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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신화적 자연’을 너머
    REVIEW/Theater 2013. 5. 29. 19:33

    수집가의 영혼: 역사-사물의 조감


    ▲ 5월 28일 오후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열린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연출 강량원) 프레스콜 (이하 상동)


     역사적 시대 풍광을 재현하고 사물을 묘사하는 ‘소개하는 자’로 등장하는, 하나의 화자로 소급되는 샤로테는 일종의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정면’을 향하며, 관객을 역사로 향하게 하는 가이드로서 역사라는 메타-정보를 전달한다. 이는 어떤 사물의 소비, 취향에 집중해 그것을 소개하는 대신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 그것을 나열식으로 하나하나 조감(照鑑)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것’을 ‘현재’ 어떤 목적을 갖고 전달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미니어처들로 역사의 보존물이자 수집물을 미시적인 것들로 바꿔, 거리두기의 시선을 가져간다. 이 온전한 보존물은, 그것이 역사적 파국을 이겨냈기에 현재 조우하며 ‘언캐니함’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 '화자'의 소개는 이 사물 자체에서 곧 이 사람의 영혼이 되는 ‘수집가의 영혼’을 더듬어 내게 한다.



     그가 소개하는 첫 번째 사물인 축음기와 관련해 무대의 문이 열리고 닫힌 후 그것을 온전히 듣게 만드는 방음실 같은 공간으로 무대는 형상화된다. 축음기가 실제 틀어졌을 때 이는 ‘낯설다’. 무대 전체를 포함한 장치의 의도된 효과 대신 그저 오래된 ‘축음기’ 그 자체의 사물이 내는 소리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무대의, 연극의 인위성을 이야기한다.


     이미 역사의 일부분이 된 애초 축음기가 가진 특성은 ‘소리의 보존’이다. 이는 역사에서만 이야기 가능한 메타-정보, 또한 신체라는 존재에 대한 기입과 재생을 상정한다. 일종의 낭만주의적 테제가 훼손되지 않는, 원본의 복제라는 시뮬라르크가 아닌, ‘원본’에 대한 향수를 야기한다.


     한편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특별히 이성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배우 남명렬에 대한 톤과 어조, 태도 등을 포괄하며 생성되는 신뢰는 이 인물이 갖는 전달의 신뢰로 합치된다. 그 확고하고도 공허한 눈동자는 말이 건조하게 흘러가는 신체 일부를 나타낸다. 그의 우리 말(실은 영어)에 중간 중간 섞는 독일어는 원작의 옮김이 아닌 두 가지 언어 속에 유동하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라는 전환사로의 접속: 수행성으로서 역할



     남자 옷만 입던 이모의 유일한 여자 옷을 ‘벽장’ 속에서 꺼내 입었던 샤로테의 어린 시절의 경험에는 두 사람 간 ‘성적 전도’의 ‘그릇된 (이모의) 자리’에 기워지는 자연스러운 욕망의 ‘올바른 (화자의) 자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연이 우리에게 장난 친 거야”로 성에 대한 일반적이라 여겨지고 그래서 편견의 시선 아래 놓이는, ‘소수의 것들’에 ‘자연’스러운 운명의 체현이 아닌, 그 결과로써 전도된 외양은 실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라는 상위-테제를 들어 젠더를 재정의해 내기에 이른다.


     방음벽의 닫힌 내재적 공간에서 어두운 게이-레즈비언의 아지트를 들어갈 때 전면의 ‘벽’은 열린다. 그리고 지친 콘크리트 벽의 어둠을 먹은 거친 실재의 열린 ‘타자적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Hot Stuff’라는 유행곡의 휘감음은 그를 들뜨게 하며 이곳의 환락과 유행의 열기가 그를 통해 체현된다. 그리고 공간을 조명을 통한 프레임들의 교차로, 원래의 기하학적 모던한 구획의 공간을 분열증적 시차로서 재생산하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유로움의 질서를 덧씌운다.



     이 혼돈의 질서 속에 그는 시대의 전환과 ‘성-소수자’로서의 지위를 체현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사실 ‘화자’는 남성성과 여성성, 남성의 외양과 여성의 내면 사이에서 역할의 전이가 자유로운데, 실상 그는 객관적인 서술자의 전달을 하기 위해 다소 건조하게 남자의 목소리를 전유하며, 어떤 동요 없는 침착함으로 그 (여성의) 내면을 관철한다.


     실은 그가 ‘알프레드’라는 동성애자이며 굵은 목소리를 지닌 ‘남자’와 만날 때 그는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굳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두 가지 성의 측면에서 수행적으로 성을 선택하고 활용하며 연기적으로는 능수능란한 배우로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무대에 한 명의 화자로 소급되는 여러 역할을 연기하는 한 명의 배우라는 메타적인 부분이 아니라 한 명의 화자라는 사회적인 역할로서 샤롯테가 전이될 때와 한 남자를 개인적으로 대할 때라는 서로 다른 자아에 적합한 표현의 상이함이라는 극 내용적인 부분에서 그러한 것이다.


     샤로테는 진주목걸이를 건 여장 남자로 유명해지고 이방인으로서 환영받는 유명인에 대한 경계의식의 연장에서, 미디어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을 좇는다는 명목 아래 그를 인터뷰로써 ‘자극’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성에 대한 선택이 최초로 어머니에 의해 거절될 때의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신화적 자연의 틈새: 젠더 뛰어넘기



     Ich bin meine eigene Frau., ‘나는 나의 아내다’라는 자기 자신의 반쪽을 내 안에서 찾는다는 것, 참 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일부가 ‘진짜 성’으로서 그에게 나타난 일반적인 성의 현실적인 상대자의 자리에 대한 보족의 기능을 한다.


     사자와의 평화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자가 위험의 대상이 되지 않음, 곧 이는 성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과 이방인으로서 국가의 경계에 의해 그가 분류되고 틀지어짐 이전에 폭력의 기원이 상정되어 있지 않고, 또한 그것 자체가 어쩌면 신화일 뿐임을 역으로 폭로하며,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가 애초 상정되지 않은 또 다른 ‘신화적 자연’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속해서 한 명의 배우는 젠더를 그것의 연기(연기)의 수행적 차원에서 흔들었다면, 그리고 끊임없이 경계의 지점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이제 ‘자연’의 기호는, 성의 탄생에 있어 오차라고 상정되는 ‘신화적 자연’은 다시 부정된다.


     이 사진과 함께 맺는 극은 미소 띤 평온함과 모노톤의 노스탤지어로 기록되는 이 사진 한 장에 모성적 공간으로 회귀함으로써 ‘자연’을 그리고 ‘성’을 또 ‘진정한 삶’의 순간을 그리고 재정초하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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