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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현진‧밤섬해적단 : 다원예술의 지형도를 그려 보다 : ‘콘서트 위에서의 연극이란 장치’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2. 4. 20. 01:23

    ▲ 배영환 개인전,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포스터 [사진 제공=플라토]

    지난 12일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글래스 파빌리온 공간에서 열린 한 시간 여의 백현진의 소위 ‘유행가 변주’는 시대적 자취의 공통된 감각들에 대한 선분을 명확하게 그린다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이는 배영환 개인전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5월 20일)의 전시 연계 특별 공연 첫 번째 시간으로 마련됐다. ‘유행가’는 특정 시대의 흐름 속에 동화되는 감정과 감각의 덩어리이자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공동의 자리에 포섭 가능하다.

    참고로 유행가는 두 시점에서 존재한다. 흥얼거림의 행위가 유행가가 유행하는 시점에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음악에 입을 맞추는 것이라면, 웅얼거리는 행위는 이 음악이 다른 유행가들의 흐름으로 대체되었을 때 체화되어 있었다가 전유된 형태로 드러나는 시점일 것이다.

    최근의 유행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의 속도에 맞춰 어쩌면 파편적으로 단지 덧씌워지는 순간들의 흘러감에 맞춰 시간을 절취하고 그것의 공통된 자리를 만드는 대신 한 순간으로 뚜렷한 자리 대신 흩어지고 마는 것만 같다.

    반면 백현진이 속한 세대의 유행가는 그 유행가가 분명 공통의 자리의 폭을 더 넓고 깊게 가져간다고 할 수 있다. 유행가가 갖는 잠재성은 세대의 감수성으로, 기억으로, 공통의 노래 행위로 번져가게 한다. 만약 공통의 자리가 발현되는 어떤 계기가 형성된다면. 반면 백현진의 공연은 일견 백현진 자신의 마스터베이션과도 같았다. 내지는 그의 무의식의 근저에서 잠꼬대하기와도 같았다.

    ▲ 4월 12일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글래스 파빌리온 공간에서 열린 백현진의 공연

    이는 백현진의 유행가가 관객과 공통의 자리로서 ‘무의식의 수행성’을, 관객의 ‘능동적 참여 의식’을 발동하는 것과 거리를 갖는 만큼 백현진 스스로 그 유행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백현진의 신체’는 유행가를 포함해 그에 대한 기억과 그 외의 많은 다른 기억들이 잠재하는 공간이다. 한편 유행가는 지나가 버린 기표이자 또는 그의 무의식의 자장에 들러붙어 있는 파편들이다. 이 기표는 오로지 기의 없는 기표들의 조합으로만 이어졌다. 즉 이 기표들이 어떤 의미를 형성하는 것(기의를 획득하지 않음)도 아닌 한편, 어떤 정서나 감응을 야기할 만큼의 수행의 자리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악구를 채 넘지 않는 짧은 유행가의 파편들은 내러티브와 노래 안의 주체를 형성 않는 그저 흔한 단어들이다. 이 기표들의, 유행가들의 의미 없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가깝다. 단지 의미는 이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 없음을 의미 있음의 행위로 어떻게든 바라보고자 그의 유희와 장난에 가까운 행위를 진지하게 바라봤던 미술 신의 청중들은 무엇에 이끌렸던 것일까.

    이 기표들의 의미 없는 연결은 가령 이런 식이다. 끝말잇기 식으로 마지막 말의 어미를 새로운 노래의 낱말이 되게 이어 부르거나, 내지는 노래를 부르다 그 하나의 절취된 노래에서 나오는 단어가 다른 노래를 상기시키면 부르던 노래를 흐지부지하게 끊고 단어가 일으킨 새 노래를 이어가는 것.

    실상 이 기표들의 조합은 실상 노래들의 조합이 아닌 낱말들의 조합이자 그가 흘려보내는, 앞서 말한 신체들을 울림통으로, 기억들의 공간으로 두고(그는 잠옷을 입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누워 있음의 제스처를 취했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곧 무의식의 기억들이 꿈틀댄다는 것) 잠재성의 파도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한 악구만으로도, 단어만으로도 확인 가능하고 떠올리게 되는 유행가의 힘을 전유하며 이 흐름을 타기도 하다 홀연히 떠나기도 하며 자신만의 리듬으로 이 단어들만의 세계를 변주해 내는 것이다.
    즉 끝나지 않지만 반복의 차이를 만들며 하나의 커다란 세계의 평면이 구성되어 가는 과정을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가운데, 관객들은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 아닐까(곧 파악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의 형태에 도전하게 되며).

    아쉬움을 느꼈던 것은 지난 8일 앞서 그가 행했던 문화역서울 284(서울역 소재)에서의 공연과의 비교에서 확실해진다. 여기서 여러 근원의 출발점을 갖는 ‘다원多元예술의 지형도’ 안에 백현진이라는 인물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역 서울 284에서 했던 그의 공연은, 아니 그의 스타일 그 자체를 그저 무대로 치환한 것임에 불과한 그의 온전한 무대는 사실상 다원예술 축제로 명명하고 명명되는 국내 유일의 축제의 정체성을 지닌 페스티벌 봄에서의 2009년 당시 그의 공연보다 오히려 더 다원예술적이었다.

    다원예술의 뜻은 다원예술의 어떤 형태도 구체적으로‧근원적으로‧명징하게 제시하지 않는 두루뭉술함의 상태 안에 있다. 다원예술이 ‘여러 예술(장르)들의 협업 형태를 띠는(근원을 갖는) 것’으로 귀착되는 것과 별 차이 없다는 점에서 다원예술은 ‘그 단어의 적확한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 역설’의 현실 안에 있다. 이는 다원예술이 하나의 형태로 녹아나 다른 장르의 예술로 발화하게 된다기보다 여러 형태가 그 근원을 자리하고 있고. 그 과정 자체로 체현된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것과 같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백현진은 가령 콘서트가 아닌 연극을 한다. 연극이라고 하기에는 사적인 방담을 지껄이고, 자기도취에 빠질 뿐이다. 그는 플라토에서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을 떠올리게 하는 ‘기표들의 놀이’를 유행가라는 하나의 이름을 자신만의 놀이 형식으로 변주해 내는 가운데 이 기표들의 얽매임에, 기표들의 떠다님에 붕 뜬 몸 내지는 움직이지 않는 잠자는 몸 자체를 보여줬다면, 그는 그의 온전한 무대(문화역서울 284)에서는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는 가운데 노래의 일부분 안에 있었다.

    즉 그는 노래에 잠겨 있었다(이 콘서트를 보지 못했다면 애석할 정도, 오히려 플라토 갤러리에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기타와 드럼의 두 연주자만이 있는 단출한 무대였고 기타가 음악을 인도할 때 그는 그의 신체의 리듬을 기타를 치는 듯한 제스처로 그 음악이 이끄는 세계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곧 그는 그 안을 향해 갔지만 그 바깥에 관객과 같은 위치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 4월 12일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글래스 파빌리온 공간에서 열린 백현진의 공연

    그는 한편 꿈꾸고 있었다. 이 환영은 단순한 몰입과는 달랐다. 그는 가수나 보컬로서 목소리를 절취해 내기보다 이 음의 세계에 신체를 실었고 또한 조종하며 반주와 목소리의 자리를 분리해 내지 않고 하나의 큰 지형을 만들어 냈다. 유행가의 변주와도 일치하는 부분으로, 그는 노래들의 넘버를 만들지 않고 잠재성의 큰 파도 아래 (노래로서의) 세계들을 조율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노래들이 나뉘는 게 아닌 특정한 덩어리들의 확산과 줄어듦만이 있었는데, 이 줄어듦 곧 음악이 끊기는 순간은 그의 잡담이 시작되는 순간이며 그의 연극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는데, 꿈꾸는 가운데 툭 튀어나온 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가령 관객이 없다는 화두는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이 말은 집요한 집착이었고 무의식에 잠겨 있는 가운데(이 의식의 부분이 그 무의식을 증명해 준다) 불현듯 머리에 남는 말을 소거하지 않는다.

    곧 그의 무의식과 의식 모두, 그의 신체를 흘러가는 것, 거기에서부터 그는 출발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 그래서 환호하는 관객이라는 것의 자리를 지우는, 오로지 청취와 이 세계의 환영을 보는 무대 위의 관객을 만드는 무대(연극)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말들로 인해 노래를 잊었고 관객이나 기타 연주자에게 가사를 물어 음악을 진행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말들이 구성하는 하나의 다른 무대와 이 음악이라는 것의 무대가 서로 침범하며 다투고 있음을 가리키고, 음악 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의도가 전혀 아님을, 대위법적으로 말과 노래가 엮어드는 하나의 두 다른 평면을 만들고 있음을 가리킨다.

    백현진의 소리는 매우 특이했는데, 음들의 극단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잠재성의 꿈틀거리는, 약동하며 퍼져 가는 배면의 경계 위에 있었다.

    ▲ 4월 13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아트선재 오픈 콜 #1 :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전의 일부로 열린 밤섬해적단의 공연(이하 상동)

    다원예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차원에서 또 다른 예를 들어야 할 것 같다. 백현진과 같이 ‘콘서트 위에서의 연극이란 장치’를 활용하는 또 다른 팀은 밤섬해적단이다. 이들은 《아트선재 오픈 콜 #1 :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전에서 네 번째로 공연을 가졌다.

    밤섬해적단은 리드기타와 드럼의 2인 밴드로, 이들의 넘버 역시 어떤 하나의 뚜렷한 곡으로 절취된다기보다 극단에서 시작에 한 순간으로 치달음의 과정 끝에 갑작스런 끝을 맞는, 치열한 파편들의 사운드 분출 아래 악다구니의 보컬이 섞여 드는, 그리고 드럼과 기타가 그 역할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 들어가는 넘버들을 선보이고, 그 중간에 툭툭 일정한 톤으로 즉흥적인 대사들을 내뱉는데 관객을 상정한 방백 같은 말하기이고, 이러한 연극의 평면이 하나의 멘트 차원이 아닌 이들의 이념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들은 정치의 분명한 절단선을 드러내는데 우익의 모습에 과도함을 더해 그로부터 발언되지 않는, 가려진 말들의 자리를 향한 어떤 전도된 평면을 빚는다. 이들은 우익을 전유하면서 딱 그만큼 맹신적이라 정치적이지 않은(관계의 통로를 만들지 않는), 불합리한 어떤 순간을 포착해 내고 그것의 바로미터를 설정하게 된다.

    즉 올바름의 정치적 테제를 복잡하게 발언하거나 옹호하는 대신 그 반대편에서 딱 그것들이 되지 못하는 분명한 악을 위악적인 행세를 하며 드러낸다(오히려 진보의 영역을 넓히는 형국이다). 매우 연극적이라는 것은 이 위악의 캐릭터 되기라는 역할의 전유에 있다. 그런데 이 내뱉는 말들은 애드리브이기도 하고 또한 그처럼 매우 자연스러워 사실상 판소리의 사설을 내뱉는 것에 더 가깝기도 하다. 물론 그러한 어투를 구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들은 감옥에 갇힌 리성웅(《아트선재 오픈 콜 #1 :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전에서 가상의 북한 록커 리성웅을 주제로 한 인디밴드들의 전시에서)을 떠올리며 자신들 역시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상정하고, 관객을 등지고 공연을 했다. 이 전도된 모습 역시 그들의 위치 상정과 매우 비슷한 느낌을 선사했다.

    이들은 비정치적인 모습으로 정치적인 것의 가상의 평면을 벌이며 정치의 반대편에서 정치를 이야기한다. 가령 ‘밤섬에 전혀 존재하지 않을 해적단이라는 가상의 자리를 만드는 이들의 이름’은 파열하는 사운드의 정신없는 현재를 헤집어 놓고 묘하게 우리들의 의식을 어떤 비정의의 목소리에 치밀어 오름과 그 뒤에 씁쓸한 웃음과 만담 같은 재기발랄함에 실소하는 균열의 상태 아래 두며 이들의 사슬에 뒤엉켜 들게 한다.

    백현진의 사적 방담이 배우(-역할이 되지 않는 내지는 역할 그 자체가 되는)의 연극으로 치환(다른 말로 설명)되는 형태라면, 밤섬해적단의 사적 방담은 방백의 형태로 역할(-이들 자신을 하나의 역할에 가려 보이지 않게 하는 가상계의 실재적 형국을 만드는 가운데, 곧 이들의 목소리는 무엇일까를 묻는, 그렇지만 들을 수 없는 가운데)의 연극으로 확장되는 형태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극-음악(음악극 역시 아니다)은 음악의 무대와 연극의 두 평면이 결코 구분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내지 의식적으로 무대를 음악만으로 채워야 한다는 순수 이념의 강제 따위에 휘둘리지 않거나 그 경계를 터놓음으로써 이 무대를 그들이 만드는 하나의 주체라는 역할로 소급시키게 했다.

    이 둘을 다원예술의 지형도 안에 드러내도록 한 것은 음악과 연극의 경계가 하나의 주체에게서 허물어지며 장르적이면서 장르들의 혼종적인 어떤 새로운 어떤 형태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곧 두 이질적인 형태가 접착된 것이 아닌, 하나에서 다른 둘을 찾는, 다른 둘이 하나의 큰 평면으로 연결되는 어떤 순간들.

    (참고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리성웅’ 전은 지난 15일 일요일에 마지막 앙코르 공연까지 더해지며 마무리됐고, 백현진 공연을 끌어들였던 배영환 작가의 전시는 또 다른 콘서트에 대한 요청이 허락된 채 진행 중에 있다. 배영환 작가가 가진 다매체, 다원적 예술의 특징은 별도로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리성웅 전의 마지막 앙코르 공연의 연극의 형태를 전유한 콘서트 역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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