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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가을 반딧불이>: ‘상처를 마주하기’
    REVIEW/Theater 2013. 6. 18. 03:38

    인트로: 사실적인 공간과 경계 너머


    ▲ 지난 14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정의신 작, 김제훈 연출. 연극 <가을 반딧불이> 프레스콜 (이하 상동)


    ‘무대 바닥’을 청소하기, 실내에서 요리하기, 이에 따라 앞서 들리던 배경음악은 곧 이 극 안의 음악이 된다. 존재와 그 행동에 의해 무대는 일종의 진정한 환영적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이 태연자약한 행동은 이 비워져 있던 공간이 예전부터 그들의 집이었음을 새삼 인식하게 한다.


    다쓰모가 언급하는 ‘특별한 장면도 아닌데 가슴에 남아’ 기억되는 영화 속 장면은 다쓰모에게 있어 일종의 ‘시뮬라르크’가 아닌 기억의, 추억의 한 장면이 된다. 그리고 이 연극이 그러한 순간이 되길 기원하는 인트로의 일부이자 자기 지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이곳은 ‘휴게소’로 불리는 버려진 보트선착장으로, 다쓰모와 그의 삼촌 슈헤이는 주방에 붙은 차림표 중 하나인 메밀국수를 먹고, 다모쓰는 빌린 보트를 타고 간 손님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기도 한다. 강으로의 먼 시야는 곧 강을 향한 선착장에서의 경계 영역은 관객석과 중첩된 공간으로, 그 환영의 경계를 넓히며, ‘보이지 않는’ 의미를 산출한다(우리는 다쓰모의 먼 시야, 그 눈에서 강을 본다). 


    아련한 거리로서의 사랑



    슈헤이 실장(삼촌)과 마쓰미의 사랑은 육체적이지 않다. 여자는 이미 임신한 상태이고, 삼촌의 머리는 지긋하고, 이미 어떤 욕망도 내재하지 않은 듯하다. 


    이들의 식사 간에 조리된 탕 위의 희뿌연 김이 아련하게 두 사람의 그와 같은 거리를 상정하고, 마쓰이는 슈헤이를 그 아련한 틈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이에 마주하는 대신 그것을 수줍게 받아주고 있다. 그는 사랑의 순정을 그렇게 입증하고, 여자는 그것을 ‘순수함’의 로맨스로 만든다. 선착장의 경계에서의 시선이 공간의 환영적 지평을 만든다면, 이 둘의 시선에는 시간의 멈춤이 자리한다.


    이 어떤 ‘영원의 순간’, 그리고 이 실제적이지 않은 거리는 이 아련함만큼 ‘현상될 수 없는’ 동시에 일정 정도의 시차, 그리고 그 합치될 수 없는 두 사람의 거리가 이 로맨스를 만드는 것이다. 곧 그 거리가 낭만으로 상정되는 시점에 있다. 무대에서의 그 ‘김’은 실제 보이는 듯하다.  


    과거의 한 순간



    '외부인'으로서 이곳을 찾은 마쓰미와 사토시는 사회를 벗어나며 잉여로, 또는 부재로 자리하는데,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붙들려’ 일상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사기 연애’로 애만 부르고, 갈 곳을 잃은 여자,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고 할 일 없는 실업자 신세의 남자 모두 갈 곳 없는 우울한 의지처 없는 개인이 된다.


    이 비주체적 존재를 가로질러, 사토시를 통과하며 의지처 없음에 시간의 잉여의 의미가 겹쳐진다. 외부에서 내부로 건너온 이 둘뿐만 아니라 모두 어떤 한 순간의 사연이 있다.


    사랑을 사기로 재명명하며 그 모든 것을 후회와 상처의 순간으로 만드는 마쓰미의 한 순간처럼 아버지가 떠나 아버지의 자리에 대신 아버지로서의 삼촌을 수용해야 했던, 이 슬픔을 어쩔 수 없음의 선택에서의 의지로 봉합해야 했던 다모쓰의 한 순간, 한 쪽 다리가 불구가 된 순간, 그리고 그 다리 잃음이 무능력함으로 현상되고, 그러한 무력함을 깨닫게 되는 슈헤이의 한 순간(동시에 벗어나지 못한 순간), 마지막으로 직장을 잃는 순간 그 아픔을 현상하지 않으려는 듯 삶을 느긋하게 그저 스쳐보내는 사토시-동시에 그는 외부자이다-의 아련한 한 순간까지.


    사토시는 삶의 아픔을 가두고, 그것이 무화된 채 다른 이들의 가장자리에서 그것들을 보고 흘려보내며 어쩌면 그의 상처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어떤 특별함이 있다.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외부인’(사토시, 뒤이어 마쓰미)이 들어왔을 때 다모쓰는 그를 반기지 않을 뿐더러, 이 관계의 철저한 외부이자 스스로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곧 그가 다시 이 집 안의 외부로 나오자마자 이 외부에는 의미를 현실화‧형상화할 수 없는 떠난 아버지가 나타난다. 그의 내면 공간을 구성하는 존재, 또한 그 안의 말의 자리가 된다.


    아버지는 어떤 가부장적 모습도 아니라는 점이 특이한데, 동시에 이 20년 전의 아버지와 그의 ‘자라지 않은’ 자아,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아버지는 그렇게 그에게 고착된 의미로, 또 그 고착됨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과거의 무엇이고, 그 역시 그 자장에 있다.



     이 아버지는 결코 ‘실재’가 아니지만 그에게는 실재처럼 쫓아내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고 달라붙는, 천연덕스럽게 나타나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를 실제 행동으로써 ‘쫓는’, 어쩌면 ‘좇는’ 그런 실재가 된다. 곧 쫓아내려고 하는 듯한 그 행위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곧 그를 좇는 자신의 마음을 은폐하는,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지 않으려는 그런 상황에 있다.


     즉 실재는 그가 보지 않으려는 그 마음의 작용을 존속시키는 저 환영적 대리물의 반대편에 있는 것 아닐까. 곧 아버지의 죽음을 기입하며, 그 죽음을 유예하는 이 아버지의 존재는, 그의 마음은 그의 성장하지 않음,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경계를 현상해 낸다. 반면 이 아버지가 정말 실재라면 어떨까.


    곧 아버지는 유령이지만,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 외에 실재에 가까운 무엇이라면, 그 안의 타자가 아닌, 진짜 타자라면, 가령 그는 그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 외에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 이전에 이미 그 외부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 잉여적 존재는 이제 관객에게 보이는, 그리고 관객과 그 사이에서 감각되는 특정한 과잉의 의미가 된다. 


     ‘열림의 문’



    아버지의 떠나감의 의미가 해명될 때에야 비로소 다쓰모는, 또 연극은 그의 닫힌 내면의 문을, 그리고 그가 허락한 또는 허락하지 않은 아버지의 관계처럼 마찬가지로 ‘고착된 집’처럼(집을 찾은 두 외부인은 그의 시점에서는 일관된 부분이었다) 누구도 더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의 의미 역시 비로소 ‘열림의 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를 떠나보내기 전에 실은 떠나보낼 수 없음의 돌아옴이 곧 시차로서 증명되고 동시에 어긋나는 가운데 스스로가 ‘죄인’이 되고, 마주치지 못하는 가운데 다시 돌아오며 그 죄 너머 사랑을 입증한 뒤 그는 사랑의 실재와 그리고 사랑의 애도 불가능함의 영역에서 영원히 머문다. 곧 ‘죄인’이란 영원한 사랑의 시차 속에 그 사랑을 담아 놓는다.


     그 아버지에게 담담하게 말을 걸 때 그의 눈물은 마음을 이끄는 부분이 있다. 그 아버지와의 경계에서 동시에 그로 인한 내면의 원환적 감정과 외부의 현재로의 소통될 수 없는 단단한 무엇이 삶의 긍정으로 바뀌는 순간은 오인이 이해로, 과거로의 귀착이 추억으로 현상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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