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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소의 전시》: ‘장소와의 간극을 수행하는 전시’
    REVIEW/Visual arts 2017. 11. 20. 18:06

    작업들은 두 작가(조형섭, 이소의)의 작업을 제하고는, 미술관에서 풀려나 낯선 장소와 헐겁게 맞물려 있다.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마저도 전시장을 찾는 이를 전시장‘에서부터’ 나아가는 첫 번째 키를 제공하는 입구이자 전시장을 벗어나며 새롭게 전시, 《장소의 전시》(큐레이터: 안대웅,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전수현)가 시작되는 출구의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나 이 전시장은 전시장의 ‘바깥’에 위치한 이들, 전시장의 문법 따위는 상관없는 현실에 소재를 둔 사람들에게는 결코 인접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작업은 일상에서, 현실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작품으로 감별하러 온 이들은, ‘실재의 장소’에 있는 이들에게서 낯선 이로 구별된다.

    대부분의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실은 작품을 위해 여전히 비어진 무정형의 공간처럼 기능하는데, 이는 익숙한 전시 관람의 문법과 결합되어 작동한다. 그 바깥의 것들은 깨끗이 치워지고, 이것이 ‘작품임’이 강조된다. 그러나 작품이 전시장을 벗어났을 때(탈미술관화) 작품 바깥의 일상 혹은 현실은 관람의 일부가 된다. 작품은 잘 보이지 않거나 ‘쪼그라들고’ 작품을 보는 이 역시 그 안의 세계에서 시선을 받게 된다. 

    최세진, <수중오침>, 단채널영상, 26분 33초, 2017 [사진 제공=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이하 상동)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라는 영토를 벗어나기, 곧 새로운 영토에서의 재영토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새롭게 미술관이 구축되는 대신 개별 미술들은 세계의 사물들 속에 파묻힌다. 여기서 ‘특정적인 장소’는 미술이라는 맥거핀을 뒤로 한 채 바깥 사물들이 이루는 세계다. 작품이 사물들 속에서 사물과 같이 산란되며, 분산되는 자리 잡지 못하는 시선과 몸은 ‘장소’로부터 이탈한다(반면 장소의 주인에게 그 작업은 장소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세계가 증명하는 것은 무한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허용되는 미술관이라는 것이 성립시키는, 적당한 거리를 갖고 봐야 하는(접촉이 허락되지 않는) 미술품이라는 한시적인 특정한 지위의 불완전함 같은 것이다. 반면 작업은 몇몇 곳에서는 그 세계의 주인에게 기꺼운 만족감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질서를 찾고 특별한 지위로 인계된다. 곧 작품은 화이트큐브를 벗어나 향유되는 소장품으로 그 사람의 세계에 종속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일상의 사물로 변하며 관심 밖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곳(들)을 처음 찾는 전형적인 동시에 특정한 관객은 그것을 보기 위해 양해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장소에 따라, 장소에 따른 작가의 설치 방식에 따라 작업은 다른 장소에의 사물로 새롭게 발현된다, 또는 다른 장소에 걸맞게 재의미화된다. 여기서 ‘장소’는 한편으로 예술(가)의 예술 바깥에서의 적응이자 재적용의 교착 상태, 사물 속에 둘러싸인 예술의 낡음을 새롭게 확인하는 관객의 혼란스러운 몸이다. 이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더 넓은 ‘장소’에 사건의 일점을 남기며 사라진다. 결국 장소에서 작업을 구제하(며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다른 장소에서 작업의 의미를 다시 찾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최두수, <짧고 달콤한 마법같은 시간을 위한 사인>, 혼합재료, 가변 설치, 2004/ 2017

    최두수 작가의 <짧고 달콤한 마법 같은 시간을 위한 사인>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위 이발소의 회전 간판으로 미용실(‘씨저스 헤어샵’) 안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바깥이 아닌 안으로 그것도 미니멀한 기호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하트 기호는 얇아서 긴 작은 구조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다랗게 위치하며 의료 시설로 이용된 초기 서양의 이발소를 끊임없이 활기차게 솟아오르는 심장의 의미로 재표상한다(장소의 주인 분이 실제 대단히 만족해하는 작업이었다). 

    고재욱, Qrator (feat. 이웃상회), <원곡 제기 대회>, Qrator: 리서치; 고재욱: 안산 제기협회 참여자 모집과 일정 조율, 현수막 디자인, 실황 촬영 및 중계 퍼포먼스; 이웃상회: 기념주화제작을 위한 리서치와 디자인 및 제작 후원, 2017

    고재욱과 Qrator (feat. 이웃상회)의 <원곡 제기 대회>(2017)는 실행과 리서치, 기념주화제작 디자인 등의 영역이 각각 나뉜 협업의 형태로 이뤄졌는데, 하루 실제 ‘원곡 제기 대회’가 지역 사람들의 참여로 치러지고 현장 중계되고 촬영되었으며, 대회 이전에 나오던 영상을 대체했다. 가령 여기서 예술은 ‘삶을 둘러싼다’. 삶을 중계하는 퍼포먼스는 삶의 연장선상으로부터 스포츠방송의 중계라는 익숙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매개되며 다시 ‘삶에 심어진다’. 영상은 일상의 균열을 일으키기에는 평범한 외양으로 시장과 도시의 외양으로 흡수된다. 이는 ‘놀러와 오락실’ 초입에 설치된 최세진 작가의 <수중오침>(2017)은 전광판 광고 같지만 26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집중하기에는 지나치게 느리고 불투명하다. 

    시도들(구수현, 황지희), <Nothing Flag>, 폴리에스테르, 120x90cm, 2017

    반면 주인 없이 ‘버려진’(지켜지지 않는) 작업들도 있다. 다문화지원본부 앞 국기 게양대 근처, 야외 간이 천막 무대 뒤편에 위치한 투명 깃발들, 곧 <Nothing Flag>(2017)은 ‘시도들’이란 콜렉티브, 구수현, 황지희 작가의 작업으로, 천막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이름을 실현한다. 어떤 정체성도 갖지 않는 깃발은, 이국적인 아니 비거주자를 곧 낯선 방문자로 만드는 공간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도 드러내지도 않는다. 실제 거대한 높이의 설치는 가까운 사물을 반사하거나 반영하지도 않는다. 바짝 붙은 공간으로부터 가리어져 쪼그라진다. 예술이 부재로 인식되는 공간에서의 예술은 적확한 자기 지시로써 장소 특정적인 작업의 성격을 완성한다. 여기서 장소는 일종의 예술의 비장소, 삶이 충만한 공간이다. 야외 장소라는 대범하나 조심스러운 설치를 시도하는 아티스트의 자의식은 예술을 부재로 인식하는 관람객의 의식으로 연장된다. 

    여인모, <저 넘어 어딘가에>,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설치, 2016

    여인모 작가의 <저 넘어 어딘가에 (보도블록)>(2016)는 ‘놀러와 오락실’의 공간 안에 있지만, 오락실을 벗어난 작은 야외 자투리 공간의 휴지통 옆에 눕혀 놔서 ‘지나칠 수 있는’, 그리고 ‘닿/닳을 수 있는’(=밟을 수 있는) 일상의 사물이 된다. 그것은 여간해서 분간하기 쉽지 않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예술 작업임을 이해할 때만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이 (‘특별한’) 예술 작업임을 이해하지 못할 때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눈에 띄지 않지만 어떤 무엇으로 감각되는 경우이다. 곧 그것은 장소라는 컨텍스트를 입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가능하다. 

    이주원, <Portrait: Woman in White Dress - Interview of Curator>, 단채널 비디오, 4분 4초, 2014 

    이런 측면에서 ‘칸티푸르’라는 레스토랑에 있는 이주원 작가의 가장 장소에 맞지 않는 듯 보이는 영상 <(eng_sub) Unknown Portrait: looted by Nazis (part 1 / 6)>와 <Portrait: Woman in White Dress - Interview of Curator>, 곧 각각 나치 시절의 그림이 발굴된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그에 대한 그림 한 점을 뒤로 한 큐레이터의 인터뷰의 외양을 띤 사실임 직한 사실이 아닌 비디오는, ‘이것이 예술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없는 영상에 가까운데, 이 비디오에서 생기는 실패는 예술 작품과의 간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정보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 독자의 수용 과정을 반영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곧 이것이 예술 작업이 아님에도 반드시 의미가 발생한다-그것이 집중하며 처음부터 끝을 따라가는 온전한 관람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는 점에서 실제 장소‘에의’ 전시를 장소‘의’ 전시로 바꾼다. 동시에 편재하는, 하나의 장소에만 속하지 않는 모두에게 속할 수 있는 미디어의 권역에 속하며 가상 실재의 장소를 생성한다(어떤 측면에서 미술관 안의 영상 설치들은, 대부분 그것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만이 특별한 것으로 강조될 뿐, 미술관을 벗어나는 것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장소와 결부되면서 장소를 벗어난다. 

    이완,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 나무 탁자>, 단채널 비디오, 생산물(탁자), 13분 30초, 2016

    이완 작가의 세더하나라는 음식점에 실제 탁자와 함께 설치된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 나무탁자>(2016)의 영상은, 인도네시아에서 탁자를 만드는 과정을 담았는데, 영상이 지시하는 장소의 인물들과 환경이, 작가를 제외하고 주인과 손님들의 모습과 상응한다. 이는 이주원 작가의 작업이 문화적 격차를 이용하는 초문화적인 성격(‘이미 모든 부분이 번역되고 있다’)을 갖는 동시에 ‘미술’이라는 맥락과 결부되는 것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배윤환, <울타리 밖의 공>, 나무판에 조각, 각 14×34.5cm, 2016-2017

    이주원 작가의 영상에서 지시된 회화 작업, 곧 실제 덕지덕지 이미 많은 것들이 붙어 있는 벽에 영상과 따로 걸린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 by J.W.>>(2014)는, 옆의 사물들과 분별되지 않으며 영상과의 연관성 역시 영상을 끝까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파악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미술품이라기보다 클리셰를 함축한 일종의 장식품-우돈축산이라는 정육점에 태국 국왕(?)의 초상화가 그려진 달력과 나란히 설치된 배윤환 작가의 <울타리 밖의 공>(2016-17)과 같이-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장소에 적응하지만 장소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영상을 이탈한다! 

    장소에 적용해야 하지만 장소와의 간극을 수행해야 하는 예술의 과제는, 예술이 예술임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닌, 예술이 안전하고 관성적인 공간을 벗어나 겪는 실패를 증언하기 위함이 아닐까, 적어도 이 전시에서는. 따라서 적어도 이 전시는 실재의 장소(‘장소에의 완전한 적응/적용이라는 지상과제로부터 완벽히 미끄러진다’)와는 별개로 미술관이라는 상상의 장소를 지시해내는 것에 성패를 걸고 있다. 

    p.s. [장소에의 적응이라는 피상적 과제로부터 짐을 덜고 있는 두 작업은, 전체 전시의 맥락과는 다소 이질적인 동시에 장소를 반영하는 충실한 작업의 의미를 띤다. 따라서 애초에 이 작업으로부터 전시장 바깥으로 작품들을 찾아나가려 했던 여정은, 맨 마지막에 회상의 신으로 들어오게 됐다. 조형섭 작가의 작업에 이어, 전시장 2층에 설치된 이소의 작가의 작업은 <오래된 자막>(2014)이라는 영상이다.]

    조형섭, <그대...슈퍼>, 혼합 매체, 가변 설치, 2016

    조형섭 작가의 <그대...슈퍼>(2016)는 두 개의 버전, 양각으로 글자가 드러난(글자는 자개이며 배경은 거울로, 첫 글자와 세 번째 글자가 음각이라는 예외를 띠며 ‘그대 슈퍼’라는 제목을 완성시킨다), 음각으로 글자가 드러난(글자는 비어 있고 배경은 자개가 된다) 각각 ‘근대화슈퍼’가 다르게 드러나는 작업이다(‘MODERN STORE’의 경우, 음각의 자개 글자와 배경이 거울인 작업으로, 후자가 전치된 작업이다). 작가는 버려진 자개장들을 수집해 실제 존재하는 근대화슈퍼를 자개로 재현해 낸다.

    일종의 온전하지 않은 깨진 거울/자개는 온전한 글자를 완성해 낸다. 거기서 의도적으로 탈락시킨 글자들로써 작가는 멜랑콜리를 구현한다. 기계적인 헌신(‘두 번의 빼기’)에 힘입어 ‘근대’는 완성되고 이어 ‘근대’는 탈락된다. 이는 다시 각각의 작업을 반영하는 좌우 카메라로써 각각 왼쪽과 오른쪽의 티브이로 대응되며 복제된다. 그리고 여기에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조명이 더해진다. 이로써 반영되는 근대(의 균열적 심상)는 ‘그대’라는 회상의 존재로서 애도 불능의 사태를 맞는다(‘근대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소의, <오래된 자막>, HD 비디오, 사운드, 10분 07초, 2014

    “조명(빛)이 너무 많은 도시”로 한국을 기억하는, 타슈켄트에서 온 인터뷰어는 마지막에 (인터뷰이인 작가의) 살짝 튼 옆모습과 뒷모습으로 빛에 싸여 현현된다. 사실 이는 작가(이소의)의 모습으로, 질문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화면에 어른거리는 가운데, 나머지 인터뷰어의 목소리는 자막으로 처리된다. 이는 한국어를 ‘어색하게’ 구사하는 이에 대한 편견을 배제하고, 우리의 목소리로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읽어내도록 한다. 곧 국가와 국적의 차이를 지운다.

    모든 게 지워진 상태에서 인터뷰어의 목소리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데 그건 그들의 언어를 구사할 때에 국한된다. 따라서 모든 언어는 ‘자연스럽게’ 구사된다. 마지막 작가의 모습은 타자를 대리하는데, 뿌옇게 산화되는 모습은 잠깐의 만남 이후 인터뷰어를 볼 수 없었다는 작가의 말이 보조하듯, 이런 기록 자체가 구체적 사실의 영역에서 희뿌연한 기억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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