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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비꽃프로젝트 <파인 땡큐 앤드 유>: '개인적 (비)주체 너머로'
    REVIEW/Theater 2013. 7. 12. 03:26


    ▲ 달비꽃프로젝트 <파인 땡큐 앤드 유> 포스터


    '묻지마'=의사소통체계의 단절


    <파인 땡큐 앤드 유>는 서울로 첫 상경하는 인물들의 삶을 드러낸다. 그리고 ‘서울’에 갖는 편견이 실제 서울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서울 사람으로서, 서울 사람 바깥으로 사유할 수 없던 지점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만든다. 


    ‘묻지마 범죄’에서 ‘묻지마’라는 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죄 이전에, 그 말의 기원에 균열을 일으킨 이후, 극은 전화상담원과 그녀를 수동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적 언사들, 무조건적으로 그 말을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그에 (비)대칭적으로 친절한 전화상담원의 모습을 상반적으로 선보인다. 여기서 전화상담원은 잉여 존재 같은, 자동응답기계의 모습이다.


    이는 그녀를 유능한 직원 승진의 기회로 이끄는 통과의례의 지점이고, 여기서 절망적인 발화의 통행로는 곧 물을 필요 없는, 의사의 전달을 확인할 필요 없는 비-소통의 과정으로 그 ‘묻지마’가 갖는 절망적인 의사소통체계의 문제점을 현상해 낸다.



    비가시적 주체들의 재현


    홀로 남겨진,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 ‘그림자 주체’ 곧 사회로부터의 비가시적인 인물들로, 이들은 삶의 제스처, 조건들을 나열한다. 한 명의 행동은 다른 이들과 같은 공간의 구획으로 묶여 어떤 조응 관계를 이룬다. 


    단순 코러스의 연주에서의 역할을 넘어 길거리에서 남자와 길고양이는 하나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이 인접성의 연결은 꿈에서 깨어난 남자와 앞선 자신 옆 고양이를 공격했던 남자는 고양이 입장을 대신해 비판할 때의 목소리로 비-주체가 된다.


    고양이-주체는 이 각자의 목소리들이 단자적으로 모이고, 모두는 한 명(씩)의 내밀한 고백, 그리고 속마음임을 드러낸다. 모든 사람(모나드)에 일종의 마이크와 잔상들을 주어 주는 것이다.


    이는 한편 배우 각자 먼저 이름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후 환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가운데 어떤 집합으로 경계 지우고 묶인다. 


    서울 도시의 문제와 그 언급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가,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극은 ‘묻지마’라는 죄의 측면이 아닌 도시라는 삶의 조건에 더 초점을 맞춘 게 사실이다. (극에서 배우는 재현과 현시의 두 측면에서 자리하는데) 그 가운데 배우는 일종의 사유하는 배우가 되며 스스로의 존재들에 현동화된다. 역할 이전 본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주민으로서


    어느새 이들은 재현의 경계에서 각종 현대인의 정신병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상자 들고 집을 구하러 다니기, 이는 일시적 노마드로서 철새 같은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이주민의 운명임을 드러낸다. 


    이 집들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집의 조건은 분명 가격 대비 (삶의) 질적 우위, 그리고 경제적 형편에 따른 삶에의 제한적 조건을 동시적으로 내재한다. 어둠 속 초를 킨 것 같이 은은하게 인물들을 드러내고 집은 벽에 그림자들을 동시에 현상시킨다. 이 그림자는 초라한 그들의 모습을 한껏 부각시키는 존재의 소유물이 된다. 


    이 그림자는 가장 길어졌을 때 내지는 빛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제일 커진다. 불쌍한 그가 폭력에의 적의를 잔뜩 드러낼 때 조금씩 밖으로 이동할 때 그 그림자는 가장 커진다. 불쌍하게 살아옴의 현실과 묻지마 범죄가 가리키는 각박한 사회 폭력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듯 보인다. 


    큰집과 작은 집으로 드러내며 빈부격차를 현상하고 또한 골목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어떤 가까운 집의 거리만큼이나 공동체로 존재하기인 동시에 그 은유적 구조가 곧 골목길로 순간 변용된다.


    현대사회를 은유하고 증거 하는 개인(의 목소리) 곧 추정할 수 없는 누군가는 어떤 특별한 육체로 튀어나오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의 집단으로 상정되는 가운데 무대를 여기저기 오간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종적 경계 (너머)


    어둠 속 빛 없는 집단의 우주, 어쩌면 수용소 같은 풍경, 잠꼬대를 통해 드러난 일상의 말들, 삶의 옥죔은 그렇게 ‘지속’되고 있었다. 이 ‘병든 육체’로 존재가 불거진 이후, 칼 꽂기 그리고 쓰러짐, 이 죽음과 죽임의 무화로의 변증법, 동시적 현전,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종적 경계, 곧 피해자·가해자 모두 없는, 누구도 주체가 되지 않는 의미 없는 허망함의 끝이 바로 묻지마 범죄임을 상기시킨다.


    작은 인형을 들고 허공에서의 걷기를 시도하고, 그것도 단체로 구원의 끈은 사라지고, 구원을 요청하는 남자, 곧 이 이 인형은 그이고, 혼자만의 의미지형을 이룬다. 


    동시에 이는 우리 자신을 확대해 놓은 또 축소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 동시적 풍경에 나는 고백하고, 나는 세상 한 가운데 혼자 남겨져 있다. 사실 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면 이 둘러싸임은 이미 존재하는 구원을 진정 가능케 하는 신의 존재를 체현한 것인가.  


    이 현재로 보이는 지점은 집단이 아닌 어떤 진리의 정서, 그리고 진보의 길을 가능케 한다. 다 모여 ‘라쿠카라차’를 부를 때 이들의 옷은 레인보우, 곧 무지개 색을 이룬다. 물론 이는 집단이 조화로움을 이루며, 각각 모두는 의미 있는 존재이자 타인과의 조화 속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생성됨을 의미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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