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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리 볼레로(Three Bolero)>: '음악에 대한 안무적 주석들!?'
    REVIEW/Dance 2017. 7. 25. 17:17

    김보람: 자동인형의 소진

    김보람 <철저하게 처절하게> 공연©황승택[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대개 움직임은 몸을 분절 동작으로 구성하는 가운데 공간에는 소리가 없는데, 몸은 직선을 소지한다고 볼 수 있다. 짧은 박자들의 궤적을 몸이 구성하여 집중도를 최대한도로 높인다. 하얀 정장이라는 옷이 가진 양식성에서도 그러한 효과를 유도한다. 김보람에서 다른 퍼포머가 중앙에서 교차되는 가운데 음악이 나온다. 물리적인 가름은 결과적으로 어떤 소진의 제스처로 연결되는데, 거기서 퍼포머들은 땅바닥에 엎드리고 넙죽 땅에 처박힌다. 거기까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기보다 연장된다.

    단체의 군무가 반복되는 것에서 어두워지고 중앙에 한 명은 구음으로 때운다. 곧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채우리라는 기대를 깨는 데 주력하고 소리를 제거한―제외하지 않은―가운데 움직임의 단면을 투박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곧 볼레로라는 음악의 장치를 성찰하고 그로부터 움직임을 타진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공연이 음악에 대한 환영적 토대를 시험하는 가운데, 경음악과 같은 연주에 맞춘 직립한 퍼포머들의 미니멀한 동작들은 질서와 안정을 보여준다. 음악에 움직임이 귀속된다. 곧 ‘볼레로 없는 볼레로’는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보기 좋게 실패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쌓고 다시 쌓는 차이와 반복의 축적 대신, 캐릭터들의 음악적 동화에 가까운 서사의 개연성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가령 춤 대신 샴페인을 들고 파티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집단으로 발을 한데 딛고 앞에서 조명을 받으며 수신호를 발설할 때 그다지 움직임의 파급력이 크지 않다. 마치 정리되지 않은 듯한 개별적 동작들의 분출이고, 토끼 춤에 가까운 처음 동작의 확장이거나 실루엣에 이르러서야 춤이 비로소 앞선 김보람의 실루엣―시작의 지나친 밝음은 곧 어둠의 반명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의 연장이 된다.

    지휘자의 몸짓과 함께 한데 흩어지는 움직임들을 일종의 음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검은 하얀 콩나물. 마찬가지로 어떤 황홀감과 그것을 연장하는 파열은 염색한 이의 작은 체구와 격렬한 동작에서 나오는데, 그를 마치 지휘자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다시 집단의 움직임을 뒤에서 다시 앞으로 가르는 이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쓰러짐이 완성인데, 이는 캐릭터들―자동인형―의 힘이 음악의 종국과 함께 다 했음을 가리키기도 할 것이다.

    김설진: 현대인의 동화

    설진 <볼레로 만들기> 공연©황승택[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하얀 바닥을 설치하는 과정이 볼레로의 휘파람 그리고 의식이 없는 분열된 신체 혹은 고장 난 기계의 퍼포머 이후로도 계속된다. 뒤에는 디제잉 무대가 마련돼 있다. 소음을 잡아내고. 김보람 안무가와 마찬가지로 볼레로를 일종의 가상적 경계로 포착한다. 일종의 볼레로로 자리하는 어떤 소리의 세계들, 사람들을 하얀 바닥으로 혹은 바닥 위의 사물로 설치하는 동작 가운데에도 도시의 소음(을 표상하는 사운드)이 계속된다. 대체 볼레로는 언제 출연한다는 말인가!

    전체 무대 조명 단이 내려오고 바닥이 형광 빛을 발하고 볼레로를 애처럼 중얼거리고 각종 노이즈로 만든―예컨대 사진을 찍거나 에프 킬라 같은 분사기를 허공에 뿜거나―볼레로의 파편들, 곧 유기적인 전체가 아닌 아련한 궤적을 구성하는 여기저기의 사운드나 파편들의 신체는 좀처럼 일정한 움직임, 속도를, 단위를, 구성을 만들지 않는다.

    김보람의 캐릭터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동화 속 인물을 자동인형으로 치환한 것이라면, 김설진은 시간을 엿가락처럼 편집해 양복을 입은 개성 없는 도시인들을 편집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부분들이 따로 노는 각기를 극장 전체에 입체 음향으로 조합하는 가운데 전체의 군무는 시계 장치의 일부분들로 형상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시사이저와 같은 연주가 장악하는 디제잉[LIVETOTHE(리브투더), 정종임/최혜원]은, 볼레로 자체를 해체하고 환영으로 띄워낸다. 김보람의 작업이 동화 속 인물의 현실로의 난입이라면, 김설진은 동화 자체로 서서히 잠겨간다. 어둠 속에서 현대인의 현실을 편집하고, 쓰러지고 동시에 볼레로 오페라가 향유된다. 어쩌면 음악의 승리다. 아니 수많은 볼레로에 맞춘 안무들의 계보 아래에서, 오직 춤의 변신이 결코 아닌 음악의 변신만이 볼레로를 재표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퍼포머들이 고개를 무대 상수로 돌릴 때 음악의 트랜스가 일어난다. 태평소, 박, 채 등 국악기들이 차례로 이용된다. 물리적이고 국지적으로 사운드 스케이프에 침입하며 퍼포머들은 자꾸 꺼져가는 의식의 흐름 안에서 쓰러지며 옷을 벗어 던진다.

    김용걸: 몸은 음악만큼

    김용걸 <볼레로> 공연©최영모[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휘장이 채 걷히지 않은 어스름 가운데 볼레로와 발 구름으로 무대의 막 이전을 구성한다. 손동작과 전체의 다리 동작이 앞뒤를 오가는 가운데 조명과 함께 켜지며 무대 전체를 덮는 스펙터클의 향연을 만든다.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가 일종의 김보람의 퍼포머들과 동일성을 함축하는데, 이전에 김보람 안무로 김용걸이 볼레로에 맞춘 '차이와 반복'의 무대를 만든 적이 있다는 사실이 있다. 하지만 발레라는 기본기에 힘입어 안무는 한층 더 무겁고 안정감 있게 표출된다. 동시에 움직임들은 어떤 가벼운 제스처들의 궤적으로도 읽힌다.

    무거움은 단지 스텝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북의 잔 박자들의 표면적, 물리적 에너지를 그런 식으로 소지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 춤을 펼치지만 이런 스펙터클 안에 김용걸이 고고하게 독립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터클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이 무대는 지난 김보람-김용걸의 무대를 환영적으로 재표상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펙터클 군무의 중간의 흐트러짐이 엔트로피의 흐트러짐과 같은 안무 철학으로 승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수많은 무용수들은 김용걸의 백댄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몸과 움직임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집단(성)으로 봉합된다. 문 워커, 플라멩코, 그리고 김용걸의 탈춤과 같은 춤의 패러디적 차용이 잔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중심은 오케스트라에 필적하는 대응하는 물리적 인원의 움직임으로의 치환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조명의 온오프를 통해 프레임을 달리 두는데, 사실 그것의 뚜렷한 궤적의 변화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백댄서의 휘장을 채 걷지 않고 그 가운데서 춤추는 김용걸의 수려한 몸짓들이 결국 남기 마련이고, 세 개의 무대 가운데서 유일하게 볼레로의 감격을 소지해 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음악이 이기나 움직임이 이기나 하는 식, 그리고 우월한 김용걸의 몸, 움직임이 남는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과거에 더 격렬하게 구현됐지 않은가.

    P.S. 음악적 실험!?

    세 안무가의 각기 다른 ‘볼레로’라는 음악에서 모티프를 얻은 세 공연은, 배경음악과의 합치를 꿈꾸거나 음악 자체에 대한 주석으로 기능하는 안무의 계보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서사를 쌓는 데 주력하거나 음악에 대한 관념을 물리적으로 벗어나며 원본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거나 음악을 스펙터클로 치환하는 각각 김보람, 김설진, 김용걸의 세 작품 중 어떤 것이 동시대적 창의성, 질문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을까. 김보람의 첫 번째 장면인 빈 (음악이 없는) 무대에서 움직임, 그리고 볼레로의 잔상을 갖는 김설진의 (움직임이 아닌 오직) 음악(만)이 (셋 중 가장)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김용걸은 다만 음악에 움직임을 더하는 측면에 그친다는 점에서, 세 공연 모두 각각의 아쉬움으로 남지만 전자의 두 공연에서 음악 활용법에 있어 약간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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