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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스티벌 봄<Q&A>, 다니엘 콕이 관객을 만드는 방식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3. 27. 09:53

    공연의 컨텍스트화



    <Q&A>라는 공연이 공연 후 Q&A가 덧대어졌다. 누군가는 (짜인 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과정화하는 작업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좀 더 정치한 설문조사의 방식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조언 섞인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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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는 이 작품이 관객의 개입이 효과적이었음을(그래서 작가의 만들어지는 작업에 참여했음을) 전제하며 후자는 작품을 만든 다니엘 콕의 설문조사의 차용 방식이 관객을 적확하게 반영하고자 한 목적 아래 진행되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오히려 작가는 관객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듯한 가운데 실은 관객이란 것의 맥락 그리고 무용 공연이라는 것의 맥락을 형성할 뿐이며 관객의 개입으로 전적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 이상으로, 그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에서 작품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두 갈림길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책의 종류에 인터액티브적이라는 성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작업은 관객의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완전히 보장하는 것도 또 그것의 구현을 전적으로 꿈꾸는 데 머물러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이 작업은 이른바 무용 공연을 새삼스레 정의하고 관객을 정의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무용 공연을 보고 또한 관객이 된다는 것이다.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사유로

    [사진 제공=페스티벌 봄]


    다니엘 콕은 먼저 간단한 춤을 선보이고, 자신이 관객이 원하는 것에 따라 작업을 만들고자 했고, 그에 따라 자신이 진행해 온 설문들을 통해 ‘관객의 욕망’, 곧 관객이 무용 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과 움직임, 음악 등 세부 분류 항목으로 구분된 설문조사의 통계치를 전한다. 이어 앞서 선보인 똑같은 춤을 선보이자 관객들은 처음의 진지한 태도 대신 피식 웃기 시작하는데, 앞선 공연에 맥락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세 가지 문항에서 관객이 원하는 항목을 선택해 이것을 참조해 앞선 공연을 조금 변형한 형태로 다시 선보인다.

     

    굳이 우리가 봤던 지난 무용 작업들의 동작과 전체적인 짜임새가 일종의 클리셰들의 접합이라는 것을 그의 작업을 보며 떠올릴 때 조금은 참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좋은 작품은 가반수의 친숙함과 소수의 낯섦을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라는 퍼센트적 예술에서 자의적으로 그야말로 필feel로 산출되는 예술의 과정을 생각해볼 때 메스껍기까지 하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다는 일종의 ‘데코룸으로부터의 무용’인 것이다.

     

    이러한 무용공연들 자체에 대한 사유를 끌어내고 거기에 관객이라는 주체를 생산해 내는 측면에서 이 공연은 탁월하다. 물론 이 주체라는 것이 일종의 가상적 효과에 힘입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의 작업을 기존 무용 작업들 그리고 우리가 그에 갖는 태도에 대한 메타적 성격의 주석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만드는 ‘참여하는 관객’이라는 주체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대한 주석 달기’의 또 다른 주체의 차이는 분명한 것이다.

     

    관습에 물든 관객

    이에 앞서 우리가 관객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무언가를 봐야 했고 또한 그 펼쳐짐을 긍정과 부정으로 판단해 내며(취향의 문제로 산출하며) 작품 자체를 존중해 왔다. 작품에는 수많은 의미들이 있었고 있어야만 했다. 이 의미와 취향은 분리된 채 따로 노닐었다. 무용수는 사라졌고 어떤 말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봤고 봐야 했고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대신 그 의미를 맹신하며 배설의 차원에서 좋다 나쁘다를 표시했다.

     

    만약 이러한 관객 태도의 극단적인,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의 부분에 난색을 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기에는 극장이라는 시스템과 모든 것을 소비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관습적 태도의 귀결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자족적인 생산과 자족적인 소비의 이원 주체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관객은 클래식 음악 대신 사운드 효과를 선호하고 예술이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에 그 목표가 있다고 생각할까. 그에 대한 대답은 설문조사의 정치함이 말해주거나 의도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설문조사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단 하나의 대답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대답들이 우리가 본 예술(컨템퍼러리에 가까운)에 대한 재현을 따르는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가 아는 예술이라는 정의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대답으로 예술의 대중성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예술의 모더니티는 놀랍게도 여전히 강하게 지배하고 있고 작품의 의미는 여전히 작품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무의식중에 드러낸다.

     

    적극적인 관객의 의미

    쇼와 같이 떠드는 작가에 의해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관객으로 권리를 획득하는 가운데 우리는 작업이 새롭게 만들어질 것에 기대를 표하게 된다.

     

    그래서 이 진지하지 않은, 알고 나면 이것은 별 거 아니였어 라는 식, 맥락에 따라 같은 동작도 달라진다는 사실은 과잉 의미의 전달 아래 우리가 불분명하게 의미들의 늪에 빠져 있는 대신 명확하게 맥락에 따른 동작들의 구현됨을 보며 적극적인 관객이 형성된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해서 이 작업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착각을 하는 적극적인 관객 그리고 우리가 의미들의 수용자라는 습관을 벗어나게 되는 적극적인 관객의 개념은 꽤나 다르다.

     

    사실 우리는 다니엘 콕의 공연에 진짜 참여했는가. 다양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이미 축적된 리서치에 바탕을 두며 실시간 항목들의 선택 역시 손을 드나 안 드나의 결정은 자유였다. 또 이는 다수결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관객이었던 이유는 그가 우리를 관객으로 호명한 탓도 있지만 설문조사의 일반화된 결과에 우리가 동조와 공감의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 손을 들든 안 들든 이미 우리는 참여하고 있었다. 그 설문에 임하는 자로서 들어갔다 나왔고 그 관객의 무리 속에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욕망을 경유하기

     

    관객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욕망한다는 식의 말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식의 제3항의 매개항을 설정하는 라캉이나 지라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가닿을 수 없는 진정성의 신화는 그가 실제 설문조사를 통해 그리고 실시간 거수를 통해 관객의 기호를 무대 위로 가져왔을 때 이야기는 달라졌다. 곧 내가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전달되리라의 강호동식 무모한 신념은 너의 욕망에서 출발해 나를 경유하는 방식을 썼을 때 의미 있는 프로세스가 되는 것이다.

     

    유형학적인 아카이브의 문서적 작업이 현장 라이브 쇼의 형식을 어떻게 정치한 연결을 가져갈 것이냐의 부분에서 이 부분이 기록되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하다는 점에서(현장의 순간적인 판단들과 분위기) 어떤 빈틈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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