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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음악과 움직임은 어떻게 맞물리는가, 또는 그렇게 보이는가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2. 2. 16. 19:23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드레스 리허설, 2021 창작산실 / ⓒ옥상훈(이하 상동).

    무용(고블린파티_임성은, 이연주, 임진호)과 음악(음악동인고물_대금 고진호, 25현금 홍예진, 해금 소명진, 장구 정준규, 피리 배승빈)의 어떤 기묘한 동거 관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꼭두각시〉는 여러 질문을 낳는다. 결과적으로, 백스테이지에 위치한 연주자를 무대 오른쪽에 배치하고, 연주 행위를 움직임으로 연장하며, 무대에 난입하며 무용수와 뒤섞이기에 이른다. 〈꼭두각시〉의 첫 번째 장면은 음악동인고물(이하 ‘고물’)의 연주 행위로서의 수행성과 고블린파티의 안무의 움직임 영역을 ‘절합’한다. 곧 고블린파티의 등장 직전에, ‘고물’은 춤을 추면서 연주를 하는데, 두 개의 움직임이 하나의 신체로부터 나온다. 움직임은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안무의 영역으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연주의 움직임과 안무의 움직임은 매끈하게 결합되는 듯 보인다. 

    반면, 움직임은 그 자체로 연주 행위이며, 소리로 연장되지만―연주와 움직임이 순수하게 분리되는 부분은 공연에서 예외적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해 순전히 존재한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 움직임은 또한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만은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연주의 행위와 자율적 몸짓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어중간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그 둘을 오가는 움직임이며, 그 둘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횡단’의 움직임이다. 고블린파티의 등장 이후, 빈 무대에서 순전히 움직임만을 구성하는 퍼포머들과 연주자는 유사한 형태로 움직인다. 이러한 사실은, 연주를 위한 움직임, 연주하는 움직임의 심미적 형태를 모두 계산하는 안무의 역량에서 이 모든 것이 유래한다는 가정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고블린파티의 등장 이전에도 역시.

    가시화하는 움직임‘의 여지’를 만드는 안무는 반복되는 박자들의 진동으로 지속되는 음악의 단순하면서 강한 밀도로의 수축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점에서,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보인다. 음악의 전개는 곧 가시적인 형태의 전개를 넘어서는 복잡성과 추상성을 지니지 않으며, 어떤 분위기의 끝없는 고조에 그치는 형식, 다음 장으로 전개되는 대신, 움직임의 형태로 끊임없이 이전되는 점조직들의 운동을 통한 공간적인 반향으로 연주의 행위가 이전된다는 점은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음악의 어떤 실험적 양상들, 그 기법의 행위적 모드와 음악의 기이한 정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안무의 영역을 요청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연주자가 연극적 캐릭터로 ‘기꺼이’ 변모하는 시도와 맞물린다. 가시화하는 움직임은 음악에의 실험이 움직임의 실천으로 연장되는 사이에 안무가 끼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몸짓 언어는 시청각적인 곡을 연주한다. 이는 단순히 시각과 청각이 따로 또 같이 활용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음악의 분배가 공간 전체의 시각적 표지들의 분배와 함께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박자들, 어떤 분위기는 몸짓을 소환한다. 몸짓은 그 음악의 연장이거나 음악으로 다시 돌아오는 어떤 표지가 된다. 

    여기서 또 다른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음악에의 움직임의 한계는 자율적인 움직임의 한계에 비할 수 없다고. 곧 안무는 이 음악으로부터의 움직임에 가변적으로 적응해야 할 것이다. 안무는 모든 움직임을 나아가 음악을 구성하기보다는 음악을 구성하는 몸짓이 될 수 없는 한계에서부터 출발해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음악(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며 안무를 조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도)권은 오히려 연주에 있으며, 자율적 아니 제한적 움직임은 연주의 움직임을 모방해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특별한/독특한 움직임이 탄생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 제한적 움직임이 가능할 정도로 음악에의 움직임은 개방적으로 자신의 움직임의 형태를 열어젖혀야 하는 과제를 얻는다. 이는 곡의 연주 기법 자체를, 나아가 음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음악에의 움직임이 음악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입증한다. 안무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지만―안무는 음악적 움직임을 위해 수축하여야 한다.―, 음악에의 움직임은 어떤 (새로운/특별한/독특한) 음악을 분명 낳는다. 앞서 말한 음악의 가시화는 감산되는 연주(-행위)로부터 형성되는, 주로 박자들의 고양이 만드는 분위기와 맞물리는 움직임의 표지들을 산출한다. 그것은 움직임을 위한 음악인 동시에 움직임에 의한 음악이다. 〈꼭두각시〉의 새로운 지점은 안무의 연주와의 기이한 절합도, 그 속에서 연주자의 캐릭터-되기도, 그 음악적 양식도 아닌, 움직임과 연주의 횡단 가능성 속에 탄생한 음악-움직임에 있다. 

    〈꼭두각시〉는 “꼭두각시”의 음절을 전복해 갖가지 조합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일종의 유희적인 착상이지만, 이후 연주에 대한, 그리고 움직임에 대한 주요한 단서를 제시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되며 작품의 핵심적인 개념을 이룬다. 몇 가지 음(절)의 조합은 무한한 (문)장으로 펼쳐진다. 어깨를 으쓱 한 채 두 팔을 들고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움직이는 건 또한 개념의 즉물적 번역이지만, 이어 모든 움직임의 바탕을 이룬다. 곧 음악에의 움직임은 이후 안무가의 영역으로 반복되며 확장된다. 

    마리오네트의 다양한 변형으로서 존재하는 움직임들은 고블린파티의 ‘고물’의 조종, 해골 모형을 고블린파티가 사람처럼 조종하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빈 무대에서 또한 연주 공간에서 각각 일어난다. 그에 따라 각각 ‘고물’이 수동적으로 움직여지는 마리오네트가 되거나, 마리오네트로서 연주를 하게 된다. 여기서 후자는 때로 고블린파티의 연주 행위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서 고블린파티는 ‘핵심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듯 보인다. 가령 홍예진의 25현금에 손을 얹더라도 이를 튕기지는 않는다. 

    반면, 해금의 활대를 잡고 현을 켜는 손이 고블린파티의 그것일 때가 있다. 반면 반대쪽 손으로 음정을 조정할 때의 손은 소명진의 것이다. 이럴 때 전문가로서의 연주 행위는 일부 ‘훼손’된다고도 할 것이다. 연주 행위는 일부 이양된다. 거꾸로, 고블린파티와 ‘고물’이 같이 무대에서 움직일 때, 안무의 영역은 고블린파티의 그것일 것이고, 이를 ‘고물’은 이행하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고블린파티에 비해 ‘고물’의 어색한(?) 표정과 몸짓 나아가 그 가운데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며 간략한 몸짓의 안무를 만드는 차원에서, 고블린파티의 몸짓이 ‘축소 또는 제한’(?)되는 차원은 어떠한가.

    ‘고물’은 연주로서의 움직임, 자율적 움직임의 가능성을 모두 최대치로 실현한다면, 고블린파티는 ‘고물’에게 연주가 가능한 정도의 움직임, 아마추어(무용수로서의 연주자)가 움직임이 가능한 정도의 움직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제한된 그리하여 특정한 움직임의 과제를 안게 되며, 나아가 공연이 출발하는 근원적인 시점을 선점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고물’의 연주가 고블린파티의 몸짓으로 순전히 이전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일 것이다. 임성은이 두 바퀴 뒤구르기로 무대를 누빌 때 제한되지 않은 격렬한 몸짓은 음악의 찰나적 파열의 속성을 연장하며 구현한다. 이는 음악이 극대로 상승하는 지점이며, 동시에 몸짓은 음악과 함께 음악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다. 곧 음악의 시작이 움직임의 끝으로 끝날 때이다.

    〈꼭두각시〉는 고블린파티의 ‘고물’의 조종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각각 능동성과 수동성의 표면적 양상 아래 실제로는 주체가 객체의 한계를 인식하며 그것에 맞춘다는 점에서, 또한 객체는 주체에 의해 자신의 한계를 확장의 범위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단순해 보이는 관계는 복잡한 국면을 맞는다―“객체의 다발일 뿐인 주체가 객체를 타자화함으로써 주체 자신을 타자화하는 현장을 재구성한다.”. 이는 꼭두각시의 역할을 역설적으로 벗어난 순간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붙잡혀 있다, ‘고물’은 연주하면서 움직이기 위해, 그리고 근본적으로 움직임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고블린파티는 연주하면서 움직임이 가능하기 위해, 또는 연주자가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로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악기와 결합한 연주자와 몸짓과 결합한 연행자는 각각 음악과 움직임의 영역을 교환한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몸의 얽힘이 있다. 꼭두(각시)라는 원형적 존재의 순수성을 표현하는 연행자를 만들기 위해 음악은 배경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고, 움직임은 홀로 남아야 할 것이라는 가정이 깨어져 나가는 가운데, 어떤 역할로 나타나는 건 오히려 수동적 형상의 꼭두각시로서의 연주자다. 연행자는 꼭두각시 조종자가 되며, 연주자는 꼭두각시가 되지만 동시에 악기의 조종자가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고물’은 고블린파티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에 붙잡혀 있다. 음악 조종은 그들의 몫이다. 고블린파티는 음악을 만드는 ‘고물’의 움직임에 붙잡혀 있으며, 동시에 그 음악 자체에 붙잡혀 있다. 음악은 꼭두각시 되기로서의 음악이다. 그리고 꼭두각시 몸짓으로써 음악은 만들어진다. 여기서 고블린파티가 붙잡고 있는 ‘고물’의 움직임은 그것이 가능한 정도로의 고블린파티로부터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고물’은 음악 조종에 (물리적으로) 붙잡힌 채 (자의적으로) 붙잡혀 있는 움직임을 취한다. 그들은 붙잡히게 되는 음악을 구성하며 붙잡히는 음악에 따라 춤춘다. ‘이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조종하는 고블린파티의 움직임은 그러나 최초 음악의 동기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가정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2021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전통예술,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공연 일시: 2022.2.11() ~ 2.13() 19:30 / 주말 15:00

    공연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관람 시간: 50

    단체명: 음악동인고물

    연출자: 이태원

    관람등급: 8세 이상

    노래/연주: 음악동인고물_고진호, 배승빈, 홍예진, 소명진, 정준규

    안무/출연: 고블린파티_임성은, 이연주, 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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