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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무림파혈전>: 정치의 불가능성과 미학적 표현의 자유로움 사이
    REVIEW/Theater 2013. 6. 20. 09:11

    '만화와 무대의 혼종적 경계'


    ▲ 연극 <무림파혈전>(작 홍석진 / 연출 김제민 / 주최 극단 거미)_혜화동1번지 5기동인 2013 봄페스티벌 <국가보안법> ⓒ혜화동1번지 5기동인[사진=이지락] (이하 상동)


    애니메이션 화면은 아래에서 위로 한 화면씩 역동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속에 인물이 무대에 “등장한다”라는 메타 규칙과 함께 등장한다(곧 무대는 만화에서의 현현이며 만화의 설명이 무대의 내레이션으로 연장된다. 그리고 이 ‘등장’은 만화와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또 전환하는 것이다). 


    모래로 덮인 바닥, 애초 프로시니엄 아치로 경계 짓는 것이 어렵고, 어쩔 수 없이 ‘이 작은 공간을’ 공유하고, 모종의 참여가 전제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한 인물은 콧구멍에 ‘국보법경’을 숨기고 다닌다. 만화적 상상력은 화면에서 무대로 연장된다.


     ‘플라스틱’ 핵주먹, 보라색 머리, 검은 융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은 차용과 전유의 미디어-혼종적 경계를 그린다. 어떤 SF적 상상력과 ‘재미’라는 평가지수의 검열 아닌 검열, 만화의 극으로 구현하는 완성 지점으로의 나아감(곧 만화를 완성함)은 사실 그 극의 완성이 결말로 이어지기보다. 이 극의 외부가 곧 대중 미디어와의 분별에서 시작됐음을 상정한다.



     현실이 만화를 감싼 형태인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되며 대중 미디어로의 파급 효과를 산출하고자 하는 이 극 안의 완성되어가는 또 다른 극은 그 자체로 연극의 ‘존재 여부와 그 미약한 생명력’을 메타적으로 지시하게 된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만화의 컷들이 액션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계속 지나간다. 이는 ‘하나의 과도하게 응축된 잠재성의 영토’로서 만화의 장면을 실제적으로 구현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는 조명의 분절(순간적인 반짝임 형태로 나타나는), 위기를 잔뜩 돋우는 사운드 효과에 의한 것으로 이 반짝임은 일그러진 상을 만드는 불투명한 일종의 거울이 스크린 옆쪽에 자리하며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장치 역시 한 몫 한다.


     한편 어린 왕자에 나온 ‘길들인다’의 이야기가 차용되는데, 이 이야기만큼은 극이라기보다 만화 자체를 구현하는, 만화로 소급되는 장면으로 상정되고, 이어 이 만화의 재현이 만화화 자체의 감상으로 들어가는 데 시작됨의 단계가 들어간다. 이 ‘몰입’의 경험은 사실 관객의 시선을 상정하는 것이 물론이지만, 그 들어감의 시점 전에 배우 역시 몰입의 내지는 더 정확히는 극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캐릭터들은 만화의 캐릭터, 그리고 만화라는 세계로 묘연하게 흡수되는 만화 바깥의 현실에 살지만, 동시에 현실과 관련 없는 만화의 평평한 세계, 그 자체의 내재적인 세계로 상정된다.


     두 세계는 분리되지만 일상 현실은 만화 세계와 만화의 현실 둘 다를 소비하는, 그러나 아직 그에 접근하지 않은, 그리고 아직 상정되지 않은 관객을 향하는 대신, 만화의 전개에서는 외부 관객이 앞선 상상의 관객으로 이미 실제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셈인데, 사실 이 이차 독자는 실제 이 극에서 산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관객에게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가능한 사유의 지점', '주체가 되는 순간'




    극 속의 연출가, 웹툰 작가는 현실과 만화의 경계에 있는 인물로, 만화를 조절하고, 동시에 만화 속 캐릭터와 그 바깥의 현실 인물(사실 이는 가상의 영역에 가깝다-현실에서 이들은 만화의 캐릭터 자체 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만화 바깥에서의 이 둘은 사라진다)을 조율한다. 


    이 경계에서의 위치는 이 캐릭터 역시 또 다른 캐릭터가 현실 반영과 변화를 요구하며, 또한 연기되어지는 수동적 존재와 능동적 존재의 사이에 위치하게 되는 가운데 있게 된다.


     곧 그 두 존재의 변화와 맞물려 ‘완성 되어감’이 극 속에서도 역시 이뤄지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는 것 자체는 이 캐릭터들의 자가당착적 상황을 가리키며, 변화를 겪는 기점이 된다. 능동적 위치의 전유를 위한 이들의 요구가 과도해져, 이 만화 자체가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될 때 모두는 이야기를 논의하고, 만들어가는 쓰는 자, 그리는 자의 이전의 위치를 차지한다.


     단순히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의 무지막지한 그래서 아이러니한 편견, 시작되는 토론 프로그램의 BGM을 넣으며 이들의 토론 대형은 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 스토리텔링에 자연스레 삽입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이 ‘국가보안법’은 모든 이에 있어 어떤 미학적 지점과 심한 간극을 상정하고 있는데,  “무림은 이런 곳이야!”라는 죽고 죽이는, 배반이 판치는 치밀한 모략이 승리로 이끄는 ‘최강 무공비법’은 ‘그네’로 현대 풍경을 상징으로 내세우고, 이들은 동시에 그것이 국가보안법을 위배되는 두려움의 주체를 체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캐릭터들의 그 자아-분열적인 증세는 검열적 이들의 극의 내재적 법칙을 따르는 대신, 외부적 효과가 이 극을 실제적으로 좌우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동시에, 수행적으로 이극을 ‘한정지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어느 시간의 기로를 상정한다.


     이는 동시에 우리의 시야가 민주주의 이전 ‘전제될 수(상상할 수) 없는’ 지점과 합치된다. 이 중간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연출자는 실은 이들과 분리되어 있고 의미는 오로지 이 극 안에서 내재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작품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무엇보다 작가 위치는 여기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만 책임 바깥에 있다. 실제 작가 그리고 연출가의 입장이 투영된 위치에 가장 가까운 이 예술과 강압적 정치의 영역 사이에는 어떤 횡단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표현의 자유’는 ‘외부의 강함’과는 상관없이 흘러가야 함은 애초 그것이 전제되어야 함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반면 이 극은 동시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강제에 의해서만 어떤 무림 안의 순수 캐릭터들이 현실 주체의 대리자가 되는 또는 갈증하며 극 자체를 생산하는(또는 나아가지 못하는) 데 머물게 되며, 이 순수 미학과 그것과 관련 없는 현실은 그 경계를 진정 허무는 하나의 외부-현실, 그리고 어떤 권능의 지점으로 작품의 외적 의미, 그리고 이 작품의 의미 자체를 구현하게 된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경계 짓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 그리고 그 의미는 오히려 국가보안법과 맞물려서만 사유될 수 있고, 지금에 있어 표현의 자유가 진정 표현의 자유의 주체가 되는 과정은 국가보안법을 가로질러서만 진정 가능하며, 또한 그에 관해서 저항적 주체를 만드는 것 역시 국가보안법에 따른 실제적 지지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함을 의미한다. 


    곧 이 작품에서 이 잔뜩 겁먹은 소심한 존재자들이 어느새 의미의 연속을 이어가려는 저항 주체로 거듭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이 혜화동 일번지의  작동시키고 그 주체는 애초 촉발시키게 된 것과 같이.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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