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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다페 2013] 안신희‧이윤경‧차진엽, <Three Lips>: '무용수의 개성'과 '무거운 서사'의 낯선 조우
    REVIEW/Dance 2013. 5. 28. 02:43

    신화 모티브 속 개개인의 돌출적 지점


    ▲ 이윤경 [사진 제공=모다페]


    두 여자는 머리를 빗겨주고 받는 관계로 일상의 영토를 그리고, 그 바깥에 느리게 다른 한 명이 이를 가로질러 궁극에는 그 앞으로 나가게 되며, 전체적으로 비극적 전운이 감도는 의미의 재편이 서두를 장식한다.


    세 ‘여인’의 만남은 필연적 전개이고, 서로 간의 뒤엉킴 이후 앞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남은 미래에 대한 예지적 기호를 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윤경은 하나하나 단단하게 움직임을 정초하는데, 음악과 구음이 뒤섞이는 황홀경 속에 춤꾼 그 자체가 된다.


     신화의 내용적 표현 대신 살풀이 같은 절절함의 음악에 침잠된 이윤경은 무희 그 자체로 음악 자체에 대한 신명을 부여한다. 이는 춤 자체가 역할이 갖는 의미를 발생시킴에 다름 아닌데, 원작에 대한 해석의 자율성을 선취하며 우리식 전유가 뒤따른 것이다.


     마치 발가벗은 채 얇은 모시 적삼만을 걸친 듯한 느낌은 사실 그 안에 살색 내피를 입었지만 중간 중간 드러나는 맨살 같은 느낌이 바람과 같은 자연의 기호들과 맞닿는 측면의 ‘열림’의 기호를 생성한다. 동시에 ‘풍경 소리’가 지나간다.


     각각의 각자 자신이 가진 춤의 스타일의 전형을 자유롭게 펼치는 일은 신화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신화로의 경쾌한 연결‧접속의 방식이기도 하다. 반면 무거운 음악을 선취하여 신화가 갖는 역사성, 알레고리의 풍부함을 어느 정도 보존한다.


    음악의 아우라라는 서사의 방식


    ▲ 차진엽 [사진 제공=모다페]


     붉은 색 옷을 입고 흰 천을 가슴께에 감아 이동하는 차진엽은 평소 파열적으로 에너지가 쏠리고 분출되는 상체의 긴장 어린 리듬을 흰 천의 선분과 연관 지어 유동하는 흐름과 함께 엮어 낸다. 이는 ‘틀지어진 시간성’의 서사를 함축한다. 


    여기에 갑작스런 신체의 재생(일어섬)과 스트로보 조명이 가해져 몸의 분절을 맺어 정적인 신체에 빛의 순간적인 연결‧접속의 분절 구문이 지닌 환영성을 강조하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수많은 존재자들의 무대를 양옆으로 교차해 간다.


     다시 조명이 꺼지고, 이윤경으로 초점이 넘어온다. 이와 같이 조명에 따른 배치가 인물에 대한 집중과 배치‧재배치의 파편적 이어붙임으로 각 존재의 층위들의 각기 다른 평면의 온전한 강조와 이 프레임들의 구성하기의 과정 아래 신화적 세계에서 그 세계의 구현 대신 인물의 절취적 강조로 그 인물이 뿜어내는 고유의 층위들로 의미의 지형도를 형성하는 심플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이 음악 안에 침잠해 있기, 그 음악 자체에 파고 들어가기는 그에 적합한 ‘최적의’ 미적 지형을 그리고, 그에 의한 음악의 외부적 삽입에 따른 각각의 내재적 평면의 전개 양상은 물론 원작의 신화나 그 인물들이 갖는 관계 내 서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으로써 말로 축약되는 신화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로부터 안무 구성하기


    ▲ 안신희 [사진 제공=모다페]


     차진엽, 이윤경 둘의 움직임이 합산되는 장면에서 메타적으로 연대의 감응이 발생하는 부분도 있고, 운명적 예속의 커다란 그림자를 상기시키는 측면도 있다. 더디고 느린 움직임은 호흡마저 이 음악의 구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특별한 신비로운 신의 언어로 소급되는 의미 지형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신비로움의 내용과 두 안무가의 협응의 과정에서 일종의 절합과 합치의 측면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곧 누가 이 움직임을 안무했건 이 움직임은 상호적인 구성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재편되며 각자의 변용 지점과 전유 지점의 미세한 차이들을 하나의 공통됨으로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신희의 등장에 ‘이름 없는 존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붉은색과 검은색의 양면으로 분배된 의복을 걸치고 구르며 다리를 만든다. 이 속에서 안신희의 움직임은 음악의 육중한 깔림에 이화되고 또 그 속에서 묶여 있는 상태를 통해 ‘비극적 존재’로 현상된다.


     이 주체로의 미끄러짐은 음악을 통한 거대한 시선이 아로새겨지고 그 안에 인물들이 그것을 의식(의식)적으로 따르고, 또 그 의미에 침잠되어 자유롭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래서 음악의 재현 양상이면서도 음악을 완전히 조합하지는 못하는 잉여의 조각들을 남기고 산화되어 가는데, 곧 이들의 움직임이 음악의 내재적 측면으로 소급되며 어떤 것도 실상 말해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이 춤의 내재적 기호들만 미적 기호로 도출되고 있음에 가깝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들을 통해 그리스 세 여신에 대한 이해를 꾀하는 것이 가능하다기보다 그저 새롭게 창조된 세 여신의 이야기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의미 자체에 갇혀 버리고, 그 의미들의 아우라에 소환되는 움직임들은 어떤 거대하고 신비로운 의미 질서를 전제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개별 이름을 부가하는 식으로 원전의 모티브를 각인시키려 하지만 이는 춤을 통해 생성되는 새로운 의미 지형 대신 선취된 의미 질서에 약간의 ‘흥’을 파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서사 없는 서사의 구성이란



    ▲ 지난 5월 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세 명의 안무가, (사진 왼쪽부터) 차진엽, 안신희, 이윤경


     세 명의 협응이 서로의 몸이 체화된 절합 구도로 펼쳐지거나 과정적 진단을 유추하게끔 하거나 신화의 모티브 전에 차라리 현실의 내러티브로 그에 대한 특별한 서사 짜기의 강박에 시달릴 필요 없이 ‘텅 빈 내용’ 안에 ‘셋의 만남’이라는 메타 차원의 형식을 가져 갈 수 있었다면 ‘이전의 아우라’ 대신 셋의 만남 자체만으로 생생한 의미 지형을 창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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