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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승엽의 댄스살롱] 김정은 <Three>, '음악과의 충돌로 생겨나는 안무'
    REVIEW/Dance 2013. 4. 2. 02:52

    ‘홍승엽의 댄스살롱’이란...


    국립현대무용단의 2013년을 맞아 선보이는 첫 공연은 오는 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는 ‘홍승엽의 댄스살롱’이다. 


    '살롱'은 프랑스어로 응접실을 가리키며, 17세기·18세기, 활발했던 프랑스 살롱 문화는 궁정 귀족의 사교계 모임이자 그 속에서 다양한 지식들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 됐다. 


    네 명의 국내 안무가의 신작들을 초청한 이번 공연에서는, '댄스살롱'이라는 타이틀과 같이,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인 홍승엽은 공연 중간 중간 관객을 만나며 함께 안무가를 공연 전에 짧게 만나보는 시간도 갖는다. 또한 공연 전후에는 극장 로비에서 4 작품의 연습실 사진 전시 및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도 마련된다. 실제 극장을 찾았을 때는 네 명의 안무가들도 로비에 나와 관객을 맞는 모습이었다. 


    한편 이번 공연은 무용 공연으로는 이례적으로, 6일간이나 진행된다. 네 개의 작품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고, 안무가 제 각각의 창조성이 발현된 작품들이다.


    삶에서 사운드-신체의 충돌로


    ▲ 김정은 안무가


    김정은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으로 처음에 해당하는 기억들은 그가 일종의 아이러니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삶의 환영적 모습과 안무의 작동 방식을 합치시키는 데 있어 꽤나 탁월했다는 것이다. 곧 삶의 한 모습으로서 나온 주체가 그 삶에 스스로를 기투(projection)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움직임 자체가 안무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두 여자의 기묘한 동거 방식으로 창출되기도 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드라마성도 강하게 드러났다.


    지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부터는 그가 함께 작업하는 양용준 사운드 아티스트의 통제 불가능한 또한 우연적인 사운드에 힘입어 무용수들이 그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 속에 고군분투하는, 일부러 그 사운드와 몸의 충돌을 놔두는 식으로 어지러운 질서의 실험 그 자체로서, 작품들에서 의식을 방기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들을 주고 있는 듯하다. 


    이는 ‘삶 주체’에서 어떤 매질 그 자체, 또한 즉흥적인 몸짓 자체를 구가하는 무용수의 관성적 표현과 그 균열 사이에서의 움직임 자체로 옮겨가는 대전환을 가져갔음을 또한 의미할 것이다.


    규칙들


    ▲ 김정은 <Three> 리허설 사진[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처음 익살스럽게 웃음 짓는 남자의 표정은 소극(笑劇)을 예비한다. 그에 따라붙는 음악은 과잉으로,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후 머리·골반·손목 등 신체의 부분들을 가리키고 움직임을 그에 맞춰 선보이게 되는 규칙들이 들어오고 효과음들에 맞춰 마임과도 같은 재현적인 몸짓들을 선보이는 가운데 다른 이가 내는 목소리는 공명되어 퍼져 나간다.


    규칙과 사운드의 상징적 제스처가 몸짓을 제한하고 정위시키는 것이다. 한편 물에 잠기는 소리와 함께 무용수는 자연스레 환경을 설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만든다. 곧 물이라는 사운드는 사운드가 아닌, '물' 자체로서 몸에 어포던스(affordance)로 작용한다. 


    참고로, 스피커는 계속해서 과잉인데 이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자체의 사운드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실제적인 이유에서 유래하는 듯 보인다. 사운드는 항상 극장 전체를 감싸고 적절하게 배어들 수 있는 게 맞다. 어쨌거나 그 스피커에 노이즈 효과로 방출되는 또 다른 사운드 질감이 생겨난다. 


    복잡해지며 사운드 과잉 상태는 몸의 엔트로피적 구문으로 이어진다. 사운드와 몸 사이에서 통제 불가능한 접점에서의 표현을 시도한 듯한 의도가 비친다. 세 무용수의 움직임이 제각각 다르고, 음악의 트랜스 양상과 전이가 계속 새롭게 생성되고 기존의 갖고 있던 몸과 새로움의 규약에 맞춰 생성해야 하는 관계의 시차와 움직임의 시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충돌의 지점에서 생성되는 신체


    음악에 적응하고자 하지만 그 음악을 내재적으로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 움직임이 생성된다. 여기서 앞서 수동적 규칙을 따르던 말에 의해 자동인형처럼 그리고 말을 하는 주체(?) 역시 매우 기계적인 것만 같던 부분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곧 이 작업에서는 지배가 아닌 오로지 규칙만이 있고 이 규칙에 따른 적응함에 몸부림치며 미끄러지는 또 튕겨나가는 그 부분에서 오히려 주체가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숭고한 아리아는 우스꽝스러운 듯 보이는 동작들에 생소화 효과를 안기는 게 아닌, 오히려 이를 몸의 분투에 대한 승화, 그리고 선물이자 축복의 성격에 가까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김정은의 옛 촘촘하고 삶의 시간성을 축적해 가는 안무 스타일이 한편으로는 그립다. 동시에 사운드 아트와 몸의 충돌 실험은 조금 더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갈 필요도 있다고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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