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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전하의 봄> 리뷰 : '역사와 현재의 혼재화된 현실에서'
    REVIEW/Theater 2012. 7. 11. 17:21

     

    연극은 현실과 가상의 혼재된 전략에서 진행된다. 안경을 쓴 전하와 양복 입은 하인의 대면에서부터, 무대 밖 극장 문은 닫히지 않고 끊임없이 이 무대로서의 연습실에 곧 역할로서 임하기 위해 들어오는 배우들의 들락날락거리는 입구가 된다. 이는 현실과 무대를 잇는, 또는 관객의 의식에서부터 무대로의 시간의 터널인 셈이다.

    여기에 악기가 장단을 맞춰 끼어들며 현실을 놀음판의 연장선임을 자연스레 확인시킨다. 선글라스를 낀 전하는 지난 어느 특정 시점의 전하에 근접하며, 안경 낀 양복 입은 남자 하인은 마치 상사에게 압박받는 샐러리맨 같은 유사성을 주며 역사를 집약하는 통시성의 조건을 이룬다.

    끊임없이 연극이 이뤄진다는 의식과 함께 연극의 시간 터널의 지점은 한편 무대에서는 연습 현장에서 연극의 실제 현장으로 차원 이동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지금 관객에게 보이는 무대는 실제 무대 올리기 전 사전 단계로서 재밌게도 무대 올리기 전 무형의 관객을 앞두고 벌어지는 실전적 연습인 셈이다.

    초반 어둠 속의 칼의 휘두름은 일종의 연기를 위한 연기지만 이는 오히려 더 실제 같은 아우라를 드러내는데 재현은 일종의 재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인식하는, 곧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이 어떤 직접적인 연기로 나아가는 지점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며(곧 이것은 <전하의 봄>만이 지닌 특별한 연극의 규칙인 셈이다) 여기서 공명하는 부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원한 감옥이며 신숙주는 살인마’라는 비판은 역사를 넘어 현재를 관통한다. 역사의 재현은 연극 안의 시간대인 그 역사에의 몰입만이 아닌 현재에 비판적 시선을 생성하기 위한 거리 두기적 제시가 동시에 또 필요해지게 된다는 것은 <전하의 봄>이 전하는 앞서 언급한 현실과 연극의 혼재된 전략과 같은 특별한 형식에 합치되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연극 속에서 명분과 실리의 갈등, 인물 간의 그 갈등 섞인 교통(交通)의 지향이 늘 단절되고 마는 것은 연극 안에서 그 연극 바깥에서 연극에 대해 논하는 가운데 실체에 대한 정의를 꺼내며 드러난다. 실체는 존재라는 입장은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가령 이는 인간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므로 실체로서의 이름은 없고 그 입장과 관점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코 영속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일견 역사 속의 인물이 이름으로 남고 그래서 그 실체를 추정하며 유동하지 않는 또 수많은 그의 배경에 그를 감싸고 있는 관계들을 생각지 않는 우를 범하는 역사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또한 독자적으로만 사람은 존재할 수 없음을 또한 의미한다.

    이를 확대해 보면 현 순간의 존재함이라는 것은 단지 현재에 고착되는(실체라는 존재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의 현실 사회 속 관계를 비롯하여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한 커다란 역사라는 타자와 대면하며 자신의 판단을 늘 가늠하며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신숙주 역의 배우는 역할 바깥에서 몰입에서 심하게 갈등하며 신숙주와 충돌하고 만다. 역할과 화해하지 못하고는 이 인물로 몰입할 수 없다. 곧 몰입으로서 현존함은 이 몰입이 가능하기 위한 역할과의 경계를 최소한도로 지워야만 한다.

    명분과 질서는 실리와 현실 앞에 일견 무릎 꿇은 듯하지만 명분 없는 실리와 질서 없는 현실은 폭력으로, 이를 접하는 부조리를 은폐함의 또 다른 이름으로 곧 드러나고 만다. 곧 사육신을 처형하는 세조의 모습은 단적인 장면이다.

    왕은 자유를 표상한다. 왕으로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리, 신하들의 이름이 하나씩 나열되고 머리통으로써 둔탁한 오브제가 칼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대 위에 던져져 뒹군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육신은 제거된다. 여기서 은폐됨은 죽음 그리고 정의를 울부짖는 올바른 목소리라기보다 다른 가치를 우선시 않고 하나로 합리화하며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타자와의 교통 가운데 성립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스스로의 가치다. 곧 세조의 자유는 은폐됨에 의한 자유다.

    반대로 신숙주의 아내는 역사의 이름에서 실체를 발견한다. 곧 현순간의 목숨은 역사의 물결에서 남는 이름의 영속함을 목표 속에 이 현실을 못 본 체, 이 감정을 가벼이 두는 것이다.

    연기는 인지와 사유 속에 놓이고 역할과 실제 배우의 연기는 긴장 속에 성립함을 보여준다. 가령 이 긴장과 연기의 지속에서 발생하는 무대의 실수는 연기를 더 리얼하게 연기임을 체감케 한다. 역할 바깥에서 역할에 대한 판단이 옳은지 곧 그것의 변화 가능성을 두고 바라보며 역사의 현재로의 되돌림을 생각하게 되거나 역할에 놓인다는 배우, 곧 이 역할 속에 몰입하기 전의 배우를 우리 자신이라 믿으며 또는 암묵적으로 전제하며 이 연극이 펼쳐지고 있음을 본다.

    극의 마지막 대사에 북은 요란하게 들썩이고 시위의 아우성이 자욱하게 머무는 복합적 층위가 펼쳐진다. 운동권의 투사들이 무대 뒤에 실체적 그림자로 자리하며 역사에서 과거의 한 순간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현재를 추출하고 역사를 현재로서 다시 쓴다(rewriting).

    여기서 신숙주의 감정이 북을 치는 연출의 말처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재에서 공명하며 신숙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은 마지막 수수께끼로 당도한다. 또한 북을 치는 데 온 힘을 쏟으며 이 역사의 영원과 또 역사와 현재의 해후의 순간에서 모든 의식을 기울이며 정념의 퍼포먼스가 앞선 복합적 층위의 끝을 완성하는, 따라서 이 씻김의, 해원의 연극은 무엇을 말함인가.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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