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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은진 <신체하는 안무>, ‘끊임없이 말-움직임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들’
    REVIEW/Dance 2014. 2. 28. 14:29


    ▲ 최은진 <신체하는 안무> 포스터


     우선, 공연의 각기 다른 무대를 선보인 세 무용수를 표피적으로 구성해 본다면, 첫 번째 무용수 윤상은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자폐적인(autistique) 모습을 보인다면, 두 번째 위성희는 조금 더 관객에게 말이 움직임으로 전환되는 측면에 대한 설명이 표면적이다. 그러니까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어 말과 움직임을 혼란스럽게 처리하는 것 모두를 하나의 연기 과정처럼 원활하게 선보이는 능수능란한 연기자(actor)의 모습으로, 곧 스스로를 드러내는 특별한 전개, 동시에 중계의 과정을 펼쳐내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최은진은 관객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에 그 드러냄의 벽에 스스로 부딪친, 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모습, 동시에 무언가를 계속 말해야 하는 거의 강박 자체를 다시 말에 담아 두고 있었다. 


     자폐, 연기자, 소경의 이 각기 다른 세 단계는 이 말과 움직임의 동시적, 시차적 진행이 매우 다양한 레이어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나 자체의 펼침’이라는 나와 관객 사이에 2단의 레이어를 둔 경우는 최은진 자신에 가장 해당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역시 두 번째다. 사실 이번 공연은 관객에게 많은 웃음을 주기도 했는데, 표피적으로는 코미디 프로그램인 ‘마빡이’(사실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말과 움직임이 동시에 수행적이며 어쩌면 현재의 렉처 퍼포먼스를 진정하게 선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는 말과 움직임이 동시적으로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측면에서, 어쨌든 극의 어떤 형태에 집착하지 않고, 그 과정 자체를 보여주며 어떤 남김없이 그리고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 길을 알 수 없다. 이는 어떤 강도(intensité)적 흐름이다. 동시에 산재된 것들의 분절적인 펼쳐짐이기도 할 것이다. 


     무용은 가령 관객 앞에 움직임을 비롯한 무언가를 공간에 펼쳐놓는 것이며, 관객은 그 펼쳐지는 무언가를 보는 공간에 있기에 가능해진다. 흔히 이러한 설명은 관객을 ‘타자’로 전제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이는 다시 ‘관객이 있어야 공연이 성립한다’는 명제를 현상학적으로 풀이한 것에 다름 아니다.

     반면 최은진은 ‘관객과 나 사이에 공간이 있다’라는 하나의 레이어를 더 가져가는데, 그 공간은 관객과 내(최은진)가 공유하기보다는, 관객 앞에 무언가를 펼치는 ‘나’를 어떤 과정상의 측면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 최은진은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고, 더 정확히는 말을 통해 움직이며, 움직이기 위해 말을 하고,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하며, 또한 그 설명을 해소하기 위해 말을 한다. 


     ‘나’는 어쨌거나 끊임없이 말을 함으로써 기실 멈출 수 없는 사유의 과정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몸은 그 사유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일견 드러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말은 생성되고 움직임은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또는 연장하기 위해, 실은 또 다른 말이 되기 위해 존재하며, 다시 그 움직임을 따라 말은 그것을 지정하고, 설명하며, 어떤 흘러감을 붙잡을 수 없는 긴박함 속에 드러나는 잉여의 차원이 된다. 동시에 그 잉여로 인해 이 현재를 또 다른 것이 채워져야 할 ‘공백’의 것으로 두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움직임 같은 말’과 ‘말의 연장(延長) 같은 움직임’으로부터 어떤 것도 명확히 채워지거나 분명하게 남거나 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구성의 안무도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다시 어떤 구성의 안무가 짜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생성되는 어떤 순간들의 지점이 끊임없이 연장되며, 다만 멈출 수 없는(=작동하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멈춰질 수 있는 순간, 무엇보다 곧 그 멈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 ‘자의적인 순간들’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것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곧 이 자의적인 순간들이 안무의 어떤 ‘이미지’이다. 


     사실 말이 상징계(의 영역)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 말은 움직임에 대한 어떤 강박을 징후적으로 재현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신체에 부착될 것이고 동시에 공간을 여는 차원에서 신체와 공간 사이에 어떤 ‘곧(!)’이라는 실현 가능성의 ‘여지’를 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여지는 곧, 마치 매우 순간적인 끌개(attractor)로서 나를 움직이게 하며, 보지 않더라도 감각되고 있는 관객을 눈앞에 두고, 신체와 밀착된 공간이자 신체를 연장시키는 말로부터 움직임은 시차(시간)를 벌이며 그 둘의 겹의 공간이 곧 ‘신체하는 안무’다. 말과 움직임의 시차, 몸과 말 사이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임의 순간적인 지점‘들’이 곧 그러하다. 

     몸은 ‘잉여적인(en trop)’ 것으로 존재하기보다, 오히려 말이라는 멈추지 않는 것으로부터 잉여가 몸에 주어지며, 더 정확히는 말과 몸 사이의 시차를 통한 움직임이 잉여로서 출현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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