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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레스테스 3부작>: '역사로부터의 사유', '운명의 수용', '복수 이후의 담'론
    REVIEW/Theater 2013. 8. 15. 20:26


    ▲ 게릴라극장 <오레스테스 3부작> 포스터


    1막


    극의 시작 전에 문지기가 자리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쓰레기들과 함께 노숙자의 형상을 띠고 있는 한편, 신문(정보)의 무용함을 알리고, 극에 들어가기 전의 경계를 침묵으로써 비워 둔다. 현실의 힘듦을 체현하는 한편, 시간에 대한 집중과 그 경험, 발화를 직접 관객에게 건네는 형식을 가져가며 관객과 그 사이에는 침묵만이 있는 것이다. 나룻배의 사공이 되고 또 (관객의 사유를 대신하는) ‘사유하는 배우’로 분한다. 


    이야기로 들어가는 경계에서의 위치는, 두 참전 용사의 관객 속에서 진행하는 대화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시간의 경계로, 이전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사유한다. 이들을 통해 들여다 본 (트로이)전쟁은 이기고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곧 적과 동지의 문제가 아니라, 유예된, ‘전쟁으로서의 전쟁’에 가깝다. 곧 전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이라는 그 자체의 형식이 모두를 지배함을 의미한다. 신화를 이미 겪은 이들이 넌지시 건네는 이야기들은 해설적, 설명적, 사유적으로 신화를 검토한다. 


    이 ‘소문’을 만드는, 그 한가운데 그들의 입을 빌려주며 ‘쥐도 새도 모르는’ 이 역사의 사실을 생생하게 전하는 한편, 이들 가운데, 문에서 ‘실재’로 들어선 클리타임네스트라(김소희)는 제물로 바친 비윤리적 행위로 검토된 사건의 바로 그 존재가 딸이라고 불쑥 말을 꺼낸다. 이는 ‘이야기’가 이야기라는 경계 너머 직접적으로 틈입하는 낯선 효과를 자아낸다.


    그녀의 말은 신화의 사실들을, 곧 지나간 사실들을, 현재로 꺼내며 예언의 문구로의 형식을 획득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이미 벌어질 것’이지만, 그녀의 말이 이를 경유·선취함으로써 수행적인 힘을 가져가는 듯하다. 


    그녀의 말은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곧 미래로부터 과거의 현재에 당도한 그리고 이 과거의 미래를 예언하는 이 말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발화의 성격을 갖는다. 지나치게 침착하게 전쟁 이후의 일들을 설명함은 제3자, 초월자, 하지만 그녀가 갖는 그 겪었던 일들에 대한 온갖 정념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한다.


    이는 이 사건, ‘현재’의 시간, (수용자와의) 관계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 평범한 이들에게서 진정 ‘신화’가 되어 있는 셈이다. 


    전쟁으로부터의 아가멤논 왕은 관객에 ‘실재’로 틈입한다. 곧 과잉 장식적 음악이 튀어나오는 동안 관객의 입구로부터, 곧 관객의 사각지대에서 출현한다. 이 왕은 죽음을 환유한다. 생명 없는, 말 없는 전쟁의 바깥에서 전쟁의 결과를 기다렸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한편 수없이 떠난 생명들의 죽음에서 삶으로 빠져 나온다. 


    왕에게 삶은 그 자체로 ‘덤’이고, 따라서 그 외의 덤은 ‘지나친 잉여’일 뿐이다. 곧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진공화된 삶의 붉은 드레스가 만든 개선-길은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복속과 침잠이다. 그는 왕이 아닌 죽음의 노예가 된다. 삶의 잉여는 그 인공적 아름다움과 겹치면서 섞인다.


    마치 왕의 새로운 부인인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카산드라에게 ‘이질적인 것’들이 명령과 독백으로 뒤섞인다. 왕의 부하들의 회유 섞인 대리 명령에도 응하지 않고, 아폴론을 대뜸 찾는다. 그는 버림받은 인간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다시 꺼내며, 예언 이후 닥칠 효과들에 대해, 여전히 미약한 인간으로서, 운명의 예속을 이야기한다. 


    연약한 존재로서 예언하는 자의 타자(초월자)의 체현, 그 이후의 스스로를 다시 타자화하여 결국은 자신의 신체로, 또 이 가련한 운명도 그것을 허락해야 하는 한편으로, 타자화되는, 우리가 그 자체로 아는 카산드라 자신을 꺼낸다(이는 일종의 메타 층위이다).


    또한 이 현실의 자리로부터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곧 이 운명을 수용해야만 하는 뒤늦은 인식과 정의의 이 말은 오히려 피동(‘주어진 몸’)으로부터 미약한 능동의 태도를 정의 가능케 하는 측면이 있다. 


    카산드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입장(과 그 전달)은 중첩되는데, 카산드라, 그리고 그를 경유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타자화된 자신을 수용하고 한편으로 전유하며 운명으로부터 속박된 수동적 제물이 아닌, 이는 단순히 ‘사실’이고, 예정된 것의 실현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왕을 죽임으로써 곧 스스로 비극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반면 흐르는 피는 그 벌어졌음의 생생함, ‘팔딱거리는 생명’의 한 순간을 재현하고 있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죽임’을 선택했음은 나아가 운명의 한 부분이 아닌,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운명을 새롭게 보는 듯하다. 


    마치 삶 바깥에서 비약으로서 카산드라의 예언은 과감하게 그것으로 뛰어든, 그 운명을 과감하게 전유한 그의 몫의 어떤 또 다른 무엇, 그리고 시차적인 잉여로 당도해 있다. 이는 운명이 재현의 부분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에 상응한다. 곧 ‘운명’ 역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운명의 자리에 그 ‘운명’은 포함하는 것이 될 것이지만, 이는 아직은 ‘미래의 상태’일 것이다.


    실행·선택하기 이전까지 운명의 예속은 그 운명에 무감한 채, 단지 바로 그 운명으로 적극 뛰어드는 데 있다. 이를 피하려 함, 도망침은 운명에의 예속, 그리고 어떤 유예된 현실 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 ‘죽음’으로부터, 그녀는 ‘책임’져야 할 이성에 의해 심판 받아야 할 존재로 현상된다.


    운명은 비로소 그녀 삶과 결부되고 다시 그녀는 그 사회적 책임을 지는, 말들의 얽매임으로부터 응전하는 또 다른 주체로의 감행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2막


    푸닥거리는 그 제의 자체로의 집중을 꾀한다. 코러스 장의 김미숙의 구성진 목소리에 음가가 사라진 말의 높낮이는 이화(異化) 작용을 하며 현실로의 안착을 가능케 한다. 곧 이 제의는 비극적 운명의 직접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비껴나 있다. 


    오히려 그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그 자체의 생성과 치유의 몫을 가져온다. 이 잉여의 자장은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오누이를 무대에 세운다. 절규와 애처로움의 온도 차를 오가며 그리고 ‘함께’ 스스로들이 중심에 있는 사건을 ‘궁구’하도록 요청하는데, 이 운명의 아포리아에 놓인 그들의 운명을 (발가벗겨) 만인의 자리로 둔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운명을 수용한다. 선고된 운명에 휘감겨 있기, 그리고 이제 그 운명이 다가옴을 기다린다. 운명의 가장자리에서의 비주체에서 운명에의 주체로 경계 넘기를 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이는 제의의 매개된 자장으로부터 온다.


    남편을 죽인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요부로 오레스테스에 의해 번역되며 그녀를 처단하려 하며, 이는 다시 그를 키운 자신의 젖가슴에 칼을 꽂은 후 은혜를 복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어머니에 의해) 번역되며 그와 동시에 명령에서 애원의 발화로 옮겨가는 가운데, 마치 혈연적 얽힘보다 독대한 남녀의 욕망의 관점이 가로 놓이는 데서, 그 짓을 결단력 있게 끊음으로써, 분노 주체의 일관됨을, 그리고 운명의 예언을 지키는 자로서 합당함을 재전유하며 구현하기에 이른다.


    그 뒤에 죽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세상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신축성 있는 천에서 그 자취를 탄력적으로 드러내는데, 다만 그 망의 끝없이 늘어나는, 그래서 결코 그 경계를 넘을 수는 없는, 단지 그 장을 찢고 상반신을 드러내며, 여전히 삶-죽음의 경계를 주체의 영토로 점유한다.


    무엇보다 이 천은 신체의 순간적인 움직임들을 감싸고 또 버티며 분절된 신체들을 시차적으로 환유한다. 마지막으로 사라지며 손을 뻗으며 죽음으로의 깊숙한 영역을 상정해 낸다. 이제 진짜 진정한 끝으로서 죽음이다. 아니 죽음의 세계이다. 곧 죽음의 신체의 비분리된 영역, 신체를 상정하지 않는 영역임을 분명히 보여주며 이제 그녀는 ‘그녀’의 말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는 사유 불가능한, 부재한 장소가 된다.


    3막


    이제 그녀는, 그리고 그녀가 죽인 그는 죽임의 몫으로 치환되어서만 존재한다. 변론은 그 이상의 몫이다. 이는 대칭된 두 몫, 곧 팽팽한 의견의 나눔, 그리고 공격과 방어의 지속으로 이어지는데, 그 복수의 끝없는 연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여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복수는 또 신의 명령으로부터의 비-책임과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을 신과 인간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에서 각각 상이한 차원과 결부되어 구분되어야 한다. 더 정확히는 인간의 운명(에의 귀속)을 만들 수 있는 반면, 그것의 책임 소재는 또 다른 몫이다.


    실은 신을 경유하여 스스로를 복수 주체로 만들며, 신의 대리자로 인간의 자리로 숨음을 은폐했던 오레스테스는 신의 책임이 또 다른 영역이고, 인간의 책임 영역으로부터의 그 가려진 ‘인간의 자리’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곧 그는 늘 인간일 수밖에는 없었다.


    단지 이는 그가 어쨌거나 복수를 스스로 선택했고, 이 복수가 여전히 그의 행위의 동기가 정당한 만큼이다. 그 책임은 ‘풍문 같은’ 비가시적인 신의 영역에서의 법칙 아래 선택이, 이 하나의 (복수) 주체-되기를 성공시켰고, 이후 어떤 의미 지형도 형성하지 못한 채 신의 대리자로서 실은 그림자로서 남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으며 붉은 돌과 흰 돌로 관객으로 하여금 판단을 내리게 하는데, 관객은 이 끝없는 변론의 소용돌이에서 생각을 가다듬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만 실은 앞선 ‘대칭’의 돌은 계속 지켜졌는데, 붉은 돌이 오레스테스가 잘못했다는 의견이 한 눈에도 더 많이 보임에도 동등한 것으로 계산되고, 아테네의 의견을 기다린다. 아테네는 제우스의 아들 같은 딸로, 어머니가 없다는 점에서, 초월, 신적 자리를 상정한다.


    그녀는 남자의 몫을 대리하는데, 그녀에게 도전하며 또 응전하던 이들은 여성의 늙음, 어둠의 몫으로 자리하던 이들이다. 이는 성 밖 현실에서 이질적인, 비가시적인, 존재자들로, 마치 거리, 그리고 뮤지컬 <캐츠>의 고양이를 연상케 한다. 뮤지컬적 노래를 전유해 그것을 더 확실히 드러낸다.


    마지막은 1·2·3부 역할들과 (커튼콜에서의 배우로서의 자리)의 혼합된 양상을 만들며 차이와 상생의 끝을 치른다. 복수의 끔찍한 현실과 제의, 변론의 법정을 감싸는 하나의 거대한 틀인 셈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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