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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에이티브 VaQi <연극의 연습-인물 편>: '연극 너머로부터 연극으로'
    REVIEW/Theater 2013. 7. 16. 00:13

    현존과 재현의 시차


    ▲ 크리에이티브 VaQi <연극의 연습-인물 편> [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연극의 연습>의 시작은 배우들이 배우로서 현존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현재 너머의 역할을 궁구하게 한 채 이것이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환영으로의 프레임으로 넘어갈지에 대한 부분을 미지로 남겨 두고 있다.


     그리고 의자에 앉고 치루는 워크숍-공연은 일종의 낭독 형태로 재현 연극의 외피를 입는다. 그리고 환영적 빛 아래 한 명씩 부각된 채 연극의 일부를 내지는 삶의 일부를 재현한다. 굳이 재연으로 다시 들어가 둘(현존과 재현)의 간극을 크게 벌리는 이유는 뭘까. 이는 연극에 대한 패러디 자체인 것인가.


    각자 맡았던 연극의 인물이자 역할로 돌아갈 때, 거기에 가해지는 연출가인 이경성과의 인터뷰식 진행은 바뀌지 않는 대사의 일부를 모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재배치·재전유하는 셈이다. 배우는 (인물을 벗어나서) 인물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역할을 현재화하며, 배우를 곧 역할에 일치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경미는 실제 연극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역할에서 배우로 넘어오며 역할과 관련된 삶(의 과거)으로 돌아간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대화이고 관객을 전면으로 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느 순간에, 연극의 일부 그 자체이다. 반면 이는 역할의 말 너머 배우의 말 자체가 무대 배경과 다른 배우, 전체가 자리하지 않아도 연극이 성립함을 의미하는 듯도 하다.


     이는 그렇다면 역할 너머인가, 아니면 다시 역할로의 환원인가, 극에 대한 재해석쯤인가, 아니면 배우에게 그 자신 이상으로 역할은 그에게 체현되며 이는 역할이 단지 환영의 순간에 그치지 않음을 의미하기 위함인가.


    ‘현존의 언어’


    성수연은 이곳에 위치함(장소 특정적인)을 언급하며 현존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 언어는 관객의 몸을 타고 흐르는가, 아니면 언어의 자기 과잉에 불과한가, 이 말로 인해 비로소 그녀는 현존하는가. 최소한 이 현존은 어쩌면 이미 이 말이 일어나며 사라진다는 점에서(말로는 현재를 잡을 수 없다) 일견 공허하지만 반면 이후 머릿속을 떠돈다는 점에서 또한 진리 이전에 정의라는 측면에서 분명 ‘효과’를 낸다. 


    이 몸이 그렇게 정의됐음을 그리고 배우와 제4의 벽, 재현 너머 최소의 조건에서 출발함을 알리는 것이다. 연극은 이제 ‘지금 여기’로 소급된다(사실 이 말은 지극히 클리셰적인 것으로 자칫 환원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것, 아니 그보다 말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연극임을, 연극의 최소한의 조건은 말이라는 것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곧 몸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마치 신은 보이는 대신 들리는 것으로 먼저 존재했던 것처럼. 


    성수연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거친 후 이름은 ‘붕괴’로의 의미로 재구성된다. 사건의 기억은 누빔점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름은 시대의 편린을 안고, 사건은 나를 잠식한다. 이런 다양한 그녀에게 미치는 수행적 효과는 성수연의 담화를 구성한다.


    <당신의 소파를 옮겨 드립니다>에 출연하여(나타나서) ‘광화문 괴물녀’가 되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던 당시 상황, 곧 미디어의 범람의 시대에 연극의 외연 확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연극을 벗어났던 경험이 이어진다.


    배우라는 문턱 넘기


    ▲ 크리에이티브 VaQi <연극의 연습-인물 편> [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이어 ‘타인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관객’을 이야기하며 배우의 반대편에서 배우를 완성시키는 조건에 가 닿는다. 그렇게 성수연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 있고, 귀 기울이고 있는 ‘배우 이전의 관객’이 되고자 하며,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동시에 마치 똑같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누군가가 실제 된다. 곧 우리는 동등한 입장에서 놓인 것이다(참고로 이는 ‘서울연습-모델, 하우스’의 레퍼런스 차원으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성수연은 성수연-되기에 성공한 것인데, 이는 성수연이라는 배우 이전의 현실의 인물이, 곧 만약 그가 배우가 아니었을 때를 가정한 채 무대로 진입하며 얻는 ‘삶과 현실의 경계’ 허물기 따위와는 전혀 다르다. 이는 배우라는 문턱 자체를 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성수연의 논리는 나는 나이고 남이며, 연결된 존재로 나아가며 신으로 비약하게 된다. 그리고 타자의 윤리학은 곧 연극의 윤리학, 연극의 관성을 깨는 진정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하나의 주장이 된다.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연극이라는 최소한의 비가시적인 그러나 명백한 무엇임의 조건을 전한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현존(에)의 발화를 시도(반복)한다. 이는 현재를 붙잡아 두기 위한 미약한 시도이며 또한 찰나적 ‘말의 현존’(신체·공간·현재와 결합한)을 낳는다.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고 두 남자가 이질적인 성을 연기한다(이는 일종의 과잉이다). 이전의 상황과 확연히 다른 대비 지점을 만들기 위한, 연극과 연극 너머를 구분하기 위한.


    ‘배우’의 가장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물이 자신의 발화 시간을 갖는다.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에(현재 무대에) 서 있다”, 그녀가 서 있는 이유는 그녀가 ‘배우’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출가의 질문을 따라 그녀는 배우가 되는 직전의 지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연출가의 지시가 이 극 자체를 규정한다. 이미 배우가 왜 배우로 나왔냐는 질문은 통상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과 연극 너머 현실의 균열을 일으키며 오히려 연극을 벗어나기에 주력하며 그러한 의도가 담기는 것이다.


     엄마라는 아이덴티티에 대한 체감, 상실감, 교직에 대한 그리움 등이 튀어 나온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늦게까지 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자신의 의존적 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심리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답함은 삶의 권태와 무기력 그리고 갖은 증상으로 이어졌었다.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던 중 이북에 가족을 남겨 두고 결국 건너가지 못한 아버지에게 사촌 오빠가 자신의 친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버지로부터 심리적 거리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문제는,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소급된다. 그렇게 삶의 갑갑증의 무의식적인 원인은 이해되고 설명된다.


     이야기보다 인물이 인물보다 그가 배치된 형국이 더 중요하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그녀는 조곤조곤 합리적이고 담담하게 꺼낸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역할을 창조한 것이 맞다. 반면 그녀는 그녀 너머의 역할은 아니다. 이전의 ‘그녀’는 그러나 그녀로 변용되었다. 


    그렇다면 이는 배우의 지점을 형성하는가. 이는 그녀 삶을 상기하고 변주하며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녀는 보여주기 이전의 그녀를 구성하는 것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담담함은 그녀가 보여줌의 곧 배우 이전에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 동시에, 이 담담함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역할을 형성하는 최소한의 지지물임을 의미한다. 


    삶과 연극의 (불)일치


    이러한 수행적이며 동시에 장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말을 하고 있는 배우’로서 존재하는 이전 두 명의 배우와는 다른 부분이다. 이는 어쩌면 그저 한 사람의 진실한 이야기일 수 있으며, 한편으로 배우로 서며, 그것을 다시 연기 차원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여기에 분명 혼돈과 시차가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배우를 보는 것인가, 현실의 인물 그 자체를 보는 것인가. 이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들이 (지난 시기에서의) 배우와 현재의 그것의 전달자의 입장 사이에서 환영(배우)과 배우로부터 벗어나며 수행적인 전달자가 되는 것, 곧 삶을 이야기하며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를 들을 때, 그녀와 마주할 때 완전히 연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곧 여기서 ‘연극’은 삶을 꾸미고 번역하는 불순물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가령 삶은 삶 그 자체이며 연극은 이를 절대 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최고의 연극은 바로 삶 자체이다’ 


    어쩌면 이경성은 이러한 배치들을 통해 탈-연극이라는 것을 통해 연극과의 긴장을 발생시키며 새로운 연극으로의 경계 넘기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곧 모든 것은 중계(중개)되고 있고 또한 질료로써 또한 기능적인 측면으로써 연극의 경계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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