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리허설] 국립현대무용단 <개와 그림자>: '현실에의 다양한 표지들'
    REVIEW/Dance 2013. 6. 20. 09:55

    분류된 구획 안 유희


    ▲ 지난 5월 24일 국립현대무용단 <개와 그림자> 리허설 장면 (언론 리허설 관람은 6월 5일)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솜털 같은 흰 물체들을 층차를 둔 투명한 상자들의 합산이 무대 뒤쪽에 쌓여 있고, 무대 가를 두르고 있다. 색소폰 소리가 아련하게 한 더께 걸쳐 들어온다(참고로 리허설을 봤을 당시 음악은 완성되지 않았고 아직 준비 중에 있었다. 참고로 음악‧조명 등의 사용은 홍승엽 예술감독의 안무 이후 그에 맞춰 들어오는 게 통상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유영하듯 그 분위기에 침잠해 있고 그 안에서 논다. 누워서 헤엄치고 ‘각자의 내재적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무엇보다 유아적이고 현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듯 보인다.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집단의 형성


    이들의 ‘동류집단’으로의 형성은 ‘의미 없는 놀이’를 연출한다. 혓바닥을 입술에 가까이 대고 입술을 빠끔거리며 유희적으로 “쯔쯔쯔”거리며 유희적인 기표들을 만들기도 한다.


     이 의미 없는 기표의 개체들의 관계없는 집단의 형식은 “쉿”이라는 외부를 상정한, 또한 그들 간 관계를 맺는 듯한 분명한 의미의 표지들로 발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 사각형의 프레임을 벗어나 색소폰의 공허하고 노스탤지어를 일견 자극하는 음악이 뒤쪽에서 들려온다.


    현재의 재현



    종이를 문 여자, 그녀는 발을 떼지 않고, 주변의 남자들은 그녀의 몸을 좌우로 옮기는데, 종이에서 여자는 발을 떼지 않는다. 내면 자체가 외화된 형식의 이러한 ‘텅 빈 신체’, 말하지 않은 여자, 그리고 그것들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주체’의 모습을 띠지 못한 사람들의 비관계적 관계 맺음은 ‘현대’를 다루는 관용어법과도 같다. 


    앞을 보고 웃음 짓는 이미지들을 만드는데, 각자가 재현의 장면이 되며 과거를 내지는 보이지 않는 주체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의 양상이 ‘시선의 간극’을 형성한다. 이들은 착시적으로 ‘그들만의 현재’를 체현하며 사진 속 이미지라는 재현의 양태에 합치된다.


     외설의 형상


    이어 사각형으로 모인 가운데 동작들을 분절적으로 두며, 조금씩 가속화하며 시차적으로 리듬을 형성해 낸다. “야~후”라는 단말마 외침의 개체는 어떤 외설적 몸짓을 현현함인데, 주변의 존재들이 그를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곧 이 소리는 역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없으며, 그것을 온전히 관계의 양상으로 바꿔줄 이도 없다. 이것은 ‘순간의 집단’에 소구되지 않음으로써 외설이 된다. 동시에 그 신체마저도 이 소리(신체)는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동시에 그의 신체에 사람들은 테이프를 붙인다. 이는 입막음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의 표지’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림자 주체’의 나타남



    이미 외설의 사라짐 속에 치워진 무대는 순전히 ‘표현의 영역’으로 ‘빈 무대’를 채우고 사라진다. 좌에서 우로 집단으로 무대를 달려나가며 칸막이를 무대 중앙에 쳐 놓고 그 안에서 사라지고 나타난다. 


    해체와 축적을 통한 칸들로 구축한 ‘성’에서 이들은 다시 출현하고, ‘집단적 변전의 장’은 입체적으로 이동하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래서 그 의미는 단지 반복의 겹들을 쌓는 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 사라지는 데 있음을 향해 나간다.


     곧 알 수 없이 앞을 향한 여자와 그림자로서, 그녀 뒤를 바닥에 앉아 따라다니는 여자의 모습은 이 둘 자체가 앞선 그룹을 형상화하고, 실체로 부상하는 존재의 장에 다름 아니며, 동시에 이 ‘텅 빈 신체’와 ‘보이지 않는 그림자 주체’의 합산이 공허한 형국으로밖에 ‘현대인’을 표상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들은 그럼에도 곧 하나의 동일자적 움직임을 만드는데, 그러한 ‘관계 맺음’이 ‘형성될 수 없는 관계’는 그 공허함을 극대화해 드러내며 종국에는 공허한 신체-그림자 주체의 비관계적 관계의 양상으로 사라진다. 아무런 변전의 표지를 남기지 못한 채.


    사회적 자국


    이들은 관객 앞까지 칸막이를 길게 쳐 가깝게 위치하며, 그 앞에서 서 있다. 일정한 사운드와 동기화되어 ‘과시의 몸짓’을 동시에 취한다. 이러한 거리의 좁힘 이후에 멈춤의 표지들은 ‘떠돌이적 움직임’이 ‘상징적 제스처의 분명한 표지로 드러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홍승엽 안무가는 어떤 내재적인 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 채 상징적 기호로 어느새 바꾸며 이들을 익숙한 듯 먼 존재들로의 양상으로 구축한다. 


    가령 흰 벽 프레임에서 벗어나 ‘집단’을 형성하고 한 명이 그 앞에서 지휘하면 그 밖은 막 소리치며 ‘알 수 없는 말들의 사회’의 형상을 만든다.


      ‘장애물’에 대한 응전



    이들은 다시 그 칸막이를 뒤로 물리고 일종의 미로처럼 중첩된 칸막이에서 발(부분-신체)만 내보인다. 한 명이 ‘대표적으로’ 유려한 몸짓을 선보인다. 그리고 일정한 박자가 추임새 같은 장단으로 변전되는데,  ‘건조한 문법’은 움직임에 어떤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여 감상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은 너무 명확하다. 


    일종의 모더니즘의 규약에서 노는 것 같은 움직임은 ‘말할 수 없음의 비소통식 존재’에 대한 표지로 그 자체로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또는 이는 클리셰적 ‘쉬어가기’의 맥락이거나 ‘물렁한 무대’를 칼처럼 확고히 가르는 잉여적 구문일 수도 있다.


     현존 너머 잉여


    이 칸막이는 직접 개별자들의 안무 파트너로 변하게 되는데, 이 쓰러뜨림에서 무게 없는 안착, 모서리로 끌릴 때 철소리를 내며 ‘솜털 같은 부피’와 ‘날카로운 면’의 양면을 상정해 낸다.


     이 칸막이를 모두 쓰러뜨린 후 만든다. ‘막 춤’은 이국적 음악에 열린 장에서 이루는 카니발은 유희적인 표출이다. 이는 외부적 내용의 체현으로 순수한 현존에서 기능적인 표현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순간적으로 박자 체현하기는 시간의 ‘멈춤’과 ‘관계’의 얽힘을 상정한다. 공교롭게도 이 음악이 형성되지 않았음에도 (음악이 어떻게 움직임을 '바꿀지'는 알 수 었으나) 움직임의 멈춤과 절합되는 측면이 있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