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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아시아 온천>: '유토피아에서 죽음으로, 다시 두 삶의 화해적 평면으로'
    REVIEW/Theater 2013. 8. 16. 01:47


    ▲ 연극 <아시아 온천>: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왁자지껄한, 달뜬 분위기의 현장, 연주가 더해진 과잉-공간으로 시작된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줄은 서낭당을 상정한다. 무대 가의 밴드가 대기하고 있는 ‘열린 방식’으로 연극을 구현하며, 어둠과 빛의 환영적 경계의 표지를 만들지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한다. 


    동시에 이 확 열린 무대는 카니발로 쉽게 변화 가능하며 연극이라는 것, 메타적인 연극의 규약을 지시하며, 변전의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가져감을 또한 의미한다. 이 열린 공간은 이제 의미의 숨김과 드러냄의 급작스러움이 없다. 공간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이 ‘총체적 구도’ 아래 말들은 자유스럽고, 발화는 다중의 텍스처가 중첩되고 한국과 일본 배우의 각자의 언어가 하나의 언어인 듯 통합되고 소통된다.


     이 섬은 갇힌 대신 우리에게 활짝 열렸으며 “손자를 위해서 이 땅을 지키”는 것은 미래로의 귀착을 향한 신호의 입구로, 문제는 온천이 무대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또는 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화하고 싶은 곳(유토피아)으로, 그리고 우리 존재의 무엇을 지시하는데 그 의미가 각각 일본과 한국에 달리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 가상의 무대와 존재의 교차는 한국과 일본의 가상적 교류를, 뒤섞임을 지시하며, 온천이란 기표를 전면에 부상하게끔 한다. 온천은 여기에 있(없)고 저기에 없지만 동시에 여기에 없고 거기에 있는 미래의 어느 한 자리에서 또 기원의 자리에서 만난다.


     사실 배우들의 말은 ‘잉여’를 향한다. 곧 ‘번역’이 이뤄지는 문장을 제하고는, 어떤 한국말의 애드리브는 현장에서의 발화로 (여겨지게 되며) 관객을 향한다. 관객들이 대사 ‘너머의’ ‘대화의 현재’를 기대하게 되고, 그 효과에 의해 서사의 내재적 구조와 흐름을 잊고 그저 현 순간을 즐기게 된다.


     이곳은 ‘어떤 경계도 형성할 수 없는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열린 공간’의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2막에서는 온천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결사적인 반대, 자기 땅이 정치 투쟁의 특정 지점이 되며 갖는 생소화 효과,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 아닌 상태에서 단지 하나의 목소리로 정의에 다가서는, 이 주체의 비-주체 되기, 반면 이곳과 상관없는 일본인들은 이미 이 땅의 권리를 이미 선취한 상태에서 그것이 진정 이뤄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계속 유예되는 상태, 이 교환할 수 없는 무엇, 획득되지 않는 무엇의 이 인접함의 자리에 연극의 이념이 있다. 



    외설의 키스와 사랑 행위로 결코 외부를 상정하지 못했던, 단지 그들의 외부만 존재했던 두 뗄 수 없는 사랑, 카케루의 동생 아유무(조성하)와 종달이(이봉련)는 예외 없이 죽음을 맞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대로 전유한 채 하지만 이 죽음은 화해의 효과를 당장 낳기 전에 그저 공허한, 화해 불가능한 자리에서, ‘떠도는 영’으로 영원한 자리를 기입한다. 이는 고향이 없는 자의 ‘보편성’을 띤 채 끊임없이 떠도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죽음의 외상은 종달이 아버지에게서 체현된다. 곧 귀가 들리지 않는다. 이는 외부로 확장할 수 없는 내적 공허와 현존의 완전함을 차지한다. 애도 불가능한 영역은 죄의 씻을 수 없는 속죄 불가능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오히려 이 죽음을 수용하지 못한다. 


     이 죽음은 그의 탓인 만큼 잊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다. 죽음은 곧 영혼의 어느 한 자리로 현실에 틈입하(지 못하)며 가장 공고하게 일본인의 자리를 허락할 수 없던 아니 ‘자신’의 땅을 지키려 했던 대지의 몸을 타고, 그리고 그에게 또 다시 동생의 죽음의 원인을 수여하고, 애도의 영역에 그제야 들어설 수 있던 아유무의 형의 슬픔이 우리의 가슴에서 내파할 때 이러한 슬픔의 전도는 동시에 교환 불가능한 (사실 둘은 여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두 죽음이 등가되고(죽음의 형식이 실상 죽임의 외부 같은, 죽음의 깨달음의 두 배의 효과로 산출된다는 점에서) 두 나라-사람의 합치되는 하나의 영역을 상정한다. 



    이 공통의 한을 죽음과 속죄의 과정 끝에 얻어지는 무엇으로 성과 속에 경계 너머로 나아가게 된다. 이 대속은 제3자에 의한 것이며 일본인의 의지가 우리의 땅의 죄를 봉합(은폐)하며 우리 땅에서 피어난 온천은 그 실제적인 무엇이 아닌 가상의 자리로 늘 잠재했었고, 이전의 그 우리의 땅을 재표상하며 동시에 일본인의 희망이 (우리의) 삶의 영역으로 건너올 수 있음을 상정하며, 늘 무대(마을)에 잠재해 있던 ‘온천’은 갑자기 희망의 표지가 된다. 땅에서부터 지상으로, 불모지에서 희망으로,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다음은 이 공통의 합치된 영역으로 갑자기 껑충 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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