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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희단거리패,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이념으로서 전쟁과 생의 의지’
    REVIEW/Theater 2017. 12. 23. 02:26

    ▲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작: B.브레히트, 번역: 이원양, 번안ㆍ연출: 이윤택) 공연 장면 [사진 제공=연희단거리패](이하 상동)

    전쟁은 공허한 당위를 그 안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만들어내게 하는가.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에서 전쟁은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세계의 일시적인 혼란의 상태로 믿어지고, 이후 평화의 세계가 찾아올 것이라는 유예된 평화에 대한 환상이 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억척어멈(김미숙)은 전쟁을 적극적으로 장사의 수완으로 사용하며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가 되는 듯 일견 보인다. 이는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근거하는데, 사실상 그는 자신의 자식 셋을 모두 전쟁 통에 잃게 되며, 마치 그는 유일하게 전쟁을 벗어난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듯하나 마찬가지로 전쟁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인간 내면을 상정하게 한다, 물론 실제 그것이 드러나거나 초점이 맞춰지지는 않는다.

    브레히트의 원작은 17세기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하나, 이를 6.25 전쟁 당시 남원 지역으로 전환했고, 인물의 이름과 말 모두 이를 따른다. 판소리가 대사 일부를 차지하고 드럼은 북으로 전유돼 이를 보조한다. 완벽한 이름 치환/옮김은 사실상 어떤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지만, 익숙한 배경과 어투는 작품에 대한 친근함을 높이며 노래들은 모두 새롭게 작곡되고 원작의 맥락과 상이하다. 또한 작품에서 특정 전쟁 자체를 부각시키기보다 전쟁 가운데 개인 주체의 (잘못된) 판단으로 소급시키며 전쟁을 인간의 보편적 이념의 차원에서 사고하는 것으로 끌어올리므로, 배경은 배경으로 남을 뿐이다. 30년 전쟁의 맥락이 어느 정도 제시되는 원작에 비해 6.25 전쟁의 맥락은, 또한 목소리는 거의 없는 편인데, 결과적으로 원작에 비해 전쟁이라는 이념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서사를 읽을 수 있다.

    남원 지역은 군인과 억척어멈 일행(의 사투리)으로 전유되고 매개되는데, 그 안에 지역 주체는 특정하게 자리하지 않는다. 군인의 말처럼 그들은 ‘거시기’로 거의 모든 걸 지칭하는 ‘거시기’로 지칭되는데, 전쟁을 통해 미개한 이들을 다 휩쓸어 버리고자 하는 전쟁의 무분별한 동력 자체를 표상하는 그의 말은, 전쟁이 생활 전반의 컨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따라서 ‘거시기’가 구체적 지칭들로 분화가 가능한)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일종의 이름을 가진 이들, 곧 개인 주체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미시적 주체, 개인들 대신 억척어멈의 서사를 큰 줄기로 하는 원작을 따라 이는 희미하게 사라진다. 곧 전쟁이 이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까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서사극의 포맷은 여러 군데 차용된다. 판소리라는 발화의 다른 전개 양식뿐만 아니라, 모든 막은 오른쪽 자막을 통해 미리 그 내용과 결말이 공개되고, 연기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가면을 쓴 군인들의 모습은 익명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고, 주인공인 억척어멈은 공감보다는 질문의 대상으로 남는다. 자식을 돈과 협상하는 억척어멈의 모습은, 모성애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 자체로부터 이화되는데, 실상 군인들을 상대로 한 억척스러운 모습과 굳건한 생명력, 아버지라는 존재 없이 가장의 몫을 수행하는 것(자식들은 각자의 성을 갖는데, 이는 전쟁의 영향을 가정하는 부분도 있지만, 한국 상황으로 옮겨졌을 때는 그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억척어멈의 대담함에 대한 독해로 귀결된다), 또 자유로운 섹스에 대한 암시 등은 모계 중심의 새로운 역할 상으로도 읽힌다.

    한편으로 전쟁과 대별되는 유일한 가치는 먹고 사는 것의 문제, 나아가 생명이다. 억척어멈이 둘째 아들(박정우)이 자기 자식임을 부정하는 장면들은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베드로를 상기시키는데, 신학적 유비가 새겨지는 데 그치는 대신 돈과 생명의 가치가 순수하게 대립되며 전쟁의 무용함이 설파된다. 따라서 이념과 실재의 대립과 전자의 극복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 작업은, 동족 간의 전쟁의 역사를 호명하되 그것을 시대적으로 앞서 나간 시제에서 바라보는 것쯤에서 그친다. 곧 연희단거리패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은 6.25 전쟁이라는 우리의 상황을 가져오되, 그에 대한 특정한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전쟁은 어리석은 이념에 의한 것’이라는, 보편적 전쟁에 대한 상을 정초하는 것으로 다시 환원되는 듯 보인다.

    억척어멈은 둘째 아들을 잃고 온몸을 뒤틀며 괴로움을 표한다. 온전히 울지도 못하는 모습은 마치 돈을 흥정하는 가운데 아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던 앞선 선택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듯하다(돈에 붙들려 있는, 돈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리고 하늘에 대고 말을 한다. 이 역시 약간의 이화 효과를 동반하는데, 신은 호명되기보다 텅 빈 존재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결국 북을 치며 북한군을 끌어들이다 남한군에게 총을 맞고 죽는 셋째 벙어리 딸 순나(신다영)의 죽음은 여운을 남긴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은 진실을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순나의 죽음은, 그가 전쟁으로부터 유일하게 순수함을 지켜 나간 인물로 보인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곧 전쟁은 승리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담담하게 억척어멈은 맞는다. 원작에서 죽음은 건드려지지 않고 끝나는 데 비해 연희단거리패의 작업에서는 억척어멈의 기구한 삶으로 죽음은 소급되며, 슬픔은 생생하게 죽음과 함께 살아난다. 돈과 바꾼, 돈과 바꾸지 못한 둘째 아들의 죽음이야말로 작품의 실재적인 중핵이라 한다면, 이러한 죽음에 대한 제의적인 장면은 생명을 강조하며 이념으로서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안을 전제로 하는 작업의 또 다른 맥락과 연동되며 결말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S.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연희단거리패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은 우선 2017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으로, 지난 9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연희단거리패 30스튜디오로 장소를 옮긴 공연은, 공간에 매우 꽉 찬 느낌을 주는데, 마지막 억척어멈이 다시 마차를 끌고 갈 때 억척스런 몸짓이 마차의 회전 반경과 동력 그 자체로 확장되며 활인화처럼 변하는 순간을 예외로 한다면, 그밖에 마차의 움직임 반경을 소화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은 사실상 없다(객석과 가까운 무대가 주는 생생함은 이화 효과와 어떤 상관 관계를 맺는지는 조금 더 재고될 부분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포스터

    [공연 개요]

    ㅇ 공 연 명 :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ㅇ 작 : B. 브레히트

    ㅇ 번역 : 이원양

    ㅇ 번안․연출 : 이윤택

    ㅇ 음악감독 : 최우정

    ㅇ 방언 및 소리구성 : 박성환

    ㅇ 조명디자인 : 조인곤

    ㅇ 무대제작 : 김경수

    ㅇ 출연 : 김미숙 윤정섭 오동식 천석기 김아라나 양승일 박정우 신다영 배소민 양현석 임한결

    ㅇ 공연기간 : 2017년 11월 23일(목) - 12월 17일(일)

    ㅇ 공연시간 : 평일 8:00 / 주말 3:00 / 월요일 쉼

    ㅇ 공연장소 : 연희단거리패 30스튜디오

    ㅇ 제작 : 연희단거리패

    ㅇ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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