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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셀 말리펀트 컴퍼니, <숨기다 | 드러내다>: '몸은 끝없는 내용일 뿐인가'
    REVIEW/Dance 2017. 10. 13. 03:14

    몸의 매체적 탐문

    러셀 말리펀트 컴퍼니(Russell Maliphant Company), <<<both, and>>>ⓒTony Nandi[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

    네 개의 작업이 ‘펼쳐진다.’ <<<both, and>>>에서 그림자와 실재의 유비는 전복돼 적용된다. 하나의 막 안의 무용수와 막에 비친 더 커다란 그림자는 무용수를 후면에, 전면의 일부로 배어들게끔 한다. 조명은 무용수 양 옆의 두 개로 변화하고 무용수는 중앙에서 두 명의 무용수를 거느린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2차원 이미지가 3차원 실재를 상회하는지가 관건이 된다.

    이미지는 곧 그것이 단지 하나의 막에 비친 것일 뿐이라는 인식보다는, 막에 걸쳐지고 그 바깥에 실재가 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셋은 하나의 다른 동시적 둘의 복사로 이뤄진 것이 아닌, 개별 존재-이미지들의 결합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어 중앙까지 해서 세 개의 조명으로 늘어났을 때 그림자는 존재의 곁에 바로 따라 붙는다. 또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존재는 막에 붙는데 안에서 겹쳐져 그림자는 동시에 존재는 어두워진다, 또는 사라진다. 여기서 갖는 놀라움은 경계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경계에서 존재/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 명씩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무대는 다시 무대에 모든 조명이 켜진 후에 무용수 한 명만이 남은 무대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오프닝이 보여주듯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움직임 그 자체가 아니라 조명과 존재가 맺는 전체 공간이며, 그 속에서 퍼포머는 일부일 뿐이다. 곧 그 속에서 강조되는 것일 뿐이다.

    네 명의 존재가 위치한 이후에 중앙의 조명이 켜지면서 비로소 어떤 생명이 생겨나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단조로운 듯한 움직임보다 뚜렷한데, 곧 어떤 분기점을 순간 안기는데, 존재는 움직임 자체로 설득력을 얻기보다는 시공간 속에서 조명을 통해 작동하는 것에 가깝다.

    러셀 말리펀트 컴퍼니, <One Part II>ⓒJohan Persson[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

    러셀 말리펀트가 단독으로 출연하는, <One Part II>(1997년에 초연된 작품)에서 글렌 굴드 버전으로 연주되는 바흐의 서정적 곡[Sinfonia no. 11 in Gm and Partita no. 1 in B flat Major(Sarabande)]에 맞춰 가끔씩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는 퍼포머는 얼핏 보면 원숭이의 외양을 흉내 내는 듯 보인다.

    인상적인 건 연주만큼 움직임이 느리다는 것이고, 이는 음악이 움직임의 부수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라기보다 음악이 움직임으로 가라앉는다는 것, 또 움직임이 음악의 끝에서 또 다른 음악으로 이동하고 있음의 측면에서 음악과 움직임 모두 예외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마치 움직임의 끝에서 음악을 만질 수 있다는 느낌을 선사하는데, 곧 소리는 움직임으로부터 촉발돼 들리는 것이다.

    러셀 말리펀트 컴퍼니, <Two x Three>ⓒTony Nandi[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

    <Two x Three>(원래 1998년에 다나 푸라스를 위해 만든 솔로작품으로, 세 명의 여성 무용수 출연으로 재구성된 버전)에서 다섯 구간은 정확하게 분배되며 그림자 안에 들어선다. 퍼포머들은 전반적으로 팔을 휘젓는 동작들을 반복하는데, 이는 원뿔 모양으로 그들을 감싸고 있는 시공간을 지각하며 관객에게 그 감각을 이전시키는 것과 같다. 분명히 이는 하나의 환영적 경계임에도 실재적으로 작용하는데, 그 그림자 바깥을 벗어나는 손은 그 환영성을 아니 실재를 깨뜨리는 인지 부조화의 현상을 안긴다.

    구분 동작들은 흐트러짐이 없고 다른 시공간으로 분절된다. 이 원뿔 구조의 공간이 온전히 거두어지면, 이후 바닥 전반에 네모난 프레임의 막들이 겹쳐진 공간이, 또 오른쪽 귀퉁이에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또 다른 겹친 막들의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각각 한 명과 세 명의 무용수의 움직임이 교차적으로 또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전자는 막이 바닥에 생겨남과 동시에 그의 등장도 생겨난다고 할 수 있고, 곧 끊임없이 시공간이 바뀐다는 설정을 한다. 

    다시 공간이 바뀌어 네모난 프레임들이 약간의 간격을 띄우고 형성된 구역에서 두 퍼포머는 돌다리를 건너듯 움직인다, 그러나 그 사이를 계속 밟게 된다. 그리고 마치 밟을 수 없는 장소는 밟아서는 안 되는 의식적 강제로 즉각 전환된다.

    러셀 말리펀트 컴퍼니, <Piece No. 43>ⓒHugo Glendinning[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

    <Piece No. 43>(이름의 ‘43’은 조명 디자이너 마이클 헐스와 러셀 말리펀트의 43번째 협업작임에서 기인한 것이다)에서는 움직임에 조명이 쓰이는 식으로 무대가 구성된다. 마지막 장면은 다섯 명이 일렬로 대각선 구도를 형성하며 움직이는데 조명이 밝혀지며 동작은 바뀌게 되는데, 아니 바뀐 동작이 밝혀지게 되는 셈인데, 동작이 바뀌고 있음이 들키는 장면은 가령 조명에 따른 움직임의 착시적 효과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결과였다. 팔을 휘젓는 동작들로 움직임 단위가 해소되는 것은, 가령 착시를 위한 것이고, 이는 마찰음과 같은 소리와 맞물림으로써 어떤 시간적 공명은 팔의 공간적 위치 이동으로 전환된다.

    다섯 명의 무용수를 일렬로 배치하여 다른 움직임들로 전환되는 것은 하나의 시계열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고, 시각적 전환과 연접을 위한 배치로써 일종의 작은 단위들의 차이가 동시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곧 그 차이들은 하나의 전체의 상 안에 속하며 독립된 개별성을 주장하기보다(그 자체로는 단지 관계 맺지 않는 일자들이다) 동시성의 평면 아래 '하나의 다양성'으로 포섭된다.

    <<<both, and>>>, <Two x Three>, <Piece No. 43>은 무대 메커니즘, 곧 조명과 공간을 하나의 그리고 최소한의 매체로 내세우며 갖는 효과들을 시험한다. 여기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결코 순수한 것이, 집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의 부속이고 그 안에서의 차이이다.

    <<<both, and>>>의 경우에 실재와 이미지의 경계를 시험하며 이미지로서의 몸, 몸으로서의 이미지를 꺼내놓으며 순수한 몸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 보이는 것(이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면, <Two x Three>와 <Piece No. 43>은 조명과 움직임이 상응하며 파생되는 여러 현상을 확인시키는데, <<<both, and>>>에서 그러한 매체로서 몸은 유의미한 근거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반면 <One Part II>는 다른데, 몸은 음악을 상회한다. 다른 공연들이 음악이 눈에 띄지 않다 부분적으로 과도하게 적용되는 데 반해, 음악은 몸을 넘쳐흐르거나 몸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매체 자체에 대한 실험(그 외에 별다른 내용을 찾을 수 없다)은 사실 아주 오래 전 것으로 느껴진다. 별로 새로울 것 없다고 해야 할까. 일견 생각나는 작업은 한 십 년 전쯤 춘천마임연극제의 도깨비어워드 작업들이 그러했다고 할까. 그렇지만 <One Part II>가 보여주듯 매체/장르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에 대해 탐문하는 작업은 꽤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 그랬듯 국내 무용 자체가 모더니즘을 제대로 겪어내지 못한 탓일까(서현석 저자의 『미래예술』에서 각 장르/매체의 그 본원을 궁구해 나가며 모더니즘을 분기점으로 무용사를 다루는 부분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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