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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수현 안무가의 <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I want to cry, but I’m not sad)>의 안무 패러다임에 대한 접근
    카테고리 없음 2017. 1. 13. 11:52

    수행사로서의 제목

    <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I want to cry, but I’m not sad)>(2016)[사진 제공=황수현 안무가](이하 상동)

    제목인 <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I want to cry, but I’m not sad)>(2016, 이하 <눈물>)의 “울고 싶지만, 슬프지는 않다.”는 뜻의 문장은 공연의 시작을 꾀는 제사(題詞)이자 수행사(遂行辭)로서의 퍼포먼스 자체를 지시한다. 보통은 슬픔이 울음의 전제 조건이자 인과의 선행 요인이라면, 이 퍼포먼스 안에서는 울음을 슬픔 가운데 생성하지 않는 것, 곧 울음을 슬픔과 상관없이 작동케 하는 것이 주요한 전제가 된다.[각주:1] 한편으로 여기에는 왜 울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가 가늠되지 않는다. 곧 각각의 퍼포머/무용수마다 울음을 쥐어 짜내는 기술의 시현 정도로 나타나는 퍼포먼스는, 그러한 기술 자체가 안무로 작동하는 것까지만을 다루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곧 퍼포머 개개인의 감정 양태 자체는 울음의 유인은 될 수 있지만, 퍼포먼스의 본질을 이루진 않는다.

    여기서 “슬프지는 않지만, 울고 싶다.”라는 문장의 도치형으로 제시된 제목은, ‘울고 싶다’는 어떤 단일한 감정 양태를 기술하는 데 그치기보다, 우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데 있어 슬픔의 감정 양태가 빠져 있음까지를 설명으로 덧대고 있다. 이는 관객에게 체현되는 반응 자체이기도 하다. 1시간의 절반 이상 퍼포머들은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동작들을 곁들이며 울음을 쥐어 짜내는 가운데, 관객은 자연히 그들을 보며 신체 생리적인 반응을 일으키기에 이르지만, 그것이 슬픔에 대한 서사를 구축하지는 않는다. 곧 수행사로서 제목은 퍼포머와 관객 모두를 지배하게 되는데, 어떤 측면에서 안무가의 기술(技術)은 그러한 문장의 발명 혹은 완성 그 자체에 있다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안무가는 안무 동작들의 개발이나 구체적으로는 리서처로서 울음에 대한 메소드나 기술, 각종 리서치를 제시하며 움직임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짜내는 데 주력하는 것보다는 일정 정도를 그들에게 할당하고, 나아가 각 무용수/퍼포머의 각기 다른 기량과 기술의 과정적 양태들을 공유하며 그것을 전시 공간과 동선에 맞춰 배치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퍼포먼스와 흥미로운 대구를 이루면서 그 전신(前身)이라 할 만한 시각예술가인 구동희의 <비극경연대회>(2003)는 11명의 전문 연기자들을 하나의 긴 테이블에 앉히고 비극 속 역할을 동시에 연기하게 해서 말과 울음(슬픔)이 멈춘 연기자들이 중도에 포기하며 자리를 떠나는 가운데 끝까지 남은 연기자가 승리하는 게임 과정을 카메라가 심사위원의 시점으로 따라잡으며 지켜보는, 극적 전개 양태를 다큐멘터리적 시각으로 반영해낸 영상 작업이다.[각주:2] 과거 그리스의 실제 벌어졌다는 비극경연대회를 모티프로 하는 <비극경연대회>를, 황수현의 퍼포먼스는 퍼포머와 관객 간의 시공간의 동시성으로 옮긴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울음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동시적인 양태에 대한 기록된 영상과는 달리, 한 명씩 각자의 장을 펼쳐내며 그들의 현전이 부각되는 실시간의 현장에서 순차적이면서도 중첩되는 퍼포머들의 움직임 양상을 입체적으로 엮어 내는 과정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편집적 의식으로 갈음되는 지난 작업들

    황수현의 최근 안무 작품들은 퍼포머들의 역량을 안무의 배치적 구문 아래 재작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가령 <저장된 실제>(2014-2015)나 <소설화하는 몸>(2014)은 일정한 시간의 편집 지점들을 가진 동작들의 멈춤과 시작은 시공간의 연속과 횡단을 가시화한다. 곧 안무는 움직임의 정교한 틀 아래 노정된다. 한편으로 이는 제목이 하나의 개념적 구문으로 연장되며 작품의 얼개를 드러내거나 또는 추정하게끔 한다. 세 개의 다른 방에 각기 다른 퍼포머들이 움직임을 선보이는 <저장된 실제>에서 장홍석은 스톱모션 같은 움직임은, 이전 작품인 <소설화하는 몸>과 유사성을 띤다. ‘실제’는 물리적으로는 각각의 방에 저장돼 있고, 관객은 그 방에 들어감으로써 ‘실제’를 마주할 수 있다.

    장홍석의 경우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어둠이 가로지르며, 전자와 후자의 움직임은 A-B의 선후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A-A의 기시감 어린 시간을 낳거나 A-C와 같은 점프컷의 형태를 띠며, 공영선의 경우 촘촘하게 움직임을 공간에 기입하되 뒤로 발을 걷거나 상하체가 뒤바뀐 형태를 만드는 식으로 경로를 비껴나며 따라서 그 경로 자체를 인식하게 하며, 강호정의 경우 갑작스레 몸을 무너뜨리거나 체중을 실어 점프해서 바닥에 소리를 크게 내는 등 공간 전체를 커다란 충격으로 덮으며 움직임의 커다란 낙차를 안기는데, 이러한 세 공간에서 ‘실제’란 분절된 ‘장면’들의 연장으로서, 여기에 관객의 의식이 개입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영상 다운로드 사이트 주소가 관객 휴대폰에 저장됨으로써 ‘저장된 실제’는 각자의 방으로 이전된다. 곧 실제가 저장‘되는’ 과정을 관객의 의식으로부터 유도하는 작품은, 다시 초기 물리적인 매체의 이전(‘방에서 휴대폰으로’)으로 소급된다. 이는 저장‘된’이라는 피동형이자 과거형으로써 이뤄진다. 방과 휴대폰 안의 두 저장‘된’ 실제 사이에 저장‘되는’ 관객의 의식적 실제가 있는 셈이다.

    반면 <소설화하는 몸>은 분절된 동작들의 시계열적 구축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 몸들이 실시간의 편집점을 띠고 구성되는데, 이는 현재형이자 능동형인 소설화‘하는’ 몸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안무는 움직임이 어떻게 서사/편집의 역량 아래 관객의 의식을 따라 구성되느냐, 구성될 수 있느냐의 지점과 맞물려 있다. <눈물>의 특징/차이는 제목이 작품의 어느 정도의 단서가 되는 것에서, 한층 더 나아가 작품 자체를 설명한다는 것인데, 이는 울음과 슬픔이란 두 다른 개념을 하나의 문장으로, 나아가 작품에서의 변별적 차이로 가져가면서 가능해진다. 곧 울음과 슬픔에 대한 하나의 주체가 아닌, 울음과 슬픔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주체를 어떻게 대상으로 만드느냐, 혹은 실험상 두 변인의 통제 여부가 여러 주체들에게 어떻게 다른 양상의 발현으로 나타나느냐의 측면에서 울음과 슬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어이다.

    공간의 분포로써 구현되는 퍼포먼스

    ’예기치 않은’이라는 제목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다원예술 퍼포먼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 <눈물>은 안무 작업이 전시장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제하고는 특별한 다원예술의 요소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예기치 않은》(2016)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이 장르 간 교류와 예술적 실험을 확대하기 위해 다원예술의 형태로 장르와 형식의 한계를 넘고자 시도하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는데, 참여한 총 13팀에는, 온전히 미술가가 중심이 된 설치 작업(고재욱 <Die for>)도 있지만, 황수현을 비롯한 조형준, 김보라&김재덕, 이재영 등 안무가들의 참여 비율이 두드러지는데, 실제 타 장르 영역의 작업에서 퍼포먼스를 실제 수행하는 이들은 무용수들인 경우−가령 안데스의 ‘시체옷’ 시리즈나 김숙현&조혜정, 진달래&박우혁, 김뉘연&전용완, 태이 등의 작업−가 많다. 한편 실험음악 작곡가인 마티아스 에런(Matthias Erian)과 공동으로 작업한 김정선 안무가의 작업도 있다.

    스크린을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일부분 조형준 안무가를 퍼포머로 쓰지만 연주가 주가 되는 이태원의 공연을 제한다면, 대부분의 작업에서 안무가의 작업이 전시장에서 열리므로, 또는 미술가의 이미지가 무용수에 의해 구현되므로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무용가와 미술가의 협업 양상이−단순한 형식적 결합이 아닌−다원예술의 양식을 보증하는가의 문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연 어떤 ‘예기치 않은’ 만남을, 또는 장면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다른 장르 아티스트나 타 분야 전문가와 협업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황수현의 안무가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것은, 안무 작업과 전시장이 만나는 것은 다원예술이라는 층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황수현의 안무는 두 차례의 공간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다−곧 세 개의 장으로 퍼포먼스가 나뉜다. 퍼포먼스는 마치 열린 공간의 축을 따라 흘러가는 감각을 자연스레 주는데, 먼저 1전시장의 열린 구조에서 퍼포머와 관객이 구분 없이 뒤섞여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한 명의 퍼포머가 울기 시작하고, 이윽고 벽면을 향해 이동하며 2층에서부터 1층으로 이어지는, 단정하게 정렬된 네모난 프레임의 사진들이 걸린 벽을 마주하고 1층에서 감지되는 퍼포먼스를 향해 계단을 따라, 2전시장의 좁은 공간, 비교적 닫힌 공간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퍼포머들의 각기 다른 움직임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명씩 음계를 이루며 이동하며 2전시장의 작은 방들을 통과하다 어느덧 바깥 공간으로 나아간 퍼포머들을 따라가며 관객 역시 제법 속도를 내게 되고, 지하 데스크 쪽 공간에서 퍼포먼스가 마무리된다. 

    화이트박스와 블랙박스의 교란 혹은 중첩

    극장은 통상 시작과 끝을 관객이 앉아 있음으로써 완성한다면, 황수현의 퍼포먼스에서 볼 수 있듯 전시장은 공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관객이 이동을 통해 겪어냄으로써 완성된다. 극장에서의 막이나 조명에 따른 공간의 변화는 별도의 장치 없이 공간의 이동으로 가능해지는 셈이다. 한편으로 전시장에 걸린 전시 작업이 퍼포먼스가 이뤄지는 동안 어떤 변주도 겪지 않는다는 점−전시 작품들이 퍼포먼스에서 지시되거나 거론되지 않는다−은 특이한데, 곧 황수현은 굳이 전시장이란 공간을 씀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전시나 나아가 통제된 동선과 자율적 주체 사이에서의 미술관의 관(람)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며 미술 담론 내 제도 비평적 성격에서 작업을 잇기보다는, 단지 미술관을 텅 빈 공간처럼, 물리적 지형처럼 사용한다. 이는 처음의 순간을 제한다는 가정하에서다. 가령 미술관의 관객들이 전시장 벽면에 걸린 전시들을 보며 텅 빈 유령처럼 위치할 수 있다는, 곧 작품 외에 빈 공간만이 있는 매우 질서 정연하며 새로울 것 없는 화이트 큐브의 전시 방식에서, 전시품들에서 눈을 돌려 관객들을 헤집어 가는 시각을 가질 때 관객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자 최종 심급이 되는 첫 번째 순간은, 미술(관)과 안무가가 만났을 때의 ‘예기치 않은’ 유일한 순간이 된다.

    가령 전시의 연장이자 그 대안으로서 관객에게 체현되는 충격을 가하는 식으로 작용하는 퍼포먼스가 미술 담론에서 갖는 특별한 위상은, 이미 70년대를 기점으로 성행했으며, 극장에서 무대와 관객의 구별 없는 경계를 구성하기 위해 하나의 밀폐된 공간(으로서 블랙박스)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거리로 나온 예술의 형태 역시 70년대 이미 성취된 반면, <눈물>에서 전시장을 (전시들이 비워진 무정형의 공간 차원에서) 극장으로 바꾸고, 다시 극장의 무대가 해체된 (따라서 배우/전시품과 관객/관람객의 경계가 없는 특정한 장소로서) 전시장을 고안한 것은, 전시장과 극장을 서로의 층위에서 이중으로 해체하고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작 지점은 전시장을 배신하고 극장을 배반한다. 곧 빈/하얀 공간(이라 믿었던 미술관)을 관객이 서 있는 중심으로 만들고, 닫힌/검은 공간(으로 여겨졌던 극장)에서의 비가시적인 관객을 주체로 현상한다. 

    무용의 표층주의적 진리

    극장에서 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김이 보는 주체의 몸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한다면, 이는 다시 보는 주체의 ‘대상’으로서 퍼포머들의 위치를 상정하게 된다. 곧 슬픔 없이 눈물을 흘리는 자동 기계로서 퍼포머들은 춤의 주체적/자율적 발현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일까. 먼저 홀로 울음을 길게 터뜨리는 최민선은 시청각적인 표지로서 관객과 무대의 분별을 만든다. 관객과 퍼포머의 혼종된 경계 없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연기로써 눈물의 퍼포머를 둘러싼 극장을 만들고, 다시 몸은, 공간은 이동한다. 그리고 벽 사이에 둘러싸인 퍼포머와 관객들이 마주한 가운데, 각 퍼포머들은 서로 다른 액션을 취한다. 

    모두는 원을 이루며 서로를 탐색하고 견제하기 시작한다. 이후 원을 넓히고 한 명씩 원을 가로질러 나와 액션을 취하는데, 현지예는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감정을 잡거나 허리를 뒤로 꺾으며 어떤 고통의 임계점을 만든다.[각주:3] 최승윤은 몸통을 비틀며 팔을 좌우로 쳐내며 동시에 교성 혹은 괴성을 낸다. 강호정은 허리를 숙이고 방방 뛰며 바닥을 울려댄다. 임정하와 황다솜은 얇은 투명 비닐을 사이로 얼굴을 맞대고 부비며 몸의 중심을 부단히 이동한다. 최영탁은 특별한 행위 대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편이다. 여기서 슬프지 않지만 눈물을 흘려야 하는 미션은, 시작 단계의 제시와 같이 즉자적으로 실현되는 대신 눈물에 다다르는 과정적 시도들로서 움직임과 미연의 관계를 맺는다. 어떤 집단의 유희적 몸풀기 이후 각자의 신체적 고투와 맞물려 여러 동작들로 재구성된다.

    무용수들은 집단으로 똑같은 군무를 형성하지 않으며, 어떤 컨텍스트도 잠재하지 않는다. 동작들은 명확하게 분석 가능하다, 곧 시선에 의해 분쇄될 수 있다. 마치 ‘사물’처럼 퍼포머들의 몸은 명확하고 선명하게 기능하고, 단지 하나의 제사와 연결해서 그것에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무용수들의 움직임, 몸은 미국의 현대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가 제시한 ‘안무적 사물(choreographic objects)’[각주:4]이란 개념과 미술관의 ‘미니멀리즘적 대상’이 겹쳐지는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 대상을 마주한 관객으로부터 ‘여기, 지금’의 감각을 체현하며 텅 빈 미술관을 특정한 장소적 지점으로 생성하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미니멀리즘의 시작 지점[각주:5]으로부터, 한정할 수 없는 수직의 높이를 안고 관객을 비집고 들어서며 시작되고, 텅 빈 공간을 시청각의 물리적 감각들로 채우고 상기시키며 공간 안의 배치만으로 구성되는 모듈화된−동시에 하나의 서사 안의 연관된 캐릭터들로서가 아닌 퍼포머 각자의 행위들이 전면에 배치되는−동작들의 단위를 가진 퍼포머들은 하나의 사유적 구문과의 연관성만을 띤다.

    슬픔이 없이 눈물만이 있다는 하나의 미션이자 안무의 규칙은, 감정(내면)이 없는 수동적인 캐릭터에 대한 은유가 아닌, 그러한 감정(을 연기하는) 대신 신체의 움직임(눈물 생성하기)만으로 치환된 수행성을 가진 몸 자체를 낳는다. 따라서 ‘슬픔이 없음’은 단순히 작품의 주요한 구문의 반절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감정(본질)을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한편으로 진정성(의 연기)과 표층의 대립을 전제로 하는−춤의 심미적 표현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기이며, 즉자적인 구문들로 나타나는 춤의 표층만이 실은 춤의 전부임을 선언하는−그 여남은 감상은 관객의 몫이 되는−곧 그 심층이 하나의 허구적 진단이자 유령임을 지시하는 안무에 대한 테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슬프지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퍼포머에게 할당된 미션은, 명제의 사실 차원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가령 슬픔이 눈물의 충분조건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거나 그 두 개의 상관관계를 파쇄하려는 것−또한 퍼포머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적 이력의 연관 속에서 감정을 순간적으로 쥐어짜내서 눈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적인 측면의 컨텍스트로부터 스스로가 거리를 두게 하며−여기서 퍼포머는 자신을 눈물로서 완성하거나 눈물로써 구현하기보다, 자신의 신체적 표현 기제로서 눈물의 메커니즘을 실험하며 신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데 가깝다−따라서 관객 스스로 신체 표현을 하는 각각의 무용수들을 개인사(史)적인 이력으로 소급시키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각주:6]

    신체의 ‘기술’(技術/記述)

    신체적 배설물로서 눈물을 흘림을 주요한 모티프로 한 것은, 2006년 한국을 찾았던 얀 파브르(Jan Fabre)의 <눈물의 역사(History of Tears)>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얀 파브르가 신체의 모든 표현을 춤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실험적 시도로서 무용수들이 배설물을 쏟아내는 무대 위 행위들을 구현했다면, 황수현의 작품은 눈물이란 물리적 대상이자 환유의 표지를 슬픔이란 추상적 대상이자 은유의 기호와 분리시키는 하나의 구문 아래 개별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이는 일상의 행위가 아닌, (하나의 명제를 신체적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기술(記述)의 기술(技術)이며 동시에 (눈물을 내는 메소드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기술(技術)의 기술(記述)이다. 이는 한편으로 제목에 따라 진정성이 부재한, 진정성을 가늠할 수 없는 연기이며 신체의 ‘기술’(技術/記述)인 것이다.

    <눈물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를 ‘눈물’의 심급으로 재정초하는 가운데 결코 등장하지 않았던/등장할 수 없었던 신체 표현을 (춤으로 지시함을) 통해, 무대의 이면으로 (기존의) 춤을 발가벗겨 세운다면, 황수현의 작업은 연기에서 내면을 벗겨내는 실험을 하고, 표현주의적 심상 대신 기술(技術)적 표현으로 움직임을 치환하며, 눈물의 감정을 관객에게 안기는 대신, 눈물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퍼포머로부터 도출하며 눈물을 기술(記述)한다.[각주:7] 신체적 표현으로 축소된 대상의 자장은 전시장이라는 빈, 그리고 복잡한 이동 환경에서 관객에 끼어들거나 관객을 가로지르며 관객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해체, 재구성한다. 이제 세 번째 장은 일종의 음계들이 되어 공간에 입체적으로 악보를 그리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며 전시장의 작은 공간들을 통과한다. 관객은 빈 공간을 체감하며 무용수들을 좇고 여러 방을 건너는 가운데 시차적으로 무용수를 마주하거나 혹은 그들의 부재를 계속 확인하게 되며, 이윽고 전시장 복도의 빈 공간에 도달한다. 이후 무용수들은 마치 눈의 부재를 안고 공간을 거닐며 눈물의 대기에 손을 향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앞선 밝은 환경과 대립되어 어두침침한 환경은 그러한 대기를 건져 올릴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주는 듯하다.

    퍼포먼스의 이전(移轉)과 이전(以前)

    황수현의 <눈물>은 안무의 과제를 심미적 움직임들을 통한 춤의 극적 실현이 아닌, 하나의 모순적 명제의 실험적 구현으로 두고 각 무용수들의 표현 양상들을 기술한다. 여기서 움직임은 감정의 즉자적 분출이 아니며, 감정은 캐릭터의 극적 정체성 혹은 퍼포머의 개인적 이력을 설명하지 않는다. 동시에 공간의 적응은 퍼포먼스의 중요한 전제가 되는데, <눈물>은 전시장의 극장화를 통해 이뤄지는 대신, 전시장 내 관객 침투나 교란을 통해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재설정하는 등 전시장을 적극 활용해 기존의 극장을 해체한다. 이와 같이 퍼포먼스에서 관객의 신체에 체현되는 감각이 전시장과 같은 환경에서 가능한 관객과의 물리적 인접성으로부터 온다면, 또한 감정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배제한 수행사로서의 문법적 언술의 신체적 구현으로부터 온다면, 그리고 매끄럽거나 추상화된 움직임 대신 파편적이고 즉물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온다면, 기존 극장의 텅 빈/충만한 블랙박스의 제도 아래서 안무는 어떻게 유효할 수 있을 것인가.

    황수현의 지난 퍼포먼스를 달리 보면, 관객의 편집적 (무)의식을 만드는 것은 동작의 분절을 명확하게 지시하기에 있다. <소설화하는 몸>에서 하나의 시계열적 이동에서 움직임은 수많은 나아감과 단절들의 연속 교합으로 코딩된다. 가령 50년대 브루스 코너(Bruce Conner)와 같은 초기 흑백 무성 실험영화들을 보면, 24프레임이 갖는 곧 신체적/물리적으로 시각적 단절을 경험할 수 없는 매끄러운 화면 대신, 파운드 푸티지들로 이어 붙인 비인과적이고 불연속적이며 장면들이 분절돼 인지되는 기묘한 이미지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곧 이전 황수현의 두 작품은 파편화된 몸들의 궤적이 안무를 생성하고, 그 흐름 가운데 관객이 차이를 인지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안무가 본질적으로 춤을, 관객을 내러티브와 서사, 메시지에 복무/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곧 일차적으로 춤의 형태 자체에 대한 모색과 공간적 배치로써 관객의 감각의 (재)배치를 일어나게 하는 것이 맞는다면, <눈물>은 무용수의 눈물 흘리기의 온갖 기술적 과정/양상들을 확인하며 슬픔을 그것과 분별지어 따라서 연계해 이해하며 제목을 제사로서 끊임없이 되돌려 세우는 가운데, 무용수의 몸을, 그리고 ‘슬프지 않지만 눈물이 나(려)는’ 독특한 신체 표지를 안무의 일환으로 확인하게 되며, 안무 바깥의 컨텍스트를 찾는 대신 하나의 문장으로서 제목을 통해 구현된 어떤 상태에 대한 ‘관찰’로 작품을 갈음한다. 관객에게 필요한 건 감상의 인과적/수동적 양상이 아니라, 관찰의 물리적/능동적 양태이다. 퍼포머와 관객이 인접한 감각의 동시성 아래 그것은 가능해지며, 여기서 전시장은 특별한 조명 없는 공간의 조건 아래 투명하게 작품의 퍼포머들을 반영하고 드러낸다.

    <눈물>은 감정의 메타포로서 눈물과 절연하고−‘슬픔 없음’−신체적 환유로서 눈물을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무용수의 신체로부터 연유하는 움직임과 신체 자체를 투명한/빈 서사로서 작품의 전면으로 드러낸다. 나아가 이러한 신체 기술(技術/記述)로 이뤄진 작업에서 그 제목인 ‘슬픔이 없는 눈물’은, 감정을 연기하는 무용수들의 불투명한 서사의 축에서 신체를 기술(記述)하는 선명한 구문론적 배치의 축으로 이동하는, 춤의 변경된 패러다임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무용수들은 안무가의 안무/춤을 재현하는 ‘자동 기계’가 되는 대신, 안무가가 제시한 하나의 문장이자 실천으로서의 자기 기술(技術/記述)을 통해 신체를 새롭게 생성하는 주체적인 ’눈물 기계’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을 공간과의 긴장 속에 엮는 안무(가)는 하나의 문장으로 자리한다. 결과적으로 <눈물>은 극장 안의 유기적인 시공간의 리듬을 맺는 대신, 그것을 구멍 내는 이동이라는 한 축과 수행사적 구문에 따른 연대로써 실천되는 각 퍼포머들의 조각나고 어긋난 기호들의 배치라는 또 다른 축으로써 극장 바깥을 쓰는 동시에 매끄러운 기호로 구현되던 춤을 재정식화한다.

    김민관 편집장

    1. 김정현이 진행한 「가상의 몸, 실재하는 몸」이라는 황수현 인터뷰를 참고하면, 황수현은 “내적 감정 상태보다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눈물을 흘리겠다는 거고, 그래서 퍼포머들에게 어떤 심리적인 모드를 만들어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체화된 기억이나 인지된 상황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눈물>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2. <눈물>이 ‘슬픔 없는 눈물’을 보여주려 했듯, 이 작업 역시 “슬픔이나 애도와는 (매우 엄격하게) 거리를” 둔다.(곽영빈, 「수집가 혹은 세상의 큐레이터로서의 작가: 구동희론」, 『2015 SeMA-하나 평론상』) [본문으로]
    3. <눈물>의 2막에서 무용수들은 크게 눈물을 만들기 위한 과장된 움직임을 보이지만, 현지예에게는 역설적으로 눈물을 흘리기 위해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춤이 멈추는 순간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는 ‘눈물’이 단순한 신체의 표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움직임’이라는 근대적 춤의 공식을 깨는 하나의 무용 패러다임 차원의 기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키네틱한 근대성 프로젝트가 근대성의 존재론을 구성함으로써 서양의 무용은 멈추지 않는 운동성에 더욱더 부합하는 몸과 주체성의 생산 그리고 그것의 디스플레이를 위해 조정되어갔다.”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문지윤 옮김, 현실문화, 2014, p14.)] 여기서 ‘눈물’은 신체를 전시하는 방식인 동시에 그것을 넘어 신체 자체가 생성되는 흐름 자체를 나타낸다. 최승윤의 격렬한 포즈 역시 몸통을 좌우로 틀며 강력하게 팔을 내치는 가운데,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음을, 곧 전반적인 신체 움직임과 비교해 멈추어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윌리엄 포사이스는 자신의 동명의 에세이를 통해, 춤과 안무를 동일시하고, 춤(=신체)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안무적 생각(choreographic thought)”에서 도출되는 기존의 안무 방식이 아니라, 안무 그 자체의 원리에 근거한 자율적인 표현들로서 “안무적 사물”이라는 개념의 가능성을 안무와 연관해 묻는 것에서 시작해, 그것이 “신체의 대체물”이 아닌 “잠재적인 시도에 대한 이해와 행동의 조직이 거주하기 위한 대안적인 장소”로 정의한다.[url=http://www.williamforsythe.de/essay.html] [본문으로]
    5. “모더니스트 조각이 장소와의 연계를 끊거나 장소와 무관함을 천명하며, 스스로를 좀 더 자율적이고, 자기 지시적이며, 따라서 이동 가능하고, 장소를 초월하고 유목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받침대/대좌를 흡수했다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미니멀리즘을 따라 처음 출현했던 장소 특정적 작업들은 바로 이러한 모더니스트 패러다임의 극적인 역전을 불러왔다. (…) 미술을 위한 공간은 이제 더 이상 텅 빈 벽, 즉 타불라 라사(tabula rasa)가 아니라 실제의 장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미술 오브제나 사건은, 육체와 분리된 눈에 의한 시각적 현현으로 즉시 지각된다기보다는,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theatricality)이라고 비난했던 바의, 관람 주체 각자의 신체적 현전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공간의 연장과 시간의 지속을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가운데 단일하고도 다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었다.”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우정아·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p25-27.) [본문으로]
    6. 여기서 물론 슬픔이 온전히/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첫 번째 각주에서 인용했듯, 황수현은 “신체적으로 체화된 기억이나 인지된 상황을 이용”해서 눈물을 내는 가운데, 거기에는 개인의 슬픔도 물론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슬픔은 눈물을 내기 위한 메소드의 모티프쯤으로 사용되는데, 중요한 건 그러한 슬픔에 부속되는 눈물, 슬픔의 결과물로 환원되는 눈물이 아니라, 눈물의 발명이자 그것을 위한 슬픔의 발명, 그 과정이 성립되고 있음을 관객이 보는 것에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김재리와 한 인터뷰에서 황수현은 “무용수의 신체에서 나오는 현존하는 몸을 만드는 것이 내 작업에서는 절대적이다. ‘리얼리티(reality)’가 중요한데, 무대 밖의 어떤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수준에서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몸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무용수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면서 어떤 감정 상태가 되면, 그것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된다. 신체에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오브젝트적 바디’가 아니라 감정, 생각, 감각과 같은 상태가 신체적 반응을 어떻게 유발하는지를 보고 운영하는 것이다.”라며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김재리, 「폭발적인 몸−표현주의를 넘어서 안무가 황수현과 움직임 리서치」, 『K CONTEMPORARY 2』, 국립현대무용단, 2016, p136-1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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