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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번째 "19금 퍼포먼스", '외설의 경계에서'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1. 1. 20:46

    "19금 퍼포먼스"에 대한 단상들

     

     

     

    19금(禁)이란 말은 미성년자는 불가한 외설(obscenity)의 영역을 보여주는 대신, 단지 상상케 하는 데 그친다. 이 19를 19분의 공연 시간의 제한으로 바꾼 게 곧 '19금 퍼포먼스'다. 이른바 상상의 영역(상상계)을 상징의 금기(상징계)로 치환해 룰의 세계(정확히는 ‘빈 형식의’)로 바꾼 게 ‘19금 퍼포먼스’다. 그렇다면 '19금 퍼포먼스'에 리얼(실재계)은 있는가.

     

    우선 19금 퍼포먼스는 바깥에서 보자면 꽤나 모호하다. 예술 치고는 대중적이면서도 여전히 외설적인 부분이 있다. 일종의 대중문화(pop-culture)의 음화 버전인 동시에 예술(art)의 양화 버전이라 하겠다. 19금이 모두를 포섭하지 않는 대신, 또한 예술이 프레임화되는 대신 일종의 19분이라는 장 안에 ‘작가로 표상되지 않는 불특정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다. 19분은 (금기라는 점에서) 비탄력적이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탄력적이다. 19분은 하나의 형식으로서 거의 무한한 역량을 제공한다.

     

    19금 퍼포먼스'들'이 아닌 19금 퍼포먼스라는 하나의 단수로 총칭된 퍼포먼스들은 이 규칙 자체를 모든 개별 퍼포먼스 앞에 내세운 것이라, 단순히 그렇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이 단수는 그리고 어떤 수식어도 앞뒤에 부가되지 않는 이 하나의 고유 명사는 실은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는 빈 형식 속 ‘규칙의 신화화’(오로지 규칙만이 선행하고 존재한다) 가운데 구조를 만들지 않음과 ‘계보의 탈신화화’를 낳는다. 덧붙이자면 책임지지 않는 자세까지 담보한다.

     

    이 페스티벌과도 같은 하루 최대치를 뽑아내는 19금 퍼포먼스는 언제 증발할지 모르는 것이다. 역사를 만들지 않는 것과도 같다. 바로 이 고유명사가 가리키는 하나의 ‘자유로운 위대함’이다.

     

    앞선 리얼(Real)은 이를테면 이 외설을 상상하는 대신 외설 그 자체가 되는 것일 것이다. 19금이라는 하나의 규칙마저 허무는, 19분 이상의 충만함을 담은 19분(단지 인식 불가한 시간으로서)의 충격에서 나올 것이다. 19분은 일종의 틀을 짜는 가장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출발점이자 형식을 제공한다.

     

    이 19분은 그냥 짧은 시간이고 딱 그만큼의 시간일 뿐이지만 그리고 어떤 내용도 담보하고 있지 않(는 듯 하)지만, 실은 이 19분과 퍼포먼스는 무의식적으로 길항 작용을 펼쳐야만 한다. 이 19분의 금기가 사라지는 순간 19금 퍼포먼스(들)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19에 대한 긴박함을 알리는 아이패드가 최첨단 모바일 기기의 활용인 것 같은 느낌을 주던 것이 겨우 이 년 전인데 이를 든, 라운드 걸과 일식집 종업원을 섞어 놓은 듯한 꽤 외설적인 여자 분은 홍성민식 극적 장치가 개별 퍼포먼스들에 침투한 형국이었다. 이 외설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퍼포먼스를 시작하고 완성시켰다. 그런데 3회는 철저히 그러지 못했다. 이 외설에는 적당한 물신, 소위 광과 사치(스러움)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너무 투박했다고나 할까

     

    19분은 모든 퍼포먼스의 끝을 알린다. 이 끝은 ‘끝났음에 주목하는 끝’이다. 즉 이 끝은 여운을 남기는 대신 깔끔한 처리의 결과이자 일종의 상품처럼 매끈하게 소비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비는 역시 리얼의 측면에서 또 다른 외설이었다.

     

    이 19분은 모든 퍼포먼스를 동등하게 다른 말로 평등하게 분배했고 또한 개성 있는 무엇으로 지나가게 했다. 홍성민식 해설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는데 이 19분의 규칙(19분은 절대 시간으로, 무엇도 침범할 수 없다)을 깨버린 개입이었다. 또한 친절한 주최자로서 자신을 드러냄은 선생과 학생의 일방향적 교환으로 이 외설을 교육의 장으로 바꿔버렸다.

     

    매우 미묘한 순간의 차이를 낳을 뿐이겠지만 사실 실패의 방식이다. 이 19분의 내용 없는 형식이 그 맥락의 오랜 준비과정 자체로 성립하는 메시지로 치환하는 가운데, 외설은 다시 언어로 이해 가능해야 하는, 이미 의미를 담보한 예술로 바뀌고 말았다.

     

    우선 필요한 것은 이 전유된 선생-학생의 관계 이전에 실제로도 학생들이 절대를 차지하는 자리의 소위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이 물은 외부의 영역을 도입하는 것이 아닌(물론 이러한 부분도 필요하지만) 1회 때처럼 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외설이 되는 그런 부분에 가깝다(가령 케이크를 든 소녀로 표상되는 여자 퍼포머가 호텔로 나들이를 하며 호텔에 케이크-실재thing을 떨어뜨려 놓고 가는 퍼포먼스 같은 것). 1회(공간 해밀톤)와 2회(대안공간 루프)는 외부는 내부의 확장이자 여유로움이었다면(거의 건물 전체를 점유하는 것에 가까웠다면), 3회(서교예술실험센터)는 외부가 내부보다 큰 소음으로 내부를 유폐시키는 닫힌 형식을 초래했다.

     

    공간의 문제를 차치하고 일단 프로페셔널의 해체가 19금 퍼포먼스의 장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곧 프레임화된(블랙박스건 화이트박스건 간에) 예술을 프레임을 벗겨내서 하나의 '무의식적 정언명령'(여기에 더해 "19분은 내재적 리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 방목하는 예술가들의 터전을 만드는 것, 19분이 장르의 틀 자체를 해체하며 수행적인 주체로 만드는 그 무의식의 목소리에 주목하자. 다시 생각하면 19분은 이제 진정 시간의 실재를 가리킨다. ‘오직 시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홍성민이 생각한 게 블랙박스와 화이트박스의 교차라면 이 둘은 실제 그것과 상관없이 자유로운 게 아니라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 두 영역을 교차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라고 물음을 던져 보지만, 이 물음에는 다원예술의 혐의가 또 묻어나는 것만 같다.

     

    이수성·최태현 <12월 28일> : ‘차연의 상호 참조 놀이’

     

     

    이것은 분명 실재와 환영이 교차하는 연주다. 두 층위의 사운드 교차는 분쇄기가 되어 잔향의 공백을 비워두지 않는다. 사운드는 내지는 소음은 분절(써지는 소리)되지 않는다. 곧 언어화(상징)되지 않는다. 또한 남성이나 여성의 절규와도 상등하지 않는다. 곧 목소리의 지표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소리는 선후 관계를 가릴 수 없는 공사판-실험실(무대), 노동-연주의 합치된 세계를 표상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평등한 분배의 뒤섞임은 침범하지 않는 듯한 상호 규약적인 인터액티브적 작용 속에 작동되고 있다는, 동시에 두 층위는 연주 인 것 같은, 내지는 공사장 같은 것이라는 시뮬라르크 속에 끊임없이 유예된다. 일종의 차연(Différance)이 작동하는 것이다.

     

    곧 이 소리는 그 자체로 완전히 기능하면서(사운드는 소음으로 소음은 사운드로)동시에 사운드에 근접하고자 하는 소음, 소음과 멀어지지 않으려는 사운드로 상호 작용하며 스스로를 정립하지 않는다. 동시에 노동은 연주로 연주는 노동으로 가는 결과를 잃어버린 무용한 행위들의 두 쌍을 통해.

     

    이대일 <소리에 이르다> : '무엇이 연주인가'

     

     

    “시각장애 아동의 출현”,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반면 아이들은 우리와 똑같이 그 나이대의 아이로서 순진하게 말한다. 이 점에서 이 얼굴은 동등한 것이 아니라 분명 우리와는 다르면서 우리에게 타자가 되는, 나아가 우리의 편협한 타자화를 버릴 것을 요청하는 규준점이 된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 모든 의식을 무화시킨다. 이들은 연주한다. 하지만 이것이 연주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현을 켜는 소리 역시 어떤 구문도 남기지 못한다. 줄을 늘이며 당기는 에너지가 소리가 되는 이 소리는 공명되지 않는다. 그 소음이 마이크를 통한 이차 증폭으로 스피커를 통해 전달될 뿐이다. 엄밀히 악기로서도 충분치 않고, 정교한 앙상블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이 소리는 행위적이고 그 행위는 유희에 따른 것이다. 중간에서 이대일 작가가 현을 크게 늘이고 줄여 불필요한 긴장의 과잉을 만든다.

     

    여기에 관객 몇 명이 이 현을 붙잡고 동참하고 있지만, 이는 인터액티브와는 상관없고 다만 현을 붙잡아 연주 장치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관객들은 점점 따분해진다. 음악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음악을 위반하(며 음악이 되)는 것 역시 아니다. 19분은 이제 퍼포먼스의 형식을 근본적으로 제공하고 착안케 하는 장치의 기능을 벗어나 19분 동안을 버텨야 된다는 상징적인 법칙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음악으로 규정 내지는 이해하려는 시도가 따분하게 한다. 하지만 이 유희 작용이 음악이 될 것이라는 음악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지는 음악의 연주자로 세운 것 자체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주자가 아닌 행위자와 연주자와 청중의 위치로 구분된 이 표출과 이해의 기만은 하나의 트릭 아닐까.

     

    배종헌 <여기 별 있다> : ‘별을 세다’

     

     

    배종헌은 별이 사라짐을 인류의 상상력이 상실하는 것으로 푼다. 사라진 별들을 찾았을 때 이 별이 상품화·브랜딩화되어 우리 일상에서 찾아진다고 한다. 이 현대적 우화를 채 말을 떼지 못한 아이가 읽는다. 어린아이의 시점을 차용하지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시점인 것처럼 재단된, 자신의 것이 아닌 작가의 문장들을 읽음으로써, 그래서 자꾸 미끄러지고 제대로 이 문장을 읽지 못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어린아이의 시점을 가져간다(관객은 이 어린아이의 시점에 속는다).

     

    이 영상의 말은 다시 현장의 작가의 언어로 옮겨지고 작가는 퀴즈를 낸다. 사실상 별을 잃어버린 게 아니고 별을 보는 내지는 보려고 하는 낭만을 잃어버린 시대를, 동시에 어떤 것도 상품화하며 고유한 의미를 상실케 하는 자본주의의 상품 미학의 시대를 어린이의 말로 전유하여 비판적 메시지를 은폐하던, 웃음으로 치환하는 형식은 그 자체로 효과적이다. 곧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작가는 자연을 지배하는 게 아닌 자연의 일부로 위치한 도시에 대한 성찰을 말미에 전하며 이 웃음과 유희의 시간을 전환코자 하지만 사실상 이는 꽤 힘이 없다. 19분을 넘은 탓도 있지만 자각의 메시지는 일정 부분 낭만에서부터 출발했다는(저항에서부터가 아닌) 자기 역설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19분의 금기를 돌아본다면, 사실상 30분을 넘지 않으면 된다는 사실에 근접해진다. 퍼포먼스는 내지 다음 퍼포먼스는 정시(내지는 정해진 시각)에만 시작하면 된다. ‘정시에 시작된다’가 19분을 덮고 있는(잠재하는) 규칙이다.

     

    VALLETPARKING <강약중간약> : ‘노래방-되기’

     

     

    노래방을 만들고 ‘여수밤바다’를 꺼내든다. 의미는 스크린에 나오는 노래방 영상의 메모리에 있다. 그에 따르면 여수밤바다가 아닌 청계천이 낭만의 코드를 띤다(물론 비판적인 의미로). 앞선 자본의 비판을 은폐하며 보여준 낭만 담긴 퍼포먼스는 이렇게 연계된다. 하지만 이는 부차적인 게 아닐까 싶다. 아니 과도한 의미 부여에 불과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들은 진정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그저 진정으로 부르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노래방에 진짜 온 것 같은, 우리와 상관없지만 이들의 방에 유령처럼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온전히 여기에 적응한 것에 가깝다. 곧 이들은 유희를 통한 점유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점유는 성공적이다. 여기가 노래방으로 충분히 여겨진다는 점에서

     

    과도한 의미 부여는 4대강의 1년간 채집, 그리고 거기에 맞춘 라임으로 노래 역시 재전유되는 것이라는 중간의 홍성민의 설명이 있은 후에 갑자기 놀이가 아닌 의미 있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아니 의미하는 듯하게 된다. 이 경쾌함은 묵직해진다. 이 간극은 실상 노래를 부르며 노래에(내지는 노래 부르는 태도를) 취할 뿐이지 그 화면은 매우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어떤 의미도 없음에서 유래한다. 그냥 이 노래에 동화되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노래방이 된 공간은 딱 그 만큼 노래와 반주 화면에 대한 집중을 지운다. 일종의 이미지 산책의 시각장은 4대강 관련 채집한 이미지들은 이 노래방이라는 형식에 의거한 의미 없는 일련의 시각적 흐름들 속에 의미 없이 지나간다.

     

    어쩌면 퍼포먼스를 제약하고 제한하며 놀이 그 자체의 형식의 효과를 줄이며 동시에 메시지 차원을 전환한 것은 덧붙여진 홍성민의 말이었다.

     

    이영준·박카로 : ‘원-이미지 기억’

     

     

    이영준, 박카로 두 사람이 앉아서 핑퐁식으로 이미지 기술의 채팅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박카로는 태아에서 출발하고 이영준은 어린 시절로부터 출발한다.

     

    가상의 내면과 실재의 기억이 교차한다. 핑퐁은 박카로에 비해 압도적인 이영준의 기억에 맞물리며 강렬하게 남은 변형되지 않은 원 기억 이미지에 미학적 용어들이 덧대어진다. 그리고 화면 왼쪽의 작은 채팅창 그 옆에는 커다랗게 일 년씩 지나가는 연도에 부가되는 이미지 하나씩이 제시된다.

     

    이 기억들은 이영준 자신의 ‘기계기’를 형성했던 기억들에 다름 아니다. 가령 1986년 광주 민주항쟁 당시, 장갑차는 이영철에게 살아있는 키네틱 아트를 연상시켰다. “~을 보다.”, “~을 느꼈다.”라는 말이 관찰자 주체를 가시화한다. 하지만 이미지는 계열화되지 않고, 그에 대한 해석도 삼간다.

     

    박카로의 경우에는 “낯선 남자의 시선”, 그리고 “고구마를 보다.”, 이처럼 어떤 실제적 의미도 형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미지)을 경험했던 사람과 단지 주워듣고 시뮬라르크의 가상화된 기억만을 가진 소설적 화자가 상등의 교환을 한다.

     

    쾌감은 어쨌건 간에 타이핑을 통한 문장의 완성이고 차트의 넘어감에서 기인하는 것에 가깝다. 둘이 2011년, 2012년에 와서 만남은 서로를 본다는 또한 호명한다는 묘한 울림의 공명이 있다. 곧 어긋난 시간, 어긋난 공간의 상이한 경험(엄밀히 말해 언어)은 하나의 시간대로 그리고 현재로 수렴하는 것이다.

     

    Michelangelo Pistoletto Band : ‘전유를 통한 아우라’

     

     

    ‘너를 가리키는 눈빛’, ‘나를 가리키는 섬’, 전자는 나를 가로지르는 눈빛, 동시에 내가 의식치 않지만 앞서 있는 눈빛, 그것(Es)으로서 눈빛이라면 후자는 유폐된 나를 가리킨다. 분명 이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나를 지배하는 또는 지배했으면 하는 눈빛과 물리적인 조건으로서 자신을 가두는 섬은 에로스적으로 조응한다. 노래는 신비스런 분위기의 차원에서는 단지 하나의 단조로운 코드만을 두는 것 같지만, 그 자체로 꽤나 묘하고도 충분한 감상을 제공한다.

     

    중간에 마술이 장식한다. 마술이 지배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오히려 잠깐의 장식에 불과하다. “포토”와 “코끼리” 간 기묘한 조응이 두 번째 곡을 장식한다. 여기에 무표정의 얼굴에 감정을 거세당하고 인위적으로 정박된 위치 지음이 일종의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권위를 분명 형성한다. 공주와 같은 의상은 지나친 어깨 장식으로 중성화되어 보인다. 마치 제5원소의 카운터테너의 모습과 같다. 남성의 노래에 더해지는(뭔가 매우 트랜스젠더가 부르는 듯한) 립싱크는 그에 대한 부가적인 증명이자 완성이다.

     

    정금형 <제품 사용 후기> : ‘끈끈한 섹스에의 열망’

     

     

    유일하게 ‘진정 프로답다. 진지하다. 짜임새가 있다.’, 이는 무얼 말하는가? (다른 이전 퍼포먼스들과 달리) 뭔가 어색함을 의미한다. 인형과 마주함, 인형을 응시함은 인형을 살려낸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인형은 나를 사로잡는 무엇이다. 이 혼자만의 자위적인 그러나 그것을 은폐하는 타자로의 귀속(정확히 그에 대한 열망)은 이 인형과의 정교한 섹스의 느린 움직임들의 시간 속에 정확히 섹스로 생성된다.

     

    여기에는 느리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이 느림이 둘만의 정교하고도 합당한 섹스의 형식에 몰입을 제공하며 또 하나는 이 느림이 가상이 아닌 실재의 전개를 유도해 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람에 부합하는 커다란 인형과의 뒹굶, 나아가 섹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의 중요한 첫 작가로서 모티프가 됐던 것처럼 타자로의 귀속과 실상 그것이 트리스탄의 환영에 가까운 혼자만의 열망이지만, 실제 그것을 실재로 만드는 가운데 커다란 열망을 치환하는 유사-섹스가 퍼포먼스의 주를 이룬다고 보인다.

     

    최춘웅 19금 특강 <Amorous Architecture> : '에로스와 건축의 상관관계'

     

     

    최춘웅은 퍼포먼스 대신 강의라는 형식으로 건축에서의 인간의 감각의 분배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데, 이 강의임직함의 유사-퍼포먼스는 19분의 제약을 벗어났고, 여유 있는 전개를 가져갈 수 있었다. 르네상스 전까지 신체를 사랑하는 것이 금지된(억압된) 세계관 아래 건축에 대한 인간의 사고로 확장한다. 건축은 신체의 환유인 탓에 르네상스를 지나 15세기를 지나 건축은 인간의 애정의 대상이 된다. 사랑은 다시 시각적인 지배의 이해 방식으로 이해된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인식의 조건을 묻지 않는다. 단지 인식하는 나의 존재를 앞세운다. 나아가 여기에는 내가 느끼고 있음(물듦)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있음에 선행하는 주체가 자리한다. 건축의 인류학적(서양에 한정된) 지식의 나열은 육체는 건축이라는 도식, 건축에 대한 사랑은 시각 질서의 장 나아가 시각에서 촉각으로 넘어가는 방식, 그러나 여전히 그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감각이라는 도식을 낳는다.

     

    동양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그 사이에 자연을 닮은 소우주적인 건축을 현상한다면, 서양에서 건축은 남성과 여성의 지배 도식으로 동시에 나로부터의 확장, 이상적 관념물로 표상됨으로 구분 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역시 느끼게 했다. 자신의 전문 지식 분야에서 19금의 곧 금기시된 사고의 영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19금을 축자적으로 해설했다고나 할까.

     

    홍철기 <존 케이지 탄신 100주년 기념 대표곡 메들리> : ‘소음과 사운드의 경계 성찰’

     

     

    홍철기는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들의 재현 도식을 펼쳐 보인다. ‘4분 33초’는 기타를 공명시키지 못하면서 실은 미세하게 공명하고 있음을 묵언으로 명증하는 것 같다. 두 번째 믹서를 가는 것을 비롯해 폭죽을 터뜨리고 물질을 부수되 이것을 소리로 치환시킨다. 온갖 사물들의 사운드를 채집하는 풍경을 펼쳐 보인 후, 세 번째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앞선 믹서 가는 소리의 지표와 같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때도 무언가 듣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서 무엇이든 소리가 된다는 주의, 마지막으로 소음도 음악이라는 관념을 형성한다.

     

    세 번째 광폭한 소음은 일종의 평면적 세계로 치환된다. 평평한 세계, 허나 매끄럽지 못한 표면들의 공간을 상기시킨다. 휩쓸러감의 에너지, 거기에 구멍은 내지 끝은 없다. 오직 넘어가는 그 순간만이 있다. 동시에 이 흐름만 있을 뿐 시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 가상적이다. 19금 퍼포먼스의 시작이 일종의 스크래치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흔적을 다른 흔적으로 덮었다면, 여기에는 경계영역에 걸려 있다. 이를 각각 균열을 내는 방식과 균열로 환원되는 방식으로 엄밀히 구분해 볼 수 있을까.

     

    프로젝트 OZ(김태준, 한려원, 김지민, 김홍, 김보용, 탈각고) : ‘브랜드-제의식’

     

     

    이 퍼포먼스에도 홍성민의 해설이 처음에 부여되는데, 유니클로 매장에서 장례식장에서 어울리는 옷을 추천받아 검은색 옷을 입고 퍼포먼스한 뒤 옷을 반납하는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퍼포먼스라고 한다.

     

    24900원 그래픽 티셔츠의 광고 문구를 인디자인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컴퓨터 화면을 스크린 화면으로 확대하고, 건물 기둥을 돌며 상품 태그가 새겨진 띠를 어깨에서 허리로 두르고 제의식을 치루는 퍼포머들로 진행된다. 텍스트를 이미지적으로 다루는 모습 하나, 그리고 주로 자간 넓히는 것 외에 하는 일 없는 디자인 광경은 꽤나 따분했다. 사전 맥락이 신체에서 자연 파생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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