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경옥무용단 <심청> : 눈-우주의 알레고리, 그리고 미디어를 매개하는 몸
    REVIEW/Dance 2014. 12. 29. 10:48




    ▲ 이경옥무용단 <심청>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하 상동)


    <심청>은 와이어를 통해 허공에 매달려 공중 회전하는 ‘심청’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굴절된 빛으로 편재된 물의 입체적 폭과 부피를 무용수-퍼포머를 둘러싼 거울들을 통해 무대로부터 그 바깥으로 전달한다. 곧 퍼포머(와 그에 맞춘 거울)의 높이는 폭과 부피감을 도출하는 혹은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거울의 둘러쌈과 쪼개짐은 바다 공양을 거울(빛-) 제의의 상징성을 드러내거나, 또는 바다 속에 침잠해 들어가며 고요하게 일으키는 물결의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 바다 속의 신비함이 관객 너머까지 전달됐다면, 곧 일종의 수족관의 생생함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면, 이어지는 검은 땅위의 죽음의 제의와 그 잔영들이 만든 스크린, 그리고 우주의 광대한 은하와 성단의 집적 이미지-스크린과 겹 이미지를 이루는 붉은 눈동자로 곧 우주로서의 눈동자는 심봉사와 대구를 이루고 극의 알레고리의 상징적 도상화이자 실재적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게 된다. 



    바다에서 어둠과 광활한 우주로의 도약-어쩌면 비약-은 수직 상승돼 표현된 바다의 환상성에서 그 고삐를 늦추지 않고 보이지 않음과 죽음 이미지의 잠재된 이야기의 차원으로 그러니까 ‘더 깊이 더 멀리’라는 어떤 모토로 치환·연계하여 나아간다. 그리고 그 눈-우주의 잔상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허공에 뜬 심봉사다. 


    테크놀로지의 SF적 상상으로부터 이미지에 대비된 시원성(始原性)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근대적 사고의 이상향적 사고와 밀접하며 <심청> 역시 그렇게 재매개된 이미지-사물의 어떤 부산물이다. 심봉사가 환상성과 눈이 없음이란 신체의 실재를 매개하며 어둠을 그 자체로 대면하는 실재에 이르는 알레고리가 됐다면, 다시 암흑의 땅에서의 움직임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견고한 움직임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그 반향이 잔영으로 무대 위 막에 어른거림으로의 흐릿한 이미지로 치환될 때 비로소 완성됐다. 곧 몸/움직임은 미디어의 매개가 되는 것이다. 


    어떤 매개의 단계는 (전자의 경우 ‘이것은 춤이다!’) 실재의 필요성에 또는 (후자의 경우- ‘이것은 춤의 스펙터클이다!’) 실재의 수단 가능성에 입각한다. 곧 춤과 미디어적 조응은 인과관계보다 선후관계의 연결 방식을 보이며 서로를 보증한다. 심봉사와 심청은 허공에서 만나기보다 엇갈리며 미끄러진다. 다시 바다의 환유가 구현되며 둘의 만남은 시간의 도약과 신화적 비약, 곧 그 무한한 시공간의 건너뜀에서 오는 ‘형용’하기 힘든 차원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차원에 근거를 둔다. 



    여기서 ‘한국적’인 것에서 효와 선의 실천과 그 보답, 감동의 정서 따위는 스크린 이미지의 시퀀스 아래 짜이는 기계적 움직임의 지속과 그 알 수 없는 세계의 스펙터클의 시각적 환영성이 얼기설기 파편적으로 널려 미디어의 반영성 그 자체의 어떤 시현과 시원적 세계-로의가상적 염원/로부터의 전통의 메시지-가 엮이는 무시간적/영원적인 시간의 그물에 전통과 현재를 그야말로 뒤섞고 (부)정의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상의 서사는 존재함에도 파편적이고 또 파편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이미지성(과 그 간극)의 불균질한 차이 속에 해석은 무한히 멈추고 또한 달아난다. 


    미디어 속에 묻힌 몸은 곧 스크린의 평면성을 띠게 되며, 스크린의 또 다른 반영이 맺은, 움직임의 극을 담는 과정의 알갱이가 된다. 그 결과 몸은 특이성과 독자성을 띠기보다 ‘지나간 시간’으로 수렴되며 스크린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실재적 그림자가 된다. 미디어와 몸의 전도가 가리키는 죽음의 의식, 인형의 미메시스적 움직임은 인공적 생명력을 까지고, 자연 동일 캐릭터(들)가 된다. 


    오히려 몇몇의 남자 무용수가 흘리는 땀, 숨참만이 고된 몸의 흔적을 남겼는데, 오히려 몸의 흔적만이 실재의 춤으로 미디어의 공고함에도 유일하게 감지됐다. 눈물은 무대에 실재적 흔적으로 피날레를 향하며 그 눈물에서 누수가 되며 피어난 생명이 구원의 입구를 가늠하는 키가 된다. 눈이 하나의 은하라면 그 눈은 이미 모든 곳에 편재돼 있으며 다시 그 모든 것 너머에 있다. 마치 그 먼 거리의 우주, 곧 시간을 넘는 것들의 의식으로서 몸은 존재하고 그 움직임은 소멸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