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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정아,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 혼란의 물음 뒤 달뜬 참여로
    REVIEW/Dance 2013. 4. 1. 02:59

     


    전반적으로 관객을 한데 몰고 그룹을 짓기, 이어 섞여 춤추기의 과정 그리고 마지막 춤 보여주기로 귀결되는 안무의 과정은 의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끔 ‘의도된 의도가 어느 정도 보이는 참여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안무가는 그 엔트로피적 마치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무대에서 제일 처음 세 개의 물음을 각각 순차적으로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던진다.

     

    이를 나이브하게 축약하면 ‘여긴 어디냐’·‘춤이 뭐냐’·‘걷는 게 춤이 되냐’, 이 세 가지 정도가 핵심적이다.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여기’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 확정될 수 없는 공간이 맞다. 곧 이 질문은 무대가 원래 ‘생성의 공간’이라는 암묵적 규약을 드러낸다. 반면 춤추는 이는 이 확정지을 수 없는 공간을 관객 스스로의 정의에 맡겨 혼란을 안긴다.

     

    두 번째 질문은 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 이념의 구문으로 들어맞지 않음을 확인하게 하는 차원에서 성립한다. 춤은 명사화가 가능한가의 우문을 의도적으로 던지는 것이다. 춤은 ‘~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안무가는 그 ‘~을’이라는 목적어에 강조를 두지만 이는 혼란 속에 춤을 빠뜨리는 것이다.

     

    춤과 등가 되지 않는 것들로 곧 은유적 심상들로 춤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오히려 ‘무엇을’이 아닌 이 표현한다는 것에 춤은 방점이 찍힐 것이다. 곧 감정·사상 따위의 추상적 개념이 주가 되는 게 아닌 그 춤은 그것들을 춤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곧 명확하지 않은 것을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차원에서 드러내는 방식이 춤의 자잘한 정의들을 오히려 포괄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걸음은 춤이 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실은 이 걸음이 무용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한 착시적 물음이다. 또한 어떤 맥락(공연이라는)을 통해서만 걸음이 춤이 된다는 것을 굳이 감춰 질문에 대해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객들이 함께 추는 관객들이 풀어헤쳐지는 워밍업 성격의 춤은 클래식과 함께 하며 이 음악에 드디어 듣는 신체가 아닌 움직일 수 있는 신체를 참여를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반응하는 신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지난 쇼케이스 무대에 비해 무대의 크기는 줄었다고 볼 수 있고 관객 수는 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무용수의 움직임은 더 늘었고 관객이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다른 이들의 ‘교본’이 되는 횟수는 현격히 줄었다. ‘움직임을 모방한다’·‘따라 춰야 한다’·‘맞춰야 한다’는 ‘춰야 한다’의 3항조는 관객들을 지배한다. 이것은 과연 참여인가?, 경계를 흔드는 것은 단순히 섞임과 참여의 차원으로만은 달성되지 않는다.

     

    앞선 의문들이 실은 물음 자체의 역설을 은폐한 물음을 위한 물음이라고 할 때 관객이 빠진 혼란, 그리고 춤을 춘다기보다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또는 춤을 추는 이를 바깥에서 지켜보며 이 춤이 ‘나’의 것도 ‘너’의 것도 되지 않는 차원에서 춤에 한발 물러나 있는 관객들까지 이러한 의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의도된 춤의 집단 만들기와 섞임은 지난 쇼케이스에 비해 물리적으로도 어떤 효과를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는 클래식만이 들리고 이 환영을 남겨놓는 방식을 택해 앞선 공연이 환영이었음을 남기며(알리며) 빈 무대에서 그러한 경험의 환기만이 공연을 완성시키는 차원으로 부재를 현상화한다. 관객 곳곳에 섞여 있던 무용수들처럼 마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 물음에 대한 답만을 요구한다는 것처럼.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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