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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변방연극제 개막작] 연극 <숙자 이야기>: 모나드, 거리두기, 개입, 그리고 미래
    REVIEW/Theater 2013. 7. 7. 16:19


    ▲ 7월 03일(수) 오후 7시 30분,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숙자 이야기’[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재현 너머 현시의 자리에서


    화투로 점쳐보기, 혼잣말하기, 빈 무대에 각자의 자리를 점유한 할머니들에게는 이중의 자리가 부여된다. 이는 역할 너머 ‘존재 자체의 자리’로, 역사의 궤적이 체현되는 동시에 이들의 삶의 영토가 현시되는 순간이다. 또한 당연하게도 이는 연극이라는 프레임 속 재현되고 있음으로 드러난다. 반면 연기(演技)는 소통되지 않는 모나드들의 과잉으로 인해 연기(延期)되고 있다.   


    이들을 정치적 영역의 개체로 놓는 현실 정치에 의해 ‘권리-주체’이자 정치적 대상이 된다. 이후 이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는 두 여자의 돌발적인 비난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한 할머니는 눈물을 훔친다. 이는 악의적인 현실을 구체적·특정한 전거로 잡아내며, 이 현실의 과잉의 대리(대리)에 우리를 합치시키며 발생하는 트라우마라는 사건을 또한 자아내는 것이다.


    이는 그래서 단순한 재현이 아닌 타자를 현상하고 그에 대한 정동(affect)을 일으키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실제 현 순간에 미친다는 것으로, 극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며, 상처로부터 거리두기가 이 안에서는 적어도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할머니의 눈물은 그 비난이 수행적으로 작용하며 더 이상 연극이라는 장치라는 차원에 내재적으로 머물고 있지 않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상처에 대한 기억의 호출로까지 이어지는 재현과 현시의 현재적 장은 누구에게 또 무엇으로 가닿는가. 또 가닿기 위함인가.


    거리두기의 (불)가능성


    스스로로부터의 재현, 그 시간 안에 들어가기, 현재의 순간에 이르기, 죽은 이의 초상을 마주하기, 이 연기와 삶의 시차, 역사적 궤적 아래 과거와 현재의 시차, 개체와 대표의 시차는 삶과 연극의 균열 없는 꾀기에 다름 아니다. 


    이들 기지촌 할머니들의 참여로 이뤄진 이 연극은 그 자체로 꽤나 역설적인데 재현과 현시의 시차 사이에서 상처 받은 삶을 체현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재현재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연극이 단순한 치유와 역사를 상기시키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자리와 교차되는 지점을 수용한 채 이 연극에 대한 참여를 그 상처를 되뇌는 것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 상황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로부터 거리두기가 절대적으로는 불가능한 지점에서 이들을 배우로 내세운 연극이라는 장치를 거쳐 우리는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가 불가능함으로 삶을 또 연극을 수용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 그 자체를 보며, 또 그네들의 기억을 체현하며 삶을 수행적으로 선택함의 행위를 본다. 곧 역사(곧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다가서며 그에 다시 다가가는 존재들을 본다.


    어떻게 보면 이 역사는 이미 선취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이미 겪었던 고유의 자리를 재체험해야 한다. 그들은 왜 자신으로서 자신을 재현해야 하는가. 이는 왜 선택적으로 그들로부터 다시 끌어올려져야 하는 것인가.


    실제로 더 잔혹했다는 연출의 뒤늦은 해명과도 같은 말과 같이, 트라우마의 기억은 온전히 선택될 수 있는가. 재체험은 치유의 흐름에 합류될 수 있는가. 


    특정한 서사 짓기의 관철, 어떤 하나로 꾀는 연극의 시선 없이 이 연극이 진행되어 가는 그 힘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텅 빈 프레임에 가해진 계몽으로서 개입


    현재로까지의 도저한 과거의 궤적은 곧 이 연극은 그들이 보여주기라는 '최소한의 원칙'에 따른 편집의 지점이 된다. 할머니들은 스스로를 타자로 두기, 그리고 동시에 재체험하기, 한편 관객들은 스스로 그들의 삶으로 시선을 두며 자아를 벗어나기, 이러한 무대의 보여주기와 보기는 이러한 각자의 타자되기에 의해 의미 교환을 산출한다.


    곧 무대 자체는 의미를 열어젖히는 텅 빈 매체가 된다. 연출의 의도는 기지촌 할머니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에서 그 역사에 실제 개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연출은 투명한 매개자인 셈이다.


    역할 이전에 배우와 이 현실에 개입하는 공동체의 한 몫으로서 관객의 사이에 연출은 위치하며 전자에서 후자로의 매개, 그리고 이 현실을 중계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대안으로서의 선택 가능성을 열어 관객은 자신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며 이 연극을 적극 바꾸고자 하는 열의를 보이는데 이는 이 역사의 파국의 자리에서 개입하는 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서사극의 이화 작용과 함께 앞의 사실들을 일종의 헐거운 파편들로 바꾸며 현실 개혁의 역량을 연극 안에 가져오게 된다. 반면 이는 어떠한 사실도 바꿀 수 없다는 전언 아래 한 관객의 제안으로 미래로의 새로운 구상을 모두 꾀하게 되(며 도약하)는데, 실제 의원이 개입하여 회관 건립 역사의 지난 정부의 책임이 여전히 현 시점에서도 유효함을 법으로 기입하고, 실제적 효과들을 이후 산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노력할 것임을 다짐한다. 


    이로써 과거(지난 특정 세대에 해당하는 그것)·현재(몫 없는 자들의 수난사)·미래(사회적인 의제 차원의 성립)의 세 차원은 매우 상이하게 분절되어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간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냉대의 시선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여전히 아픔을 부둥켜안는 자리에서 연극은 그들 삶을 전유하고 (공공에) 표현하며 현실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곧 연극은 타자로서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다시 타자화하는 주체의 자리를 수여한 뒤 역사의 도저한 힘을 소거한 채 생기는 이들의 비주체의 자리(무기력한 주체)에서 현실의 자리로 곧 이전되어 이들과 관객은 하나의 현실을 이룬다.


    이 가상의 정치 영역의 공유는 부정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의 기억 체험을 하나의 최소한의 조건으로 두며 출발한다는 점에서 어쨌거나 역사는 다시 손쉽게 흘러갔고, 우리는 이 바깥에서 너무 쉬운 긍정의 미래만을 얻은 것은 아닐까 앞선 정치인의 긍정적 미래 공약은 순수함의 차원을 떠나 이들이 역사적 개체의 자리에서 정치적 영역의 몫을 선취함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간다는 얕은 성취, 은폐된 해결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숙자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가까워졌는가.


    개입의 자리는 역사의 훼손과 불가능의 가용 능력을 선취하는 데 있기보다 타자의 삶이 체현되는 자리에서 개입이라는 계몽이 아니라 그것을 그것대로 인정하고 놔두는 것, 하지만 그 불가능성의 아픔에 최소한도로 개입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숙자는 바꿀 수 있는 현실에 무기력하게 자리했던 것인가. 우리는 역사라는 타자를 훼손하며 현재를 수용하고 새롭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가. 


    관객들의 개입과 참여는 일막의 슬픔을 이막의 웃음으로 치환하며 생기발랄한 장을 형성했지만, 곧 수행적 효과들을 불러일으켰지만(수행성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의 것은 아니다), 이것이 숙자라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불특정한 다수의 삶을 하나의 개체로 합산 및 대표화해 표현한 그 가상의 현재의 자리에 우리는 가까워졌는가. 아님 가까워졌다고 믿는 것일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할머니들의 연극이라는 참여는 '모나드'로서 소통되지 않는 개체의 장의 막을 열어젖히는 효과를 창출했다고 한다. 곧 실재적인 것으로서 수행적인 것은 어떤 공동체 연극이라는 형태 안에서 이들이 각자의 숙자가 아닌 공통의 숙자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에 열리는 치유의 가능성을 인지하며 이 연극에서의 숙자 -되기, 동시에 그 숙자로부터 혼자만의 모든 책임을 떠안지 않게 되는, 곧 숙자라는 타자를 만들기를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들의 이들 내에서의, 풍부한 의미 산출은 또한 현재의 것으로,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것이 또한 이 연극의 (거리두기를 통한) 의미와 (부정할 수 없는) 진정성의 사이에서 이 간극을 매듭짓는 대신, 그것을 바라보고 또한 이중의 비판과 긍정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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