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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 《슬픈 나의 젊은 날》: 세계와 접면하는 현존재들
    REVIEW/Visual arts 2023. 8. 13. 15:13

    《슬픈 나의 젊은 날》은 부산 지역 출신의 작가 세 명이 참여한 전시로, 물론 부산이라는 지역의 언어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곧 다른 범주가 요청된다. 이를 묶는 건 큐레이팅의 언어(안대웅 학예연구사)이자 그것의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설치로의 구현이다. 세 명의 작가에 맞춘 전시장은 “가속”, “에너지 흐름”, “인상”의 키워드와 함께 세 공간으로 구획되었고, 작가의 작업은 어느 정도 섞이며 조정환, 김덕희, 오민욱의 순으로 이어진다. 인상적인 건 핸드아웃을 대신하는 서문과 모든 개별 작품의 캡션과 설명을 담은 팸플릿이다. 

     

    그런 차원에서 어쩌면 《슬픈 나의 젊은 날》은 큐레이팅의 이념을 분명하게 언어화하고 그 주체를 투명하게 만들며 매개의 몫을 이전하지 않으려는 독특한 전시일 수 있다, 그것이 드물다고 생각되는 차원에서. 그럼에도 전시는 좀처럼 명확해지지 않는데, 세 명의 빽빽한 ‘맞세움’이 그것과의 거리 두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수렴의 접점을 찾기에는 세 작가의 작업이 연관되기보다는 더 이지러지기 때문이다. 곧 큐레이터는 세 작가에게서 공백을 가설하여 연결의 세계를 만드는 또 하나의 작가가 되었음에도 작품들에 대한 개별적인 종착점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의 과제로 남게 된다. 

    이는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부분인데, “슬픈 나의 젊은 날”이라는 제목은 배창호 감독의 청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패러디인 『슬픈 우리 젊은 날』이라는 198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낙서를 엮은 시집 제목을 전유한 것으로, 일종의 밈의 계보를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슬픔을 “우리”가 아닌 “나”가 느끼는 것으로 치환하는 가운데, 세 명의 작가가 대하는 세계로 초점이 옮겨 가게 된다. 

     

    《슬픈 나의 젊은 날》 전시 전경[사진 제공=부산시립미술관]

    조정환 작가의 회화는 불길한 미래 세계와 그와 마주한 존재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첫 번째 공간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그의 네 개의 ‘레드얼럿’ 연작은, 주요하게 빨강과 노랑에서 시작된 보색 대비를 강렬하게 드러나는 작업이다.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이 같은 불길의 내용은 가장 큰 작업에서는 위쪽으로 가며 붓질의 형식과 공존한다―〈레드얼럿〉(2021. 캔버스에 유채, 390.9×193.3cm.). 반면 붓질의 자유로움은 이 작업의 하단 이미지를 확대해서 그린 〈레드얼럿〉(2021. 캔버스에 유채, 80.3×80.3cm.)에서나 〈레드얼럿〉(2021. 캔버스에 유채, 130.3×193.3cm.)에서는 불길이라는 내용을 앞지르기에 이른다. 

     

    불길은 붓질로 치환되고, 추상화된 회화에 이른다. 이러한 특질은 어떤 기대감을 부르지만, 실은 전시에서 자율적인 질서의 회화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구간에 속하며―또 하나의 예외라면, 이케아 매장의 일화에서 착상된 〈IKEA Wave〉(2020. 캔버스에 유채, 112.1×145.5cm.)로, 반절을 덮는 바다에 들이닥친 쓰나미에 대한 재현으로서 노란색 붓질은 이상하게도 다분히 유희적이고 스타일적이다.―, 나머지는 디스토피아와 거기서 나타나는 존재에 대한 재현의 성격이 짙다. 곧 서사로서의 내용이 회화의 형식을 초과할 때 회화는 핍진해지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검은 기둥이 위태로운 모습, 화염이 불타고 파편이 낙하하는 모습을 연구한 결과”로서, 앞선 가장 작은 〈레드얼럿〉(2021. 캔버스에 유채, 80.3×80.3cm.)은 독특하게도 뒤이어 보여줄 고층 빌딩들과 그보다 크게 면적을 차지하는 불길한 하늘로 드리워진다. 곧 노랑과 빨강이 형태적으로 도시의 한 장면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가령 〈Call It a Day〉(2022. 캔버스에 유채, 227.3×162.1cm.)의 화면을 과도하게 뒤덮은 “붉은색의 무거운 구름”과 “비석 같은 폐허”로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절대적인 대비를 예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레드얼럿〉(2021. 캔버스에 유채, 80.3×100cm.)은 추상회화의 가능성 대신 구체적인 세계 구축을 또한 예비한다. 어둡고 불그스름한 하늘 아래 버스와 승용차 위의 두 사람이 대립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네 개의 ‘레드얼럿’은 수직의 방향성을 강조한 각목들의 직조로 된 구조물에 걸려 있다―김덕희의 〈누군가의 사각형〉(2021. 시멘트, 히터, 스피터(사운드 루프 재생), 20×4×21cm.)은 검붉은 ‘레드얼럿’ 속에서 그냥 지나치게 되거나 이상한 회화쯤으로 여겨지며 이후의 작업을 예고한다. 이러한 설치 방식은 회화를 어느 정도 일정한 신체 기준에 맞추지 않고 위태롭고 불편하게 회화를 보게 하는 대신에 집약적이고 포화된 상태로 회화들을 압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임시 가설이 은유하는 세계는 마침내 이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마주하는, 역시 이 구조물에 붙은 오민욱 작가의 〈철길, 건축물, 부지, 화분〉(2017. FHD, 무음, 2분.)에 이르러 실제의 현장으로 체현되며 완성된다. 이는 공사작 가림막의 재현이 유동적이고 임시적이어서 ‘불완전한’, 폐허의 결말을 예기하는, 조정환의 상상력이 제목, 〈떠다니는 미래〉(2022. 캔버스에 유채, 72.7×50cm.)로 치환된 작업에서 역시 그렇다.

     

    〈Call It a Day〉가 도시라는 무의식을 보여준다면, 주로 동굴을 비롯한 기괴한 자연을 그린 다른 작업들의 양상은 무의식 자체의 탄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근원적인 형태이다, 우리가 온 곳을 지시한다―〈We Came form…〉(2020. 캔버스에 유채, 100×160.6cm.), 그리고 컬러감이 강한 네 개의 캔버스를 이은 〈We Came form…〉(2020. 캔버스. 130.3×800cm.). 여기서 동굴은 고층빌딩의 역전된 형태로도 보인다. 작업의 시기가 더 이르다는 점에서―전시 동선상으로는 뒤늦다.―, 고층빌딩은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까. 〈자루〉의 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린 것 같은,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의 〈To the Bottom〉(2022. 캔버스에 유채, 72.7×50cm.)이나 〈To the Top〉(2022. 캔버스에 유채, 72.7×50cm.)이 “어릴 적에 경험한 아파트 계단실을 상상하며” 그린 작업이라는 점은 아파트 자체가 작가의 무의식을 제조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층빌딩들을 흑백으로 드러내며 “집단서식”으로 명명한 ‘집단서식’ 시리즈는 더 이전부터 〈Call It a Day〉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자루’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데, 가령 높은 건물을 옆으로 한옥 건물이 중앙을 차지하고, 옆에는 불꽃 ‘자루’가 이를 뒤덮으려 하는, 일종의 화재를 자루라는 개념으로 번역함으로써 형태적인 차이를 입체적인 분화로 구성한 〈자루〉(2023. 캔버스에 유채, 193.9×112.1cm.)나 식물에 걸린 열매 ‘자루’를 표현한 〈자루〉(2022. 알루미늄 패널에 오일 파스텔, 130.3×97cm.)가 그러하다. 이는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결정이기도 하다―〈자루〉(2022. 알루미늄 패널에 오일 파스텔, 53×45cm.). 그리고 자루 안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또는 고층빌딩 같은 도상을 부감으로 내려다 본 것 같은 작업이 〈웅크린 도시〉(2019. 캔버스에 유채, 100×73.3cm.)이다―〈자루〉와 〈Call It a Day〉를 매개한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작업은 도시인의 무의식이라는 심층에서 도시라는 무의식의 표층을 향한다―전자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업이 〈콘크리트 이터〉(2019. 캔버스에 유채, 100×80.5cm.)로, 다른 그림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형상이 에일리언과 흡사한 느낌의 존재로 드러나며, 초승달 모양의 얼굴에 이빨이 얼굴 전체에 박혀 있다 . 

     

    《슬픈 나의 젊은 날》 전시 전경[사진 제공=부산시립미술관]

    〈상〉(2012. FHD, 2채널 오디오, 20분.)은 현재의 부산근현대역사관―일제강점기에 동양청식주식회사에서 해방 후 부산 미국문화원으로 변모한 공간―의 외관과 내부 장식을 훑는다. 전자가 건물 주변―근처의 “용두산공원”의 간판이 계속 들어온다.―을 맴돌면서 역사의 푸티지 필름을 호출해 온다면, 후자는 한 화면에서 초점을 변경해 뿌옇게 사물 일부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더듬거나 사라지는 감각은 역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역사에 대한 나의 위치 감각의 불안정성을 표현하는 것.  〈상〉은 불완전한 이미지를 조금 더 명확한 언어로 이끌어 가는데,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구속자들의 최후진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최후진술[항소심][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출처=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483473.)을 한 사람들을 한 화면에 기입하는 것으로써, 이곳이 “1980년대 신군부의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을 미군이 묵과했다는 이유로 벌인 방화사건”―으로 유명해졌음을 드러낸다. “양키”의 대등하지 않은 지위상에서의 물리적인 “간섭”과 장소적인 침입에 대한 주체성―“우리 자신들의 것”을 드러낸다. 일종의 민족주의의 일환으로도 보이는 선동은 국가에 대한 비판과 양키의 신앙 체계―“하나님”―와 그들을 보는 우리 자신을 표상하는 언어―“마음씨 좋은 샘아저씨” 등과 뒤섞이며 혼란의 심리적 질서를 구성한다.  

     

    〈적막의 경관〉(2015. FHD, 2채널 오디오, 21분 8초.) 역시 같은 장소를 맴돌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 자체를 현상한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명시되고, 그곳 역사교육관에서 흘러나오는 교육 영상의 TV 아나운서의 소개가 반복된다. 그곳으로 가며 촬영한 이미지와 리와인드하는 영상이 겹치게 되는데, 이로써 이지러진 균형을 맞춘다. 역사는 한 치도 그 자리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셈이다. 여기에 강물과 구름의 흐름이 보편의 토대와 그 안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역사는 찍히지 않고, 자연은, 이미지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곧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1951년 2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사건이다.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이 살해됐다.”(최민영,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경향신문, 2011.02.09. 출처= https://m.khan.co.kr/people/people-general/article/201102092111185#c2b.).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2020. FHD, 2채널 오디오, 8분 18초.)는 매체 철학자 폴 비릴리오(1932~2018)의 열화된 초상에서 시작해서 35mm 필름을 사용해서 로모키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로 편집한 영상으로, 휴대폰에 담긴 이미지를 손으로 빠르게 넘기는, 이미지를 찍은 이미지다. 이미지는 그것들 안에서 엄마가 포대에 애를 안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미지로 돌아오곤 한다. 처음에 시력 손실을 경고하는 문구와 반짝임의 빛-이미지는 이미지의 탄생 시점을 순간화하면서―우리를 이미지로 만드는 셈이다.―, 폴 비릴리오의 현상으로 이어지며 매체에 대한 메타적 관점을 보여준다. 저장된 일상이라는 아카이브는 회귀하는 무의식을 보여주는 것과 별개로, 편집―이미지의 삭제와 재구성―의 여부를 떠나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모〉(2023. FHD, 5.1채널 오디오, 74분.)는 “지난 10년간 오민욱의 휴대전화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천의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상으로, 샤오가 민욱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시작된다―샤오가 보낸 편지와 샤오가 받은 답신을 모두 샤오가 읽는다. 비행장에서부터 꽤 느린 속도로 사물을 더듬어간다. 아마도 여기서는 이미지가 놓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며 자연스레 사물이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더듬거림은 내레이션이 들어오며 순수한 형식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의 분기는 인물들이 출현하면서부터 초점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인상적이게도 결혼식장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살아있는데, 곧 어떤 이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데, 이는 이미지를 지연시킴으로써 가능한 부분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분절은 이미지의 운동을 통해 이미지의 내용이 아닌,  이미지의 양태를 부상시킨다. 내용은 내레이션으로부터 나온다. 그럼에도 그러한 내용이 이미지와의 연결을 통해 명확해지는 건 아니다. 편지는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샤오에게 여름에 대한 편애와 겨울에 대한 혐오는 계속 강조되는 부분이다. 기억은 어렴풋하고 계절은 기억의 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또는 계절은 선후를 뒤바꿀 수 있으며, 고유명사로서 모든 역사의 시간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1월 1일이 (아시아에서) 두 번의 새해로 온다는 언급과도 상응하는데, 두 시간대의 기이한 연결은 부조리한 죽음의 당사자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26살 여교사 김영명이 그러하다. “나의 눈”, “너의 목소리”, “그녀의 존재”라는, 각각 민욱과 샤오, 김영명의 신체를 조합함은 “관념으로 만든 영화”가 된다. 그것은 세 사람을 온전히 담지 않거나 담을 수 없다. 샤오의 목소리가 두 개의 편지이므로, 샤오의 것이라면 편지의 시점에 머물러 있거나, 민욱의 것이라면 이미 지난 편지의 시점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주체가 실은 그것을 듣는 주체와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따라서 샤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현상되지 않는 김영명의 신체를 어쩌면 체현하는 듯하다―“슬픈 나의 젊은 날”이 그렇게 부상한다. 김영명에 대한 어떤 흔적도 현재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대체물이 매개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진다. 곧 대상으로 다가갈 수 없는 주체의 더듬거림의 행위가 편지로서 드러난다. 대만의 샤오와 한국의 민욱, 그리고 역사의 제3자라는 연결은 1947년 제주 4·3사건,  1948년  여수·순천 사건,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대만 민주화 사건)이라는 국경을 초월한  역사-지리의 계보를 새롭게 구성한다. 〈허구의 열차〉(2022. 소설 가제본 인쇄.)에 나온 한 구절은 역사의 부재를 더듬거리는 ‘민욱’의 행위를 그리고 그럼에도 지속되는 역사의 이미지를 현상한다. “그러나 도시 곳곳엔 시위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풍경과 사물은 항쟁의 시간을 기억한다.”

     

    《슬픈 나의 젊은 날》 전시 전경[사진 제공=부산시립미술관]

    김덕희 작가의 작업들은 현상학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낮의 기둥〉(2021. 히터, 파라핀 왁스, 스텐레스, 사이즈 가변.)은 “하부의 지지대에 히터가 내장되어 있어 열과 기둥 자체의 무게에 의해 파라핀 기둥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그것은 다른 두 작가의 작업 사이에서 필연적인 요청이었을까. 조정환의 회화가 미래를 포착하고, 오민욱의 영상이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맴돈다면, 김덕희의 설치는 현재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체현한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을 증명하면서 미래를 향해 변화한다. 무엇보다 이는 개입되는 현장을 만든다. 세계는 텅 비어 있지 않고, 사람들로 채워진다. 

     

    〈지금, 여기〉(2018. 시계, 모터, 30×30×20cm.)는 침은 그대로이고 몸통만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작업으로, 정지된 시간과 변화하는 질서의 대비가 부각된다. 시간에 대한 인지는 시계의 가라는 물리적 체감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물질 그 자체가 강조된다. 이는 유한한 ‘현재’를 증폭한다. 〈하얀 그림자〉(2023. 석고, 히터, 사이즈 가변.)는 전시장에서 가장 주요하게 들어오는 작업이다. 바닥에는 “작가가 실제 만났던 사람들의 신체 일부를 캐스팅한” 조각들로, 관객이 만질 수 있고, 만지면서 온기를 느끼게 된다. 순간은 부재를 앞지른다. 〈뜨거운 새벽의 유령〉(2021. 증류수, 히터, 스테인리스, 솔레노이드 밸브, 펌프, 사이즈 가변.)은 “뜨거운 열과 만나 기화하는 수증기”가 간헐적으로 순식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작업이다. 이는 일시적인 설치의 특징을 가능성으로 증폭한다. 동시에 부상하는 굉음이 오민욱의 〈적막의 경관〉의 ‘적막’에 조응한다. 

     

    《슬픈 나의 젊은 날》 포스터[이미지 제공=부산시립미술관]

    《슬픈 나의 젊은 날》은 얇은 미래(조정환)와 절대적으로 무거운 과거(오민욱) 사이를 현재의 접촉(김덕희)으로 연결한다. 중간의 전시장을 가득 채운 〈하얀 그림자〉가 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첫 번째 공간에서 출발했을 때 가볍지만 뜨거운(‘슬픔’과 ‘젊음’은 모순된다.) 그래서 인상적인 조각의 만남은 마지막 공간을 지나치며 비로소 그 무게를 획득하는 듯하다. 폐허와 부채의 시간에서 체험의 의미는 그 두 개를 모두 상정하거나 부재하다. 그럼에도 현재와의 거리를 확보하려는 두 작업을 경유하며 혼란이든 태도이든 현 존재의 위치를 드러내게 된다. 그런 지점에서 〈퀀텀드림〉(2018. LED 디스플레이, 전선, 스피커, 비디오 루프 재생, 11분.)은 징후적이다. 

     

    〈퀀텀드림〉의 “LED 디스플레이에 내장된 모든 R, G, B 다이오드”가 “분해, 연장”돼 “뒤섞이고 흐트러진” 현재의 감각은 발광하는 일종의 ‘꽃’들의 집단을 이룬다. 각각의 출발점으로의 귀속되지 않은 세계는 그 구조의 엄밀한 세계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이는 현존재에 대한 은유이다. 또한 개체화된 삶들의 정치의 이념에 대한 실종의 은유로도 보인다. 출산에서 장례로 이어지는 비디오의 서사와 같이 개체의 삶은 단지 현란한 빛을 내는 물리적인 실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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