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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쓰-플레이'전 리뷰: '어떤 어긋나는 지점'들에 대한 찬동들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4. 3. 13. 19:41


    ▲ 장현준_ 나는 협소한 창문으로 출입하라 _퍼포먼스_2014_전시전경


     2013 아르코 신진기획자 인턴십 프로그램 성과보고전 '미쓰-플레이'전(1 24 - 2 28기획 의도에 따르면, ‘미쓰-플레이’라는 제목은 “오해·오독을 의미하는 miscommunication과 놀이를 뜻하는 play의 합성어로 오차 발생을 통한 창의적인 움직임을 발견하고자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는 놀이라는 행위에 방점이 찍히는데, 또는 그 과정 자체를 수반하고 있는 작품의 가능성을 노정한다.


     장현준의 <나는 협소한 창문으로 출입하라>에서, 관객은 전시장의 사물을 본다기보다 노트북 화상 채팅을 통해 장현준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일견 그가 지령을 준 동작들을 따라 하는 시간은 ‘존재론적 닮음’을 추구하는 모방하기에 가까운 듯하지만, 어느 순간 이는 안무자의 즉각적인 안무 타입의 하나를 따라 하는 것을 떠나, 자기 복제, 자가 모방으로 넘어가는데, 이미 안무는 몸에 익어 있고, 그것을 상기함으로써 보지 않고 안무를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훈육을 거치는 짧은 순간의 앞에 놓인 스승은 일종의 거울 단계의 분리된 타자처럼 마치 나를 복제하는 듯하다. 또한 나를 자그맣게 보여주는 채팅 창은 진정 나의 거울로 작용하는데, 이는 따라하고 있음에서 나아가 하고 있음 자체를 자각하게 하며, 나를 점검하게 만든다. 분할된 창을 통해, 또 익은 안무를 통해, 각자의 모나드를 실천하며, 따라 하기의 규칙은 무화된 시간 속에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일종의 따라 하기의 따라 하기는 시차를 두고 변이 과정을 겪는다기보다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분할된 화면 속에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체험에 가까웠다. 

     이는 한편으로 내가 장현준을 따라 하고, 장현준이 따라 한 나를 따라 하며, 그것을 보고 다시 따라 하는 식의 과정은 유사가 아닌, 원본과 복제의 서열이 사실상 없는 상사(相似)의 단계로 건너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일종의 증여로서 던져진 안무가 나를 통과해 그에게 가며, 다시 그에게서 나로 돌아오는 일련의 축적의 교환이기도 했다. 이 뒤섞임 속에 끊임없는 차이(와 생성)는 이 안무의 교환 과정의 목적인 것처럼 인도되고 있었지만, 실은 나의 것이 생기고, 또 전달되는 신체적 경험의 밀도 자체에 그 초점이 있었다. 이 안무를 다시 어느 때고 해볼 수 있다고 장현준이 끝에 말하는 것은 이미 증여된 안무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인 동시에 이것이 결코 같은 것으로 구현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장현준과의 채팅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이것을 다시 수행했을 때, <와의와의과의과 같이>의 전 작품의 세 사람의 따라 하기를 재현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실제 이것을 해 봤을 때는 봤을 때와 그 느낌이 다른 점이 있었다. 어떤 희화적 재현으로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 ‘앞의 사람을 따라 하는 뒤의 사람을 따라 하는 또 다른 뒤의 사람을 따라 하는 처음 앞의 사람’이라는 우보로보스 뱀의 원환적 이미지는 실은 수많은 정보 교환의 오차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가령 내가 앞 사람을 따라 했을 때 뒤의 사람이 시차를 두고 나를 따라 하게 되겠지만, 나는 결국 어느 순간 나로부터 파생된 움직임을 다시 따라 하게 됨을 인지하게 되고, 이상하게 전유된 내 움직임을 다시 따라 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도착하는 뒤의 사람의 움직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곧 나는 앞서가지만, 또한 뒤처지며 어디를 봐야 할지 순간 착각하게 된다. 곧 앞선 사람의 동작은 나를 아닌 내 뒤 사람을 고려한 채 이뤄지고, 이를 만드는 것은 또 나이기 때문이다. 이 더디게 돌아오는 그러나 채 동작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앞의 사람을 따라) 방금까지의 동작을 완성할 것인지, 또 (뒤의 사람을 고려해) 새롭게 뭔가를 할지(새로운 정보를 선사할지)에 대해 우물쭈물하게 되고, 이(지난 정보와 현재 정보의 중첩과 미끄러짐)는 두 옆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되는데, 이런 시차적 동조는 실은 계속 실패에 이르게 된다. 곧 이는 연속되기보다 중단된다. 이질적이고도 시차적인 절합을 통해 온전히 매개되지 않는 노드들로서 각자는 기능한다. 이는 우보로보스 뱀이 아니라 하나의 신체에 두 머리를 가진 (방황하고 실패하는) 존재들의 시차적/분절적 엮임에 가깝다. 


    ▲ KKHH_여지가 있는 대화


     KKHH(강지윤+장근희)는 한시적인 균형을 이야기한다. 합판, 사무용품과 혼합 재료, 여러 가지 사물로 균형을 맞춰 설치한 이것은 <여지가 있는 대화>는 미완성의 완성이기도 하다. 곧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이뤄진 한시적인 균형점들로서 기능하는 사물들은 완성은 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완전함을 지닌 완성은 아니다. 매끄러운 유기체로 기능하지 않는 이 전시는 단지 완전함의 가치를 지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바뀔 수 있었으며, 설계도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쌓기의 두 창작자의 교환적 과정을 거쳐 합의된 것이다. 이를 통해 결과가 아닌 과정의 시간적 서사를 따라 사물들은 (해체되며) 인계되고, 이 전체는 일시적인 완성의 영원한 순간을 지정한다. 

     실제 두 작가는 “각각의 다른 날 전시장에 나와 번갈아 가며 설치를 하게 되고, 전날 작업한 A는 다음 날 릴레이식으로 설치를 진행할 B에게 설치과정에서 느꼈던 보완할 점들을 ‘메모’로 전달하며 진행되었다.”고 한다. 곧 소통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일방적인 전달에 가까운 이 단절된 창작은 그럼에도 자신의 지지난 창작(상대방의 메모를 받은 이후 자신의 메모를 건네주기 이전까지의 시점에서 일어난 창작)의 영향 안에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어떤 과정으로서의 부분들은 선택과 긴장의 의식을 지시하며, 매끄러운 표면이 될 수 없는 탓에, 이 작품은 때로 오르내림의 시선을 통해 그 의미(과정)을 궁구해 나가게 된다.


     이 하나의 전시를 주(主)로 하고, 벽에 나타나는 영상 둘은 이 전시 자체를 설명하고 지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규칙의 의미를 일으키는 수행으로서 명사들이 지나가는 우측 화면 옆에 각자의 물 컵을 가진 5명의 참여자가 임의의 물 컵에 물을 따르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그러다 종국에는 일정한 양으로 맞춰지는 <균등한 양으로 맺어진 합의>의 영상에서는 합의의 실천이 무언중에 일어나게 된다. 이는 일견 시징맨(첸 샤오시옹, 김홍석, 오자와 츠요)이 2012광주비엔날레 라운드테이블에서 선보였던 물 컵의 균형 맞추기 게임과 유사하지만, 그 게임이 주는 긴장과 위트는 사라지고, 어떤 의욕 없이 관성적으로 행해지는 합의에 대한 규칙 자체를 어정쩡하게 지시·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 강문식_전시전경


     강문식의 <○○○>에서 제목은 ‘○’ 자체가 세 개의 전시 작품에 대한 각각의 환유로, 어떤 의미를 담지 않는다. “인미공 간판은 건물 반대편에서 보면 완전한 구가 아니라 잘려진 반쪽짜리 부분만 보이는”(인사미술공간) 지점은 강문식에게 있어 ‘미스-플레이’ 자체의 규칙을 낳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인사미술공간 간판의 뒷면에 초록색 원이 반쯤 자리하게 되고, 이는 언뜻 눈에 띄지 않는다. 한편 전시의 브로슈어를 초록색 원을 중심에 둬 완성하고, 이와 유사한 형태의 패널을 그 브로슈어를 쌓아놓은 무더기 위에 ‘물신’처럼 올려놓고, 전시한다. 마지막으로 스포트라이트 조명 몇 개를 전시장에 투박하게 떨어뜨려 놓는 한편, 그 중 하나는 전시장의 기둥을 거쳐 반쯤 잘라져 반은 기둥에 머물고, 반은 그것을 넘어 확대된 크기로 이지러진 원을 이루는 변형의 지점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초록과 붉음의 스포트라이트는 돌아가는 미러볼을 거쳐 벽에 무늬를 만든다. 이는 하나의 벽에 나타난 영상이 된다. 

     강문식의 전시는 애초의 ‘디자인’ 자체로 전시장에 떨어뜨려지고,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공간과 절합한다. 곧 ‘○○○’의 입체적·색조적 재현으로서 브로슈어가 자리하고, 이 브로슈어는 그 자체로 작품으로 전시되는 한편, 이 원은 조명을 거쳐 공간에 퍼져 나가며 공간의 일부가 된다. 이 투박한 디자인은 2차원의 (브로슈어) 디자인을 3차원으로 변환할 때 떨어지는 해상도나 입체감 같은 것을 숨기지 못한다. 

     이들, 특히 스포트라이트들은 하나로 묶이지 않으며, 이 공간에 부분마다 달리 자리해 공간의 경험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장현준이 움직임의 인계를 통한 상호 간 모방(과 생성)을, KKHH는 잠정적 합의가 작품의 완성을 보여주기보다 구성하는 규칙(과 그 과정)을 드러내며 일시적인 균형점(으로서 완성)을 제시한다면, 강문식은 디자인이 그 자체로 투박하게 전시될 때, 또 매체의 인계를 얻어 변환되며 드러나는 디자인-전시의 이상한 영역 그리고 (예술가로 자리하려는 어떤 의지가 없는, 단지 모종의 규칙을 실천하는) 디자이너의 정체성 자체를 드러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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