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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리와 메테인〉(작/연출: 진나래 ), 어떤 번역의 지층들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2. 1. 14. 22:30

    작/연출_진나래, 〈사리와 메테인〉 ⓒ안성석[사진 제공=진나래](이하 상동). 2장, 여우사냥: 여우의 주인은 누구?

    “법정극”을 표방하는 〈사리와 메테인〉은 일종의 ‘번역극’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층위에서 그러한데, 우선 법정에서의 진행이 주요하게 자리하는 공연에서 예컨대 첫 번째 장인 “돼지농장 VS 바이러스”에서 중간종과 농장주인, 그리고 암퇘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대리/위임의 역량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비인간 종의 언어가 들릴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일종의 모의 법정이 구성하는, 타자의 세계를 인간의 세계로 옮기는, 정치의 언어가 자리하며, 두 번째로 이 공연의 매체적이고 물리적인 지형, 곧 수화와 자막, 음성해설, 움직임이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공연이 좇는 가치로서, 또 다른 비가시적인 타자의 언어로의 전개, 곧 공연의 직접적인 내용이 산출하는 타자들이 아닌 또 다른 은폐된 공동체를 형상화하는 극장의 언어가 자리한다. 

    1장, 돼지농장 VS 바이러스

    비인간 종의 언어를 옮기는 변호인들이 모인 법정―“지구가 복수종들의 거대한 폴리스”(진나래)―에는 판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변론만이 난무하는데, 이를 통해 저마다가 가진 가치 판단을 유예하며 이를 관람객으로 이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들이 교차/난무하는 법정의 재현 양상은 세계의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지형을 이루고 있는, 아마도 UN 회의가 일상화된 것 같은 미래적 형상의 선취일 텐데, 이는 어느 순간 동시대 공연의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공연 문법의 과도기적 양상이 명료함 아니면 혼선을 주는, 각각 정보 층위의 강화 혹은 과잉으로 수렴되는 현상, 그리고 새로운 미학적 성취를 구성하는 현상―한편으로 정치적인 언어로서 다른 한편으로 언어 자체를 지시하는 미학적 언어로서―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며, 그 판단이 유예되고 있는 현실에 수렴한다[각주:1] 

    앞선 중간종과 농장주인, 그리고 암퇘지의 변호인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번역’된다. 진나래 작가의 (기능적으로는) 음성해설, (장르적으로는) “내레이션”에 의해 선취되는 말이라는 언어가, 움직임의 추상성과 그로 인한 심미적인 가치를 온전히 재단―모든 움직임에 대응하는 언어를 개발하거나 모든 움직임을 하나의 언어들로 압축하는―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그러한 움직임의 언어로의 복속은 스코어로서의 내레이션과 움직임이 결속한 결과이며, 이러한 내레이션이 안무의 역학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움직임은 더욱 명확해지며, 움직임의 자유로운 파편들의 전개는 깎여 나간다. 이것은 움직임이 언어화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장, 버섯채집: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

    흥미로운 지점은 무용수의 움직임과 그 뒤에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수어 통역사의 움직임이 당연히 차이들로서 생산되거나, 나아가 어떤 순간 같은 것으로 이행될 때가 아니라, 그가 감정을 담아내는 데 있어 무표정함을 고수하는 무용수에 비해 훨씬 생동감 있는 표정과 제스처로 변호인의 언어를 번역해낼 때 있다. 배우와 무용수의 차이, 곧 언어와 비언어의 차이를 스테레오타입화시키는 차원에서의 두 다른 생산 양식을 여기에 적용하지 않더라도, 무표정한 무용수, 곧 ‘언어’를 갖지 않는 존재의 움직임, 또는 언어를 바깥―내레이션과 내레이션을 번역하는 움직임-언어―으로 이전하는 움직임은 차이들의 배치보다는 어떻게 보면 기존 무용 장르의 협소한 지층을 동어 반복적으로 호출하며 언어와 결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반면, 이 언어 없음의 움직임은 짤막한 잔상으로 처리하는, 또는 유령처럼 사라지는, 마지막 장인 3장, “버섯채집: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의 전에 나오는 “무언의 현장”의 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되는 돼지들이 구덩이 안에서 서로 뒤엉켜서 뒹굴고 있는 형상을 연출할 때 아무런 언어가 부가되지 않았음으로부터, 무표정한 무용수들의 말 없는 움직임이 사실 그 말에 대한 번역으로서의 시각적 재현 이전에, 비인간 종에 대한 무언의 항변임을 지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리와 메테인〉은 비인간, 무용수, 인간의 순으로 언어의 공백과 또 다른 존재의 언어의 출현이 점진적으로 약화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장르의 혼융―지문과 같은 내레이션과 말이 없는 신체 움직임이라는 각각 연극과 무용의 어떤 구체성들―은 비인간을 언어와 무용(언어의 바깥), 이 둘의 접합으로 구성한다. 마지막의 말 없는 비인간 종―따라서 여기서 움직임은 장르의 해체가 아니라 순수한 장르의 완성이 될 것이다.―이 아닌 그 이전의 언어와 움직임이 접합되는 지점들은 비인간 종이 아니라 재현하는 신체에 몸을 내어주고(이들은 마치 인형처럼 텅 빈 신체로 움직인다.) 목소리로 이들을 다시 대리하는, 각각 뺄셈의 재현과 덧셈의 재현의 종합을 통해 완성된다, 외양에서 사운드를 분리하고 여기에 또 다른 사운드를 얹는 식으로. 여기서 사운드는 외양을 스코어의 명시 혹은 현실을 극의 전개로 재현하는 진나래의 내레이션에 해당하며, 이로써 움직임과 말은 유착된다. 

    이러한 접합은 기이하고 우연적이다. 왜냐하면 지시문은 사실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관객에게만 들리는) 지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르의 오류로 보이는 이러한 지점은 언어에서 움직임으로라는 법칙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거기에는 음성해설의 당위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지점에 대한 편의적인 지침이 가정된다고 보인다―움직임보다 언어가 더 명시적으로 주어진다. 일괄적인 순서의 적용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움직임이 먼저 주어진다면! 언어는 협소한 재현의 영역을 드러낼 것이다, 움직임이 언어에 포착되지 않는 잉여의 가능성을 갖는 것으로 남기보다는. 

    2장, 여우사냥: 여우의 주인은 누구?

    2장 “여우사냥: 여우의 주인은 누구?”에서, 여우를 원래 좇던 사냥꾼과 이를 가로챈(전자의 사냥꾼의 입장에서) 사냥꾼 사이의 법정 다툼에 여우의 주인이 난입하고, 여우를 복제해 외형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다는 장례 회사의 세일즈맨이 끼어드는 4자의 관계항이 설정된다. 여우는 죽었고, 여러 이익의 충돌 안에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자리하는 형국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소유 관념과 극단적인 자본주의 공학의 과잉,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시차적으로 비벼진다. 여기서 여우 주인의 입장은 민주주의적인 양적 평등에 의해서 쪼그라드는 게 아니라, 위치상 그 사이에서 일종의 소음처럼 묻히는 데 가깝다―내레이션의 역할 배분은 미디어 전달의 표피성을 한층 부각한다. 
    사실 억울하게 죽은 여우의 당사자성을 가늠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공허한 논쟁은 일종의 여러 겹의 허울들로써 진실―여우의 죽음/실존―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거기에는 인간과 자연의 분할이 인간의 문명과 의사-자연의 분할로 수렴하는 지점이 발생한다. 곧 인간의 언어‘들’과 자연의 공백만이 있다. 〈사리와 메테인〉은 단순히 동물(권)에 대한 항변이 아니다. 아마도 여러 언어가 교차하고, 여러 존재로부터의 정치가 가능한 지점을 상상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를 재편하기 위한 어떤 정치적 언어를 내세우는 가상의 작업에 가깝다.

    3장, 버섯채집: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

    가장 마지막 장인 “버섯채집: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은 누워 있는 무용수들의 신체를 버섯으로 비유하며, 접촉으로써 이를 따는 인간―속기사로 또 다른 번역으로서 기입의 언어를 실천하는 이윤하 배우가 버섯채집자로 분한다.―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일종의 플래시백과 같은 장면으로 지나가는, 별다른 언어가 없는 이 장은,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의 순전한 아름다움이라는 신비로 비치는 것이 얼마나 기괴한지를 보여주는 장일까. 그럼에도 말이 없는 동시에 움직임도 없는 무용수라는 비인간의 재현이 마지막까지 작동하고 있음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의 신체가 비인간의 신체로 이양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사리와 메테인〉은 연극적 내러티브의 표면이 1장과 2장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온전한 하나의 극을 의도적으로 기각하며 가상의 사례‘들’로써 비인간의 현실에서의 지위를 다룬다―그 결과 비인간은 감정 이입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 비가시적 존재의 재현은 결정적으로 세계의 분할을 재고하기 위함이다. 〈사리와 메테인〉은 명명과 함께 존재론적 지위의 언어적 위상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불교에서 인간의 시신을 화장하고 나오는 사리와 원소인 메테인(메탄)의 절합을 가리키는 제목처럼 〈사리와 메테인〉은 존재화되지 못한 것들을 인간의 자리로 소환하며 의사-인간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사리와 메테인〉은 장르 문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어떤 장르로 능숙하게 변모하지는 않는다. 얼룩처럼 장르가 묻어나오는 것뿐이다. 이는 어떤 민주주의에 대한 재현 그 자체를 위해 여러 매체가 동원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장르적 분배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객체는 주체 사이에서 공진한다. 세계는 그로 인한, 그를 위한 언어들을 생산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이론이 떠오르는 부분이다―인간과 의사-인간의 민주주의적 분배보다는 비인간종의 인간 세계의 침투를 명시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세계의 재편을 꿈꾼다.

    P.S. 〈사리와 메테인〉에서 인간 역시 다른 존재들처럼 세계의 절대적인/적대적인 지배자가 아니며 그 역시 관계를 맺으며 종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차원으로는 2장보다 1장이 더 탁월할 것이다. 이러한 장들은 각각의 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또 다른 사례를 요청한다. 따라서 마지막 장인 “버섯채집: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은 아직 쓰이지 않은 장이자 모든 생명을 위한 헌법에 대한 제안이나 예고 같은 것일 것이다. 그 충돌과 카오스의 외양의 모의 법정을 통해.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열전 2021!〉 공연|다원 분야

    공연명: 사리와 메테인
    일시: 2022.01.07(금) 오후 7:30, 01.08(토) 오후 3:00 *러닝타임 약 50분 
    장소: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서울 중구 장충단로 59)

    작/연출: 진나래
    안무: 백진주(모션아키텍트)
    출연/무브먼트 리서치: 고유론, 남수빈, 백진주, 이이슬, 임현진, 정은희
    출연(속기사/버섯채집자 역): 이윤하
    수어통역: 김홍남, 최황순
    내레이션: 이정식, 진나래 
    작곡/사운드디자인: 강안나
    무대미술: 이진석
    무대영상/음향: 윤민철(인터렉션랩)
    조명디자인: 김재억
    무대감독: 김상엽, 김연수
    영상촬영: 파수(김준성)
    사진: 안성석
    그래픽디자인: 이혜림
    기획: 이원지 
    홍보: 권근영/박세담
    필드레코딩: 램프스튜디오
    내레이션녹음: 더백스스튜디오

    * 14세 이상 관람가(청소년의 경우 보호자와 동반 관람 권장)
    * 본 공연에는 수어통역과 자막이 제공됩니다. 
    * 휠체어 접근이 가능합니다.

     

     

    1. 1. 이러한 과잉 번역의 형상과 정치적 올바름으로서 메시지의 간극은 이러한 공연을 분석하는 데 더 이상 피해 가기 어렵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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