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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오병잉 페스티벌': 잉여로부터 추출한 가능성들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3. 5. 14:49


    ▲ 아오병잉 페스티벌 포스터


     왜 ‘아오병잉’인가, ‘아시아-오프-병맛-잉여’의 줄임말은, 웅얼거리며 차마 언어가 되지 않는 유아어 같고 의미를 형성하지 않는 잉여의 네 음절로 느껴진다. 한편, 페스티벌 기념품인 세 가지 버튼 묶음에는 ‘잉’의 자리에는 ‘인’‧‘신’‧‘잉’이 각각 들어가는데 의미는 한층 더 불명료해진다(도대체 이는 무엇의 줄임인가. 세로읽기를 통해 한데 묶어도, 의미는 형성되지 않는다).


     프로그램을 따르자면, 아오병잉에서 ‘아시아’는 참가단체의 국적을 아우르는 영역의 범주이자 그것을 한정하는 개념이라면, ‘오-병-잉’은 다원예술의 새로운 정의로 전유되고 있다. 여기서 아시아는 대안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거나 아시아 자체의 고유성을 내세우거나 또는 아시아의 오-병-잉을 지향함을 의미하는 대신, 지금 여기(한국)으로부터의 지정학적 위치를 반영하는 것에 가깝다.


     사실상 이는 일본의 한 단편 영상이 들어간 것과 <까쉬딴까>의 연출을 맡은 문올가의 국적이 카자흐스탄이라는 예외적 사례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어떤 과장은 아닌데, 다음 페스티벌에서 역시 현 지정학적 위치를 반영한 가까운 이웃 국가들의 해외 교류를 통한 아시아라는 영역의 확장 가능성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음의 어떤 미약한 기약으로 읽히는 측면도 있다.


     결과적으로 다원예술의 한자어를, 비록 줄임말로 출발했지만 분절된 음절의 뜻 모를 조합으로 환원시키는 가운데 과장하지 않은, 아니 배제하지 않은 아시아라는 소중한 개념을 성립시키고 있고 거창하지 않은 불분명한 기표의 웅얼거림을 통해 기존의 다원예술의 함의를 벗어나 더듬거리는 영혼과 육체 자체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결국 어떤 잉여이며 기존의 잣대에서 잘 정의되지 않음의 속성을 지닌다. 이는 기존의 장의 기괴한 거울상을 그리는 한편 그 바깥으로 탈출하기보다 그 안에 머문다. 


     이로써 어떤 기존의 가치나 의미 추구가 아닌 ‘잉여’로 규정되(고 마)는 그 나머지의 것의 존재가치 자체를 내세움과 동시에 또 다른 의미나 가치 기준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이 축제를 이루는 공간과도 긴밀히 상응한다. 장소가 좁은 탓도 있었겠지만 검은 천으로 친 어둡고 그러나 아늑하며 편안한 공간은 어떤 모성의 공간, 엄마 뱃속 같은 집으로 회귀하는 인상을 준다. 이곳은 바깥과 차단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바깥을 비판하기보다 그저 어떤 자기들만의 영역에서 현실 자체를 잊는 어떤 상상계적 공간에서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공간은 다시 아오병잉의 유아어적 웅얼거림, ‘잉여’로서 무지향적 지향과 맞물려 현실 탈각적, 그러나 현실의 의미화되지 않는 무의미적 의미를 지향하는, 어떤 신체로 확장되는 신체 공간이라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문화역284를 문화역서울과 문화체육관광부를 절합한 ‘문화역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온 축사를 구성함은 패러디이면서 사실 (자신들만의) 상상계적 영역을 실현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남지우의 렉처 퍼포먼스 <지우스 클로젯>은 남지우 자신의 삶을 보여(들려)주는 일종의 강연이되 중간에 채팅 장치로 제동을 걸고, (어떤 관객의 의식을 상정한) 하나의 시선을 개진시키며 동적 요소의 어떤 실시간적 무대의 긴박성을 띤다.


     IBM 노트북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일견 효율성과 유행을 좇는 시대에서는 무용하게 보일 수 있지만 ‘빠르게 사라지는 역사’, 불필요한 역사, 잊히는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그 완고한 시간을, 정당하고도 더딘 시간 그 궤적을 소환해 현재의 시간에 두께를 입힌다. 이는 역사와 개인사가 맞물리며, 또한 사물로 바라본 역사가 겹쳐지는 하나의 동시대적인 역사 서술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이는 유행의 기류에 따른, 제품의 내구성을 담보하는 디자인의 퇴보‧몰락에 관한 메타 비평의 성격도 띤다.


     사실상 채팅창의 진행은 일반 관객을 대표하는 상징적 시선이었으므로 그 질문들 역시 꽤 투박했고, 또 여러 면에서 매끄럽지 않았지만 시간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그래서 이것이 강연자의 긴 인생에 자의든 타의든 투신할 수 있는 시간의 무덤 대신 끝날 것이라는 측면에서의 어떤 긴박함을 표면적으로는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영상들 대부분이 다 재미있었다. <잔반처리>는 음식의 시뮬라르크를 잔반으로 만드는 미학적 조작‧제작 과정을 가속 화면으로 담아냈는데, 마지막에 다시 식판을 배출하러 가며 그것이 음식 쓰레기가 될 순간에서 멈춘다. 이는 예술이 쓰레기가 되는 지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음식의 시뮬라르크로서 주방에서 일하는 분이 보고 나서 어떤 순간의 망설임과도 같은 생각과 행동의 지점이 일어났으리라는 어떤 막연한 기대‧예측으로부터 다시 이 기예와도 같은 작업이 단지 그 기예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또 그 기예로서 외부에서 결코 작동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판단 유예의 상태를 만드는 데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예술은 사기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사기이며 다시 그 사기는 기예의 숙련도 측면에서 판단되는 어떤 전도된 예술 내외부에서의 관찰자적 시선을 체현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을 만나는 아니 현실의 예술과 관련 없는 이와 만나는 불안한 선고의 순간을 기다리는 유령적 카메라의 시선에서 어떤 영원과 만나게 한다. 다른 여타의 작품들 역시 재미있었지만 이 작품이 시각적으로 정교하며 또 기억에 특히 남는 바다.


     마지막으로 본 개막작이자 폐막작인 <까쉬딴까>는 동물의 세계에서 바라본 인간의 세계라는 점에서 우화에 가까운데, 그의 새로운 주인은 서커스의 재주 부리는 동물로 그를 훈련시키는 데 있어 어떤 폭력적인 제스처를 드러내기보다 그도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점으로 표상되며 까쉬딴까가 볼 수 없는 외로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모두가 선한 가운데, 인물들의 불가항력적 사회와 환경에 끌려 삶이 좌초하고 또 변화하는 국면이 부각되며 시종일관 통통 튀는 까쉬딴까의 리듬을 대비시켜 오히려 어떤 애잔함을 깊숙이 배이게끔 한다.

     이 ‘작품의 밀도가 높다’함은 작품의 서사 구조나 역할에 대한 몰입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각기 다른 역할의 실제적 쇼가 벌어지는 어떤 과도함 자체와 그 과장됨이 주는 숨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의 은유 그 자체였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일 것이다.


     많은 작품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아오병잉은 기금을 받지 않고 무작정 결연하게 진행한 자가 확장‧교류적 판이었다는 점에서 어떤 하나의 무모하고도 찬연한 시도였고 그래서 지속성을 담보하는 페스티벌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보다는 가능성과 그 만큼의 미약함을 갖는 또 그 만큼의 뿌듯함과 아쉬움을 간직한, 그 성공을 어느 장단이나 평가로 측정할 수 없는 비객관성의 주관적인 장일 수밖에 없으며, 앞서 언급한 상상계적 장의 모습은 어떻게 현실의 장을 찢고 그것의 의제를 품고 새로운 장으로 등록할지에 달려 있다고 해야 하겠다. 그 감춰진 잉여의 가능성 자체의 풍부함을 보여준 첫 해(?)였다면 이제는 판을 바깥으로 응당 넓힐 차례가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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