이 행위 자체에 무의미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 작품의 배치의 미학적 알레고리 아래 그것의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파급 효과로 의미는 귀결되는 듯 보인다.


     몸들은 개별자로 소급되는 대신 교환되기도 하는데, ‘자고 있어요’라는 물음에 남자는 의식을 잃은 물자체로 변해 있고 대신 다른 이에게서 ‘괜찮은데’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러한 불특정한 몸들의 교환을 통한 연결‧접속은 ‘엄마’가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각기 다른 엄마’이면서 동시에 엄마는 모든 이에게 의미를 갖는 ‘전환사의 기능을 하는 엄마’라는 지점에서 내용적으로 상응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교환의 시차는 이 극이 덧 층위를 상정함을 의미하는데, 앞서 잠든 남자의 무의식에 기억이 재생되고 있음, 곧 현실과 환영의 이중 층위를 지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덧 층위는 움직임들의 겹침과 그 시차가 하나의 시간의 흐름을 상정하는 대신 상이한 시간들의 우연적인 접속에서 가능한 것임을 생각하게끔 한다. 엄마가 외부로 사라지고 남자는 반원형 입체 공간을 마찰력 없이 좌우로 끊임없이 오가는 듯한 잉여적 몸짓들의 무한 운동을 꾀하는데 여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엄마의 사라짐 이후 충격의 행동이 이후 벌어지는 다른 인물들의 상실과 엄마를 찾는 행위와 겹치면서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워짐과 멀어짐의 시차를 상정하여 시간의 상이한 층차와 물리적 거리의 층차가 ‘제약된 공간’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절합되게 되는 것이다.


    엄마라는 외부성의 환유



    엄마는 밖으로 나가 문을 두드리기도 하는데, 실상 잉여로 떠도는 엄마와의 시차가 생산되고 여타 인물들은 그러한 시차 속 환영을 마주하는 셈이다.


    창문을 더듬어 가는 것, 이는 만날 수 없음의 간극을 드러내지만, 마주침의 곧 같은 곳을 향한 듯한 착각을 불어넣기도 하는 반면 엄마는 위로만 (엄마를 상정한다면 그에 따라) 딸은 아래로 향함으로써 완전히 거리는 벌어지게 된다.


    이 벽이라는 외부성은 실제 그것들을 박박 긁는 인물들에 의해 과거와 현재의 시차, 기억과 현실의 시차를 상정하는 은유적인 동시에 공간을 환유하는 실제적인 상관물이 되는데, 이 공간은 나갔다가 들어오는 통과의례적 절차의 관객의 수행적 공간인 동시에 엄마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외부성을 의미하며 한편으로 ‘긁어내야 하는’ 뇌에 붙은 기억의 잉여적 덩어리들이라는 은유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달려라 하니 주제곡을 연신 부르는 것은 어린 시절의 ‘유기된 기억’으로 상실을 애도함을 의미한다. ‘엄마 가슴’, ‘빛바랜 원피스’ 는 ‘유통기한’과 만나며 엄마에 대한 기억은 일상의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관념과 만난다. 


    연출: 비가시성의 메타 정보를 가시화하다



     연출은 정적으로 주변부를 배회하며 또는 인물의 표면을 표면으로 남겨두며 외부로서 접근하여 어떤 개념을 부여하여 이들의 이후 움직임을 주조하는 신적 내지는 매개자적 역할을 하는데, 연출의 개입은 ‘연출’이라는 비가시적 영역의 역할을 가시화하여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이 완성된 과정의 재현이라는 사실이 아님을 증거하는 실제적이고(실제 무대에 난입하므로) 가상적인(이는 어떤 특정 역할이 주어지는 대신 ‘연출’이라는 메타적 역할로 내용과 실제 상관없는 잉여의 역이라는 것에서) 장치가 되며 기능한다.


    p.s. 환유의 마지막 조각


      ‘유통기한’의 사물들을 갖고 그것을 연장하는 냉장고는 이 극(공간) 속에서 가장 큰 문학적 은유의 상관물일 것이다. “괜찮으니까 냉장고를 끄자”라는 마지막 말은 끝까지 불확실한 환영적 기호의 계열을 잇는 반면, 기억의 것들을 이제 그만 건드리고 사라지도록 놔두자는 것인 동시에 전기를 통해 실제적 조명 역할을 하는 것을 꺼서 어둠으로 만듦으로써 통상의 극의 ‘마침 클리셰’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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