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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핑 톰 무용단 <반덴브란덴가 32번지>: '던져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특이한 일상들'
    REVIEW/Dance 2013. 11. 7. 09:57


    ▲ 피핑 톰 무용단 <반덴브란덴가 32번지>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구체적인 지명의 제목으로부터 출발하는 벨기에 ‘피핑 톰(Peeping Tom)’ 무용단의 <반덴브란덴가 32번지>는 산 중턱 눈보라가 간헐적으로 몰아치는 곳에 트레일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낯설게 등장시킨다. 황량한 환경 속에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 트레일러를 오가며 또한 트레일러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양태-그에 대한 시선은 객관적이며-는 구체적인 일상의 흐름 속에 파편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이는 그 단절적인 일상과 동시에 공간들의 불연속적 엮어짐의 이행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객관적인 시선이 갖는 하나의 의도적인 효과로 설명된다.


    이는 존재들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그들을 절대적인 환경 아래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낮과 밤이라는 ‘자연의 눈 깜빡임’, 세계의 두께를 바꾸는 눈, 그들이 앞을 보며 순간 두려움을 느끼는 거대한 미지의 지평의 출현에서 이들은 이 상황을 충분히 점유·통제할 수 없는 타자들로 변하게 된다.


     이 추운 벌판에 임시 거처로써 일상의 안락함을 체현하던 이들의 삶은 그럼에도 불안정한 환경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안정과 불안정의 의미는 상호 교차하며 서로를 지시하고 그 의미를 생성해 낸다.



     이는 다시 불안정한 단단함이라는 일종의 모나드(단자)로서 집들, 또 그것이 지시하는 존재들이 단절된/안락한 그들의 집이라는 전도된 의미의 이중적 공간, 그리고 나약함을 현존으로 바꾸는 바깥과 그로부터 출현하는, 이동을 매개로 하는 섞임이 더해져 관계들의 양상은 복잡해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단절된’ ‘바깥으로서의 안’이라는 집으로 환원되며, 분절되는 이야기들로 드러나게 된다.


     집 안을 볼 때 시야가 제한되며 소리 역시 차단되게 된다. 그럼에도 들여다볼 수밖에 없으며 의미의 제한을 겪게 된다. 그 속에는 의미를 특별히 산출하지 않는 일상의 평이한 재현과 그 일상 자체에 대한 은유, 그리고 소통되지 않는 저마다의 삶의 양식의 산출이 있다.


     이 소통되지 않음, 단락되는 관계의 진실은 작품 내재적이며 무대와 관객의 관계에도 해당하며 이들을 타자로 그리되 곧 우리의 삶을 (타자로서) 낯설게 바라보는 것에도 연관된다.



     춤은 이 비좁은 공간보다는 오히려 훤히 드러난 바깥으로부터 출현한다. 하지만 이 일상의 흐름 안에 춤은 춤 자체의 독자적 미감으로 소급되기보다 이 환경을 직접적으로 품고 일어난다. 시야를 일정 정도 제한하며 이 환경 전체를 뒤덮는 눈과 그 추위로부터 온 몸을 둘러싼 옷들은 모두 춤을 제한하는 매체-환경의 조건이 된다.


     그 속에 현존의 몸은 침묵으로부터 침묵에 감싸이며 고독을 녹이며 마치 우발적으로 (재)출현한다. 곧 춤은 일상으로부터 닫힌 공간 밖에서 그것을 이화시키며 내지는 생기를 안고 출현하며 고독한 접촉에 집중하며 이화된다.


     이 환경이 감싸는 몸 그리고 춤은 제한적임을 넘어 환경을 체현하는 서사의 그것으로 기능하는데, 이 바깥은 일시적으로 모두가 눈 속을 뒹굴며 벌이는 축제의 한 풍광으로, 동심의 설렘 자체에 다가서기도 하며 임신한 여자와의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 총을 겨누는 사태의 오직 비-춤의 일상 자체를 비추는 무대 자체로 들어날 때도 있지만, 이 몸(들) 자체가 단독적으로 서는 광경에서 어떤 춤에 가까운 것들이 발생한다.


     예외적으로 (사진이 가리키는) 마법적 순간의 이미지들은 놀라움을 주며 춤에 근접하고자 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일상에서 툭 튀어 나오며 다시 그것에 혼합되는 어떤 특별하지 않은 순간의 맥락으로, 동시에 불가해한 이들의 일상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안과 밖의 교차적인 관계를 반영하며, 거대한 환경의 일부로 속한 몸으로 드러나는 춤은 춤 자체라기보다 앞선 눈 속을 뒹구는 장면들처럼 축제적 순간 자체를 몸으로 체현하는 식이거나 대체적으로는 ‘춤에 근접 조우하는 몸’에 가깝다.


     몸은 그 몸을 낯설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더듬거리며 분절되고, 그 단속적이고 분절적인 리듬 아래 이화된다. 곧 몸은 또 다른 몸을 체현한다. 내지는 몸은 경계들을 그리며 나아간다.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의 허리를 뒤로 확 젖히고 하반신을 밀착한, 고착된 포즈는, 이어 여자가 뒤로 젖혀 두 다리를 잡은 고정된 몸과 이를 사물처럼 들어 허공에서 계속 옮기는 모습은 탄트라적 몸 자체를 드러내며 (영원의) 순간을 빚고 일상의 변함없는 시간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 시간성은 곧 이들의 몸부림과 고독에도 실상 단단하게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환경 자체의 절대성, 그것의 거대함 그리고 또 무표정한 정서를 순간적으로 보여 주는 것과 같다. 고착된 몸으로부터 시간성과 고독의 정서를 체현하는 것이다.


     거대한 환경의 경계가 출현시키는 불가해한 삶과 관계들에 대한, 모나드-집 안의 제한적 시야의 객관적 시선에 자연의 단속적 리듬이 더해지며 조각 난 삶과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며 각자의 삶으로 환원되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마법적 이미지, 그리고 낯선 몸으로서 출현하는 춤/몸으로서. 



    춤에 근접 조우하는 몸은 이 낯선 타자의 자연 환경 안에서 그 환경으로부터 도약하려는, 오직 해소할 수 없는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몸부림의 처절한 정서의 해소가 아닌, 유일한 구원의 순간일 수 있다. 반면 그 몸은 미약하며 어떤 파편 그 자체로 환원된다. 


    이 연극(실제)과 같은 장면들의 불이행적 연속은 하나의 경계 장치로서 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숭고함의 자연 안에 안전/안정과는 거리가 있는 삶의 방식들을 세우며 풀 수 없는 몸 자체에 몰입하다 그것으로부터 어느새 멀어진다. 더듬거리는 몸을 전면에 내세우며 다시 그것을 거둬들이며 일상에 침잠하는 작품은 실상 출구 없는 일상을 무대 자체로 바꾸며 불완전한 ‘완성’을 온전함 너머의 완전함을 꾀한다.


     어떠한 것도 가능한 꾀기의 방식은 단편적인 리듬 아래 자연과 일상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체현하는 한편 많은 것들을 그 자체로 드러내며 거두는데, 이 안에서 몸은 낯설게 동시에 차이의 반복을 낳으며 안무적 실존으로 거듭나는 데는 다소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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