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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경애, 〈21°11’〉: 몸에 관한 미학적 윤리
    REVIEW/Dance 2023. 12. 12. 00:42

    노경애 안무, 〈21°11’〉©정재인 [사진 제공=옵/신 페스티벌].(이하 상동)

    노경애 안무가의 〈21°11’〉은 뇌성마비 장애인과 무용수의 각기 다른 몸의 움직임을 조합한다. 움직임은 몸으로부터 도출되는가. 전자의 움직임의 유래는 몸의 비중이 더 큰 듯 보인다. 반면, 후자에 있어서는 다른 몸을 구성함으로써 다른 움직임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또는 다른 움직임으로 제한될 수 있다, 아니 밀도를 얻을 수 있다. 이 밀도의 차원을 다르게 갖는 것. 곧 시간을 늘리거나 호흡을 분배하거나 나아가 몸짓의 질서를 변형하는 작용이 다른 몸의 질서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성립한다는 것, 이러한 전제는 몸 자체가 하나의 구상적 전제이자 틀을 생성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안무는 그 몸에 관한 모방에 기초해야 한다. 이는 엄밀히 재현은 아니다. 상호 주관적 영향 관계 안에 서로가 위치함을 의미한다. 

    무용수는 장애가 있는 무용수를 살핀다, 모호하게. 이는 관찰이 아닌 놀랍게도 몸을 수그리는 형태에 시선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후자의 몸을 살펴 찾아 들어간다. 어떤 틈을 발견하고, 어떤 공간의 밀도를 재고, 이를 은폐된 시각 영역에 가둔다. 자신을 펼쳐내는 건 가능한 몸의 경로를 도출하고 연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불가능한 몸의 경로를 탐색하고 지지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분명 움직임의 기본 전제와도 같은 서술이다. 고유한 몸의 무늬는 그러한 시도 가운데 시지각적인 차원에서의 리듬과 시각적인 차원에서 형태가 응결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이 지점이 독특한 것으로 발현되는 부분이 바로 배경으로서 잔존하는 무용수의 이차적 그리고 파생적인 몸짓이다. 우선하지 않고 연장됨으로써 특별한 것, 절대적인 차이의 움직임이 지워진다. 반면, 이 재현의 체계는 독특한 것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이념을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둘의 물리적인 동시에 이념적인 선후 관계는 윤리적인 차원이 한정된 몸짓에 가하는 제한과도 같을까. 

    노경애는 각기 다른 조합들을 끊임없이 꾀한다. 일종의 대련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둘씩, 후반에 들어서 셋씩, 그 이상이 짝지어지는데, 무대 바깥에서 나머지 무용수는 대기를 하고 있다. 각기 다른 조합에 따른 판들은 분절되며, 다른 움직임 시퀀스 계열이 그때마다 만들어진다. 움직임에 공명하는 건 실은 안무가라기보다는 독립된 그렇지만 무용수들을 관찰하고 반영하는 라이브 연주이며, 기타 연주자는 건반에 비해 더 즉흥적인 연주 기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들의 전체 흐름은 어느 정도는 드라마의 구조를 지닐 것이다. 반면, 노경애는 무용수와 무용수의 맞세움과 같이, 판과 판의 맞세움을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듯 보인다. 어떤 다양한 차이의 변주들이 끝없이 만들어질 것이고, 거기에 대한 위계는 없다. 곧 안무의 요체는 움직임에 있다기보다는 실험 자체에 대한 선호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비정형적인 움직임은 노경애 안무가의 작업을 관통해 온 어떤 고유한 이미지다. 행동의 형태를 띠면서 춤의 스테레오타입을 철저히 거부한다. 곧 춤이 아닌 것으로써 춤에 대한 독특한 주석을 단다. 그것은 ‘움직임’이다, 신체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체의 뒤틀림과 반동적 반향과 시차적 조합(참조: 노경애, 〈MARSⅡ〉: ‘잠재된 것들의 수행과 리듬, 그리고 시차’, 출처=http://www.artscene.co.kr/1364)은 고스란히 이전 작을 관통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21°11’〉은 더 작위적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출발과 덜 작위적이고자 하는 뒤따름의 조합일까. 

    행동의 특이성을 만들기 위해, 스텝과 반경과 몸짓의 다른 접점을 현재에 있는 것이 노경애의 경로 특이성을 통한 안무의 주요한 전제라면, 다른 몸들로부터의 출발은 그것을 선취하거나 선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면, 관성에 대한 저항이나 제약을 통한 움직임 설계는 장애를 지닌 몸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타자가 지닌 장애를 순수한 미학적 관점으로 전제함은 타자로의 현현에 대한 윤리적 책무로부터의 다른 전회를 요청하면서 가능해진다. 움직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는 데서 비로소 그 책임이 완성될 수 있다고 하겠다. 

    무용수들은 짧은 두 발의 간격으로 좁은 반경을 그리며 소용돌이와도 같은 회전을 시도한다―보통 회전은 바깥쪽을 향해 가지 않는가. 회전은 넘어질 수 있음 나아가 넘어지기 위한 시도로 확장된다. 정점은 따라서 찍히지 않는다. 회전 반경의 차이, 수용 가능한 실패의 시도‘들’만이 자리한다. 이와 같은 전도의 순간들, 회전의 초과분과 바닥으로의 마찰음과 질펀한 몸덩이, 그리고 느슨해진 신체의 어정쩡한 시작은 무대와 신체를 단단하게 결속한다. 

    〈21°11’〉은 뒤틀림을 연장하기 또는 연속하기는 뒤틀림을 모방하기 또는 유지하기가 아닌, 뒤틀림을 인지하기 또는 되돌려주기―재인지―의 방식을 경유한다. 노경애는 장애를 지닌 존재들과 지속적으로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는 반면, 다른 감각을 증대하거나 나아가 인류학적 보고를 집적하고 아카이브하는 것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몸의 특이성의 순간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객과 퍼포머에게는 타자-되기의 몸이 아닌, 두 가지 경로가 이뤄진다, 곧 타자-인지의 몸, 타자-재인지의 몸이라는 두 가지 경계.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21°11’
    공연 일시: 11.14.화 18:00, 11.15.수 18:00
    공연 장소: 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소요시간: 45분

    콘셉트·안무: 노경애
    창작·공연: 김명신, 문승현, 이민희, 조명희, 천영재, 어선미
    음악: 김창래, 장태준
    의상 코디네이터: 김은경
    프로듀서: 정재인
    드라마투르그: 박은주
    후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제작 인턴 | 무대 보조: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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