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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을 듣기, 침묵에 말 걸기>: '사운드, 발화, 이미지의 비동시적 접속'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8. 31. 09:08


    ▲ 지난 23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침묵을 듣기, 침묵에 말 걸기>


    수직으로, 수평으로 패닝되는 이미지 속에 신체는 흩어졌다. 심보선 시인은 자신의 시들을 읽으며 이 이미지들을 숏의 문법으로 치환했다. 한 구절 읽고, 흐름이 끊기는 단위에, 내지는 자신의 호흡이 끊기는 지점에서 (비)의식적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곧 이는 말들의 재현에 있어 그 언어 단위의 규칙에 의해서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그러나 의도적이지 않은 숨에 의해 시는 우연적으로 영화와 헤어졌다. 파트타임스위트(Part-time Suite)의 음악은 꽤나 가볍다. 영화가 아닌 영화관을 물리적으로 채우며 그들의 시선이 신체와 엇갈린 심보선과 달리, 영화관을 향한 것처럼 음악은 영화를 관조한다. 또한 맴돈다.


     영화의 이미지들이 비현실적인 것만큼 시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초현실적 정서들을 발현하는 듯했다. “동요하는 눈동자와 망설이는 입술”(「전락」), 말의 이미지는 영화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결합했다. 창살을 두고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클로즈업)과 광인-댄서가 마주하는 순간 존재와 존재가 교류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는 말이 없는 무성영화에서 두 사람의 캐릭터와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 이 창살의 직선성은 이 시차적 관계 이미지와 결합하는 가운데, 앞선 영화 처음의 패닝 구도의 흔들림에 상응하며, 주제적으로는 광기를 붙잡아 두는 이성과 합리의 불합리성과 간극을 제시하는 것에 가깝다.


     어느 순간 음악과 목소리 또한 멈춘다. 거리로 사람들이 나서며 어두운 폐쇄 공간을 벗어나 빛이 비치는 순간이다. 존재(자)들의 표정은 활력이 넘치고, 비로소 말이 생겨났고(물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본다), 추상이 아닌 들리지 않는 구체들이 발생했다. 앞선 광녀는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되고, 이는 햇살이 가져온 이성의 어떤 흐름에 의한 것인데(물론 이를 말도 안 되는 은유라고 지적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일반적인 내러티브에 고착되지 말자 이미지들이 밀고 오는 어떤 흐름과 힘을 보자 이 영화를 그렇게 만만하게 취급하지는 말자’이다) 의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려다보지만, 수심이 짙은 반면, 여자는 위에서 내려다보임에도 눈을 치켜뜨며 그것이 갖는 중압감(을 주는 시선)을 단락시킨다.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종교에 관하여」), 이는 영화의 장면을 해석하고 전유한다. “알레르기”·“파멸”이 한데 묶이기도 한다. “너를 잊기 위해 개종하였다”, 다시 시작된 사운드(응당 판을 갈아엎고 다시 시작한다)는 용수철 파동처럼 제어 불능으로 튕겨 나갔다. 이는 스크린의 표면을 그 ‘공고함의 물질성’을 외부로 전도하는 듯했다.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여, 자로 끝나는 시」) 때 창살에 갇힌 사람들은 괴물처럼 보인다. 드라큘라 같이 이빨의 날카로움이 카메라의 비스듬히 올려 찍는 각도의 변형으로 우악스럽게 강조되며 우스꽝스러운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이 부딪치고 싸우는 화면이 들썩이는 반면, 평화롭게 홀로 여자는 춤춘다. 이는 마치 시간이 환영적 시차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균열적 리듬, 동시에 빠른 편집(영사기 돌림에 상응하는)의 리듬은 심보선의 언어와 맞물리고, 음악은 한편으로 희화화되는 이미지들을 그 상태 속에 두고 흘려보낸다.


    ‘소리-없음’의 이화 효과가 소리를 그것과 멀리함으로 이중의 이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심보선의 시는 발화로서, 가끔씩 영화와 사운드를 비집고 살아나기도 했는데, 잠시 멈췄다가 영화를 지시하는 언어를 흠칫 놀랍게 반응시킨다.


     할아버지는 열쇠를 들고 갇힌 여자에게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을 인식시키려고 하는 듯 보이지만,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한다. 애초에 그에게 자유롭지 않은 자리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길한 사운드’의 안개 같은 방사, 시와 절합되는 대위의 화면, 이는 미친 딸(딸인지 손녀인지 또는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친연적인 관계이며 운명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임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는 사유보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에 따른다)을 억지로 끌고 나오고 사운드의 리듬 역시 달린다.


    “텅 빈 시간” 동그란 실루엣으로 부각되는 ‘아버지와 딸’은 병동 안에 갇힌 셈이 되고, 철창 밖 ‘좀비-신체’들이 있고, 할아버지와 의사와의 싸움이 일어나며 이성과 광기의 경계를 확인하고 무너뜨리는 가운데, 이 상황에 의식 없는 비주체의 하염없이 웃는 딸, 무언가의 의지가 전이되어 명령 수행자의 역할에 침잠된 치안 유지자들, 그들은 한편 ‘좀비’의 끈적끈적한 욕망의 시선들과 양분되며, 그 안에서 할아버지는 딸을 도피시키고자 한다.


    ‘이성의 빛’에서 착시에 뒤틀리며 그는 이후 흐릿한 일차적 프레임에서 딸을 잡고 사투를 벌인다. 그 위에 프로펠러의 돌아감 따위의 이차적 프레임이 깔린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고 고양됐던 방식은 경쾌한 비트로 치환되어 클라이맥스 단위를 벗어나 신선하게 영화를 환기시킨다.


     가면을 쓴 광녀, 가면을 쓴 사람들, 할아버지 또한 쓰고 있고, 웃긴 탈을 쓴다. 곧 할아버지 혼자 주체이다. 그 혼자 표정의 변화(웃음)를 보이기 때문이다.


     비트의 소멸, 그리고 (단순하게) 꺼진 스크린으로 수렴됐는가 하면, 드럼이 과잉으로 따라 붙었다. 그리고 새롭게 음악이 시작됐다. 심보선 시인을 비추던 스탠드의 노란 조명이 스크린 오른쪽부터 살포시 물들인 가운데,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전유하며, 그것이 꺼진 뒤 비상구 조명으로부터 비롯된 에메랄드빛 스크린의 한 쪽 부분에서부터 퍼진 스크린을 전유하며 음악이 시작되고 또 새로운 막을 얻었다.


     앞선 영화 속 이미지들은 파쇄 되어 압축된 덩어리를 또는 텅 빈 형식으로서 어둠을 사유하며, 그럼에도 결국 음악은 계속 그래 왔는지 모르지만, 그 자체의 형식을 만들었고, 배경음악의 종속된 지점을 벗어나 하나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파트타임스위트는 시작했을 때부터 그 자체로 기능하고 있었다. 영화와 따로 떼어놓아서도, 반면 영화와 합치되며 상승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영화가 음악의 보완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서 말했듯 이 음악이 독립적으로 작곡된 곡들이라면 연주를 할 때 부가적인 부분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냥 이 음악만 연주될 때 허전해지지 않을까.


    - 토크 정리 -


    심보선 : 영화 속 1920년대 정신병동을 다룬 상황이 지금의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의 박준이라는 미친 주인공을 떠올렸다. ‘예술’은 침묵을 듣고 또 다른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영화 속 정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침묵을 침묵으로 두지 않고 정상(소리/언어)으로 만들려는 고압적인 의사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 영화 안에는 음악이 있는 것 같다. 역동적인 편집이고 춤이 있어 음악이 있는데 지운 것 같은 느낌이 있고, 무성영화인데 심리극 같은 느낌이 있다. 


    비교적 광기가 있는 (자신의) 시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에 목소리와 캐릭터를 부여하고자 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그러한 불일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 사람의 목소리와 캐릭터라고 믿어 버리는 현상을 갖게 되는데, 이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게 만들며 또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고 시를 다시 만들고 감정이입을 하며 일종의 2차 창작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을 했다.


    파트타임스위트_이미연 : 텍스트 정보가 전혀 없는 영화였는데 오히려 이미지만 보는 그러한 방식이 개인적으로 낯설지 않았다.


    유운성 프로그래머 : 한국에서 무성영화를 할 때는 부수적인 음악이 되는데 해외에서는 그 지역의 실험음악가들을 불러 연주하는 경우들을 보며 흥미로웠다. 가령 굉장히 고전적인 멜로드라마의 무성 영화가 상영될 때 스크린에서 등을 돌리고 관객들 중 일부는 눈을 감고 음악만 듣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이 부수적이지 않은 영화에 음악이 대항하는 것도 가능한 형태로 진행하고자 했고, 연주하기 전에 일체 만나지 만고 당일 날 만나서 보자고 했다.


    파트타임스위트_박재영 구성원 중 이병재 씨가 듀오로 음악을 재구성하며 할 수 있는 음악과 없는 음악을 나눠 새롭게 작업했고, 당시 연주했던 바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지난번과 달라지게 됐다. 연주 중 기억나는 부분으로, 직감적으로 감각적인 차원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고, 정신병동 안의 사람들이 카니발처럼 될 때 연주도 그에 따라 미쳐주고, 이미지가 강해졌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그냥 (관객이) 보게 했던 것이다. 


    파트타임스위트_이미연 : 연주 중간에 사운드를 없애고 이미지를 보게 하는 것은 감독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에 가깝다.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했을 때와 굉장히 다른 부분은 이번 퍼포먼스의 경우 화면이 압도적이면서 매혹적으로 비치는 거리를 형성하는 느낌이 들었다.


    심보선 : 실제 영화와 언어의 싱크를 맞추기 위해, 시간을 재서 화면의 시간 정보를 시집의 페이지 정보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진행했던, 영화에 맞춘 시 정보의 포스트잇들이 떨어져 나간 관계로 재작업을 해야 했고 따라서 재현의 양상을 또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리허설 없이 했는데 결과물이 만족스러워서 반복하려 했지만, 기록했던 바가 전혀 없어서 기억에 의존하고 또 책을 다시 보며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퍼포먼스를 했을 때 화면을 뒤돌아 봐야 해서 잘 안 보였고 결과적으로 관객에게로 시선을 옮겨 가기도 했다.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가운데, 음악의 양상도 달라짐으로써 시를 다 읽지 못하거나 하는 변수가 생겨났다. 


    낭독도 일종의 공연과 같다. 상황·기분 등에 따라 같은 시가 달라질 수 있다. 음악이 들어오면 사실 읽으면서 비트를 두고, 음악과 함께 놀려고 한다. 발을 두들기면서 시를 읽었고 오늘은 음악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시를 읽었다.


    시를 쓸 때 무수한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데, 영화도 그 중 하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역된 자막의 영상과의 불협화음 같은 것이 자극을 줄 때가 있다. 이를 바르트가 좋은 책일수록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딴 생각을 하는 것은 그 친구와 사이가 좋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다는 것과도 유사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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