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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마기 마랭 무용단 <총성(Salves)>: '지나감으로서 현현에서 열어젖힘의 정치로'
    REVIEW/Dance 2013. 6. 11. 09:53

    '일상의 환영적 공간의 실잣기'


    ▲ 프랑스 마기 마랭 무용단 <총성(Salves)>(안무가: 마기 마랭)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릴 레코더 네 대, 널빤지들과 그 사이 열린 문들, 그리고 불 꺼진 객석, 곧 실잣기로 이어지는, 자신만의 내재적인 행동을 하는 이는 관객 한 명을 무대로 불러 세우며 그 실잣기의 네트워크적 층차를 만들어 간다. 


    이는 예상된 절차로서 반복된 행위로써 번져 나간다는 점에서, 사전에 약속된 ‘듯한’ 적확한 지정에 따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모두(의 과정)는 무대라는 한계를 지우고 ‘일상의 환영’을 만든다. 곧 실제로 보이는 환영으로써 무대라는 환영을 인위적으로 지우고 동시에 지시한다. 이러한 ‘과도함’의 설정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무형의 실잣기는 실제적인 행위이자 다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단지 그것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사실 이 ‘무형의’ 실잣기는 실이 진짜 있었는데, 무대 중앙에 들어서야 그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이 실은 보이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도 존재하지만, 빛에 따라서 보임의 여부가 결정되는 ‘환영의 지지물’이 된다.


    이런 실잣기는 계속 확대되고, 사전에 공모한 무용수들을 마치 관객인 듯 불러 세우는 트릭(규칙)을 실천하며, 점점 무대는 여전히 무형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환영적 현실로 남는 반면, 허공이 없는 복잡한 연결망의 구조를 조직하게 된다.


    각 존재자는 실의 연결 지점(노드node)을 조직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길의 촘촘함, 그리고 네트워크는, 이들이 무대에 점들이 된 총량과 같은 방향으로 양적 확장을 이룬다. 이는 수행적인 행위들로 그것의 합산은 네트워크의 상징적 의미와 실제적 지표로서 무형의 연결망 공간을 각각 의미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어둠과 어둠 사이 또 다른 어둠이 있다'



    이러한 일상으로의 열린 무대는 영화와 같은 환영의 세계로 반전된다. 불이 켜질 때마다. 무대 각각에 다른 존재자들의 움직임이 현상되는데 가령 무대 하수에는 깨진 접시를 붙들고 그것을 붙여 보려는 여자, 무대 상수 쪽 입구 옆에서 불이 켜지자 드러난 고개 숙인 여자와 문을 통과해 나타난 남자 등으로 이어지는, 일정 정도의 일련의 장면들의 단위가 반복적으로 생성된다. 


    이는 그 반복으로 말미암아 재현으로서, 또한 분절됨과 시차 또한 시간의 경과를 통한 낯선 현시의 어느 중간에 있다.


    일종의 하나의 테이크이자 그것들의 경과에 따라 중첩되며 더해지는 이 장면들에서 하나의 시퀀스의 생성은 묘연하다. 인물들은 그러한 테이크(또한 간격 안)에 갇혀 있고 그 시공간은 기시감을 안기며 달리 구축된다. 


    만약 이 붙지 않는 컷들의 집합을 단 하나의 서사라는 장치로 꿰는 게 가능하다면, 어떤 덩어리들의 시차에 따른 효과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오직 시간이라는 종합에 의한 것일 것이다. 


    영화의 컷 이후의 흐른 시간에 따라 재편된 층위에서 이러한 ‘몸짓’들은 움직임이나 춤보다는 실제적인 무엇이고, 그 ‘영화’와 같은 장 안에서 철저히 내재적인, 곧 우리에게는 환영적인 무엇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곧 테이크와 테이크 사이의 어둠만이 있으며, 한 테이크는 어둠과 함께 또는 그리고 동시에 생겨나는 빛-존재와 함께 생겨난다. 우리는 춤이 발생하는 것을 보는 대신, 하나의 장면이 발생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잉여로밖에 여길 수 없는 어둠(에서의 움직임)은 실제 ‘의미 없는 시간’임을, 단지 하나의 구분 지점(에서의 움직임)임을 상기해야 한다.


    이 파편화된 (그래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은) 장면들은 곧 어떤 기다란 물건을 탄성 섞인 구호와 함께 주고받는 집단, 그리고 철저히 내재적인 한 개인의 분절(아티큘레이션)이 각각의 의미에로만 소급되며 이것들은 전체적인 장의 합산과 그 속의 연결 과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아마도 가질 것이다. 


    이는 각 장이 하나의 독립되고 분절된 구문이며, 일종의 음소와 같이 언어의 최소 단위로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연 이러한 장면들 안의 몸짓은, 영화적 재현으로서 그 속에서의 현실의 재현은 춤인가. 시네마그래프와 같은 움직임들은 이 어둠에 현현되는 ‘존재자’들의 의미 없는 도약과 응전과도 같다. 이것은 무대를 장치화하는 극의 논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하나의 감상적인 시선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춤의 문법에서 바라봤을 때는 타당한 부분이다.


    하나의 장면이 ‘편집된’ 것이듯 실제 완전한 어둠 속 다음 장면을 위한 행동들, 사라짐 따위는 앞서 말했듯 잉여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이는 편집되지 않는 무대라는 제한된, 고정된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행동이면서, 이 알 수 없는 삶들의 실제 시간의 일부를 가리키는 측면도 있다.


    '언어화되지 않은 지나감의 사건들 이후 언어



    ‘총성’, 우리는 이 급작스럽게 나타남의 무엇들의 현현 곧 ‘지나감’에서, 어떤 시각적인 것과 춤보다 단지 하나의 파열음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이 ‘치열한’, 곧 짧은 어둠-빛 속에서만 가능한 움직임이 이야기를 형성하는지 알 수 있는가. 여기에 ‘소리’와 달리 언어는 없다.


    어떤 이름 없는 존재자들, 존재가 되기에는 너무나 짧은, 어떤 자신만의 특정 맥락을 갖고 행동하는 타자들이 있을 뿐이다.


    접시가 깨짐, ‘충분한 사건’이자 앞서 깨진 접시를 들고 있는 여자의 행위를 비추던 초기 장면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이 깨짐은 모든 이들의 급작스럽고, 노동의 수행적 중단 없는 행위에 불길한 기운과 어떤 사유를 촉발시킨다.


    무대가 완전히 밝아졌을 때(어떤 하나의 루트를 일단 완성한 것 같은 느낌을 새길 때, 가령 앞서 남자가 열린 문에서 나올 때) 릴 레코더를 돌리고 들어가며 이 작품에 대한 일종의 극중극의 표지(재생되고 있음)를 가리키는 자기-지시적 몸짓을 기입한다.


    이 장치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무대에 기입하며 마치 그 영상의 장면만을 보고 있던 것에서 그 나머지 매체의 한 부분을 뒤늦게 그것과 연결시켜 봐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드러나지만 실상 감쳐져 있던, 다시 그것을 드러냈을 때는 어떤 의미의 종합도, 밝힘도 없던 이 재현들, 공간에 편재(편재)하며 가는 낯선 모나드들의 현상은 무엇에 대한 재현인가. 이는 현재를 벗어나 그 자체로의 의미들을 가진 채 자족적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하나의 ‘이미지’를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파편들, 그리고 춤, 정치적 존재, 다시 카오스로'



    연갈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턴’, 무목적의 단단하지 않은 이 턴은 연약함의 표지, 주체가 아닌 타자의 영역의 기호로서 여자의 춤은 (영화가 재현하는) 일상의 영역과 (단지 이미지로서)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영역 뒤에 제 3의 무엇으로 온다.


    곧 잠깐의 ‘춤’의 발생, 그렇지만 다시 반복된다.


    온갖 파편들은 가령 이렇다. 각종 조각들, 자유여신상을 들고 오다. 빛 속에 깨짐, 그리고 사그라지는 빛,  ‘늙은 남자’의 옷매무새를 갖춰 주며 보필하는 여자, 반짝이는 다이오드들의 인간-형상(돌이켜 보면 이는 온 몸을 붕대로 감은 환자의 도상이 아니었을까) 곧 어떤 비인간의 현현, 토르소, 이러한 물건들의 다룸, 뛰어다님, 옮김의 행위들.


    그리고 이는 거대해진 소리와 맞물려 20C 초의 산업의 거대한 동력, 도시의 광장, 철도, 일종의 진취적 교향곡(이는 일종의 전쟁의 기호와 맞물릴 것이다)의 파편들의 조합‧합산의 광경에서 고양되며 재편된다.


    이 신속한 뛰어다님과 사물의 다룸, 그로 인한 적확한 관계 맺기의 양상, 의도치 않은 실수로의 이어짐은 일상의 재현에서 일상을 초과하는 영역으로 나아가며, 리듬을 담지한 집단의 역학 장으로 피어나기 시작한다.


    의미를 획정할 수 없는 혼란은 지난 것의 반복과 리얼한 몸짓들, 거기에 결부되는 목소리-사운드들이 기억에 의한 종합에서 겪는 혼란, 지속된 분절과 재편에 따른 산출할 수 없는 현실에 의거한다.


    동시에 ‘조각적 단편’으로부터 의미는 ‘성장’으로 기입되기도 한다. 꽃병을 다루다가 그 꽃병에 꽃꽂이를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깜빡임의 장면은 다른 장면들을 거쳐 다시 돌아왔을 때 시간의 경과를 보여 준다. 


    이 장면은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것들이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연결망을 그리지 않는 분배에서도 장면은 내재적인 시간성의 지속을 가져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불 꺼진 틈이 시간의 실제적 경과를 가리킬 수 있음과는 완전히 상응하지 않지만, 반복은 구문들 간의 차이가 아닌 분명히 구분된 모나드에의 차이를 생산할 수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불이 켜지고 이들이 한데 모여 어떤 보이는 집단으로 표상될 때, 갑작스레 한 명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에서 튀어 나오며 한 명을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는 ‘깨짐’이라는 사건의 도래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맺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이들이 내재적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며 역사‧사회라는 더 큰 심급과 거대한 국면에 머물러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모든 외부적인 것의 우연적 토대에 의해 삶의 지평이 재정초됨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흑인, 군인, 인디언 부족과도 같은 여러 상이한 사회 집단이 있다. 이는 타자의 표지(흑인, 부족)를 가리키거나 비일상의 무엇(군인)이다. 


    부시, 영국 국왕, 다비드상(각각의 인물이 앉은 자리에서는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다)의 레디메이드와 리얼이 한데 모여 있는 현실 패러디적 기호의 팝아트, 의고적 낭만화 등 대중없는 그림들을 닦고 옮기는 구부정한 늙은 노인들의 모습에서 확실하게도 이 그림들이 사회적인 것(상징적인 것)을 가장 확실하게 부가하는 잉여적인 현실의 구문이다.


    또한 한 쪽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어둠 속에서 깃발을 들고 남자에 의해 이리저리 돌려지는 바는 잔다르크의 수난을 가리키는가. 이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맥락을 현재화하는 것일까.



    스트로보 조명 아래 ‘두 번째 춤’의 표지가 생겨난다. 지구는 총성과 함께 깨지고 이어지는 광란의 춤, 상징적 의미의 지구는 파괴됐다는 것일까. 그리고 아이러니컬한 위치에서 춤은 삶을 비재현한다는 것일까. 


    하나의 긴 커다란 상에 테이블보가 놓이며 그것들 위에 꽃들이 오르고 음식들이 차려진다. 이 분주한 움직임은 이제 테이크 대신 일상의 현실로 완전히 옮아간 상태에서 ‘목소리들’의 과잉에 그 리듬만을 전유한 채 움직인다. 


    이들은 어떤 일상을 구현하는 기계로 작동한다. 이 풍부한 소음과 역동적 변전의 장은 카니발의 구문이다. 충돌과 싸움은 갈등과 그것의 극단적 표출이 아닌 이 만찬의 장소를 그야말로 축제의 장소로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검은 배경, 곧 영화를 성립시키던 검은색의 판자들에 색색의 물감에 의해 페인팅과 절합된 그 자체의 역동적 움직임의 표지를 이루는 춤의 상징이 새겨진다. 이 과잉은 한편 측정할 수 없이 무대를 열어젖히며, 닫힌 공간에 과잉의 의미, 앞선 ‘의미’들과 단절된 그 자체의 생경한 장을 생성해 낸다. 


    팔 벌린 예수상을 든 미니어처 장난감 헬기의 움직임은 거대한 헬기소리와 절합되어 아이러니한 광경으로 이 잉여물로 시선을 모은다. 


    '모나드에서 네트워크로'



    일상에서 춤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닫힘에서 열어젖힘으로, 편집에서 방기(방기)로, 앞선 것들의 합산된 의미의 도출 대신 카니발로 나아간 무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곧 분절된 구문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지형은 곧 각각의 시공간의 모나드와 함께 분절된 테이크들이 연결된다거나 발전되어 결과를 만들게 되는, 차원을 여는 대신 각 모나드가 하나의 장으로 열어젖혀진, 실제적 만남에 의한 하나의 시공간으로의 무화된 광경이 앞선 모나드-테이크들을 (의미를 밝히거나 드러내지 않은 채) 봉합하는 것이다.


    이는 실잣기가 이룬 (네트워크 형국의 다름 아닌데) 또 다른 이름에, 곧 분절된(폐쇄된) 개인과 의미 없는(의미를 이루지 않는) 장면들이 하나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음의 ‘가능성’을 하나의 메시지로 도출하고자 한 것 아닐까.


    네트워크, 곧 개인은 없다.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구성하는)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총성이 정확히 가리키는 바다.


    이러한 모든 시공간의 표지와 ‘개인’을 지우는 ‘과도한’ 최후의 열어젖힘은 영화적 매체와 정반대의 프레임을 이루는 ‘헐벗은 주체’ 자체에서의 환영적이지 않은 실제적 연결‧접속을 가리키는데, 곧 집단이 항상 소수자의 자리가 일상의 자리를 물리치고, 들어서는 공간 중간의 ‘열어젖힘’에서 보여줬듯 집단은 정치적‧사회적‧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항상 이 네트워크는 정치적이고 수행적인 행위에 의거함을 의미하는 게 이 작품이 갖는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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